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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라후가 정벌 중에 죽고 옹우려가 임금이 되었으며 매년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중국과 무역도 허락받음

  • 국가
    돌궐(突厥)
그 이후에 처라후가 다시 서쪽으로 정벌하다가 날아온 활에 맞아 죽었다. 그의 백성들이 옹우려를 받들어 임금으로 삼으니 이가 힐가시다나도람가한(頡伽施多那都藍可汗) 주 001
각주 001)
頡伽施多那都藍可汗(재위 588∼599): 고대 투르크어로 ‘일테리쉬 초르 투란 카간(Ilterish chor turan qaghan)’의 음사로 추정된다. 이것은 處羅侯(카라 초르)의 정식 가한 칭호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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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었다. 옹우려가 사신을 보내 궁궐을 방문하자 [황제가] 3천 단을 예물로 내렸다. [그가] 매년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이때 유망인 양흠(楊欽) 주 002
각주 002)
楊欽: 隋나라 사람으로 突厥에 투항해 彭國公 劉昶의 사신을 모칭했다. 都藍可汗이 隋를 공격한 사건과 관련되었다가 이후에 隋의 사신에게 잡혀 왔다(『隋書』 권51 「長孫晟傳」: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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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로 망명해 팽국공(彭國公) 유창(劉昶) 주 003
각주 003)
劉昶(?∼597): 北周, 隋代의 관리로 中山(지금 河北省 定縣) 사람이었다. 劉亮의 아들로 宇文泰의 딸인 西河長公主와 결혼했다. 大象年間에 柱國, 秦州와 靈州總管 그리고 彭國公이 되었다. 隋 건국 이후 左武衛大將軍 慶州總管이 되었다. 開皇 17년(597)에 不孝罪를 지었다고 해서 죽임을 당했다(『周書』 권17 「劉昶傳」: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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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의 처가인] 우문씨(宇文氏)와 모반을 일으켰다고 거짓으로 얘기를 하며 [같은 우문씨인] 대의공주(大義公主)에게 군대를 일으켜 [수나라의] 변경에서 소란을 피우라고 했다. 도람[가한]은 [양]흠을 잡아 [이를 수나라에] 보고하면서 [동시에] 발포(葧布)주 004
각주 004)
『北史』에는 “勃布”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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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어교(魚膠)주 005
각주 005)
魚膠는 鰾膠의 속어로 물고기의 창자로 만든 접착제인데, 접착력이 강해 나무를 붙이는데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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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토산물로] 바쳤다. 그의 동생 흠우설(欽羽設) 주 006
각주 006)
欽羽設: 都藍可汗의 동생인데, 그의 실체는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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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부락이 강성하자 도람[가한]이 [그를] 꺼려 공격하고 군진에서 [그의] 머리를 벴다. 그해에 [도람가한이] 외삼촌인 욕단특근(褥但特勤) 주 007
각주 007)
褥但特勤: 고대 투르크어로 ‘예틴지 테긴(Yetinci tegin)’의 음사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일곱 번째 테긴”이라고 볼 수 있다. 都藍可汗의 외삼촌으로 그의 실체는 확실하지 않지만 다만 隋나라에서 康國公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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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수나라에] 보내 우전(于闐)의 옥장(玉杖)주 008
각주 008)
玉杖은 옥의 산지로 유명한 于闐(호탄)에서 만든 옥지팡이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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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바치니 황제가 욕단[특근]을 주국 강국공(康國公)주 009
각주 009)
康國: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도시 명칭으로 薩末鞬, 혹은 颯秣建라고 달리 표기하기도 하는데, 지금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Samarkand)를 지칭한다. 國都는 阿祿迪城(지금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 북쪽)였다. 康國의 王은 본래 溫氏이며 月氏人이었다. 그 이전에는 祁連山 북쪽의 昭武城에 거주하다가 匈奴에게 격파당하게 되자 서쪽으로 파미르 고원을 넘어 그 땅으로 옮겨왔다. 여러 일파들이 각지의 王이 되었고, 唐 永徽 연간에는 康居都督府가 설치되기도 했다. 中國의 기록에 康의 성을 갖고 있는 소그드 인[胡人]은 모두 이곳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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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삼았다. 이듬해(588) 돌궐 부락 대인(大人)주 010
각주 010)
大人은 일반적으로 한 사회집단의 長老를 가리키는 말인데, 저본에서는 ‘部落의 酋長’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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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연이어 사신을 파견해 말 만 필, 양 2만 두, 낙타와 소 각각 5백 두를 바쳤다. 오래지 않아 사신을 보내 변경을 따라 시장을 두어 중국과 무역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라고 명령했다.

