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라후가 정벌 중에 죽고 옹우려가 임금이 되었으며 매년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중국과 무역도 허락받음
그 이후에 처라후가 다시 서쪽으로 정벌하다가 날아온 활에 맞아 죽었다. 그의 백성들이 옹우려를 받들어 임금으로 삼으니 이가 힐가시다나도람가한(頡伽施多那都藍可汗)
주 001이 되었다. 옹우려가 사신을 보내 궁궐을 방문하자 [황제가] 3천 단을 예물로 내렸다. [그가] 매년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이때 유망인 양흠(楊欽)
주 002이 돌궐로 망명해 팽국공(彭國公) 유창(劉昶)
주 003이 [그의 처가인] 우문씨(宇文氏)와 모반을 일으켰다고 거짓으로 얘기를 하며 [같은 우문씨인] 대의공주(大義公主)에게 군대를 일으켜 [수나라의] 변경에서 소란을 피우라고 했다. 도람[가한]은 [양]흠을 잡아 [이를 수나라에] 보고하면서 [동시에] 발포(葧布)주 004와 어교(魚膠)주 005를 [토산물로] 바쳤다. 그의 동생 흠우설(欽羽設)
주 006의 부락이 강성하자 도람[가한]이 [그를] 꺼려 공격하고 군진에서 [그의] 머리를 벴다. 그해에 [도람가한이] 외삼촌인 욕단특근(褥但特勤)
주 007을 [수나라에] 보내 우전(于闐)의 옥장(玉杖)주 008을 바치니 황제가 욕단[특근]을 주국 강국공(康國公)주 009
각주 009)
으로 삼았다. 이듬해(588) 돌궐 부락 대인(大人)주 010들이 연이어 사신을 파견해 말 만 필, 양 2만 두, 낙타와 소 각각 5백 두를 바쳤다. 오래지 않아 사신을 보내 변경을 따라 시장을 두어 중국과 무역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라고 명령했다.康國: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도시 명칭으로 薩末鞬, 혹은 颯秣建라고 달리 표기하기도 하는데, 지금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Samarkand)를 지칭한다. 國都는 阿祿迪城(지금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 북쪽)였다. 康國의 王은 본래 溫氏이며 月氏人이었다. 그 이전에는 祁連山 북쪽의 昭武城에 거주하다가 匈奴에게 격파당하게 되자 서쪽으로 파미르 고원을 넘어 그 땅으로 옮겨왔다. 여러 일파들이 각지의 王이 되었고, 唐 永徽 연간에는 康居都督府가 설치되기도 했다. 中國의 기록에 康의 성을 갖고 있는 소그드 인[胡人]은 모두 이곳 출신이었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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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색인어
- 이름
- 처라후, 옹우려, 힐가시다나도람가한(頡伽施多那都藍可汗), 옹우려, 양흠(楊欽), 팽국공(彭國公) 유창(劉昶), 대의공주(大義公主), 도람[가한], 흠우설(欽羽設), 도람[가한], 욕단특근(褥但特勤), 욕단[특근]
- 지명
- 돌궐, 우문씨(宇文氏), 우전(于闐), 돌궐,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