  • 각주 001)
    頡伽施多那都藍可汗(재위 588∼599): 고대 투르크어로 ‘일테리쉬 초르 투란 카간(Ilterish chor turan qaghan)’의 음사로 추정된다. 이것은 處羅侯(카라 초르)의 정식 가한 칭호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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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楊欽: 隋나라 사람으로 突厥에 투항해 彭國公 劉昶의 사신을 모칭했다. 都藍可汗이 隋를 공격한 사건과 관련되었다가 이후에 隋의 사신에게 잡혀 왔다(『隋書』 권51 「長孫晟傳」: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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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劉昶(?∼597): 北周, 隋代의 관리로 中山(지금 河北省 定縣) 사람이었다. 劉亮의 아들로 宇文泰의 딸인 西河長公主와 결혼했다. 大象年間에 柱國, 秦州와 靈州總管 그리고 彭國公이 되었다. 隋 건국 이후 左武衛大將軍 慶州總管이 되었다. 開皇 17년(597)에 不孝罪를 지었다고 해서 죽임을 당했다(『周書』 권17 「劉昶傳」: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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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北史』에는 “勃布”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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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魚膠는 鰾膠의 속어로 물고기의 창자로 만든 접착제인데, 접착력이 강해 나무를 붙이는데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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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欽羽設: 都藍可汗의 동생인데, 그의 실체는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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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褥但特勤: 고대 투르크어로 ‘예틴지 테긴(Yetinci tegin)’의 음사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일곱 번째 테긴”이라고 볼 수 있다. 都藍可汗의 외삼촌으로 그의 실체는 확실하지 않지만 다만 隋나라에서 康國公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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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玉杖은 옥의 산지로 유명한 于闐(호탄)에서 만든 옥지팡이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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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康國: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도시 명칭으로 薩末鞬, 혹은 颯秣建라고 달리 표기하기도 하는데, 지금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Samarkand)를 지칭한다. 國都는 阿祿迪城(지금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 북쪽)였다. 康國의 王은 본래 溫氏이며 月氏人이었다. 그 이전에는 祁連山 북쪽의 昭武城에 거주하다가 匈奴에게 격파당하게 되자 서쪽으로 파미르 고원을 넘어 그 땅으로 옮겨왔다. 여러 일파들이 각지의 王이 되었고, 唐 永徽 연간에는 康居都督府가 설치되기도 했다. 中國의 기록에 康의 성을 갖고 있는 소그드 인[胡人]은 모두 이곳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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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大人은 일반적으로 한 사회집단의 長老를 가리키는 말인데, 저본에서는 ‘部落의 酋長’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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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처라후, 옹우려, 힐가시다나도람가한(頡伽施多那都藍可汗), 옹우려, 양흠(楊欽), 팽국공(彭國公) 유창(劉昶), 대의공주(大義公主), 도람[가한], 흠우설(欽羽設), 도람[가한], 욕단특근(褥但特勤), 욕단[특근]
지명
돌궐, 우문씨(宇文氏), 우전(于闐), 돌궐,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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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라후가 정벌 중에 죽고 옹우려가 임금이 되었으며 매년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중국과 무역도 허락받음 자료번호 : jo.k_0013_0084_0010_0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