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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백성에게 거둔 것을 대부분 돌궐에게 주었는데 그 은혜를 모르고 노략질을 하니 짐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 국가
    돌궐(突厥)
짐이 하늘의 분명한 명령을 받아 천하[의 백성들]을 아들과 같이 기르고 신하들의 수고스러움을 가엽게 여겨 기존의 폐단을 없앴다. [짐이] 백성들에게 [조세를] 많이 거두어들여 승냥이나 이리[와 같은 돌궐]에게 대부분을 주었는데, [그들이] 은혜를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밑천 삼아 노략질을 한 것은 하늘과 땅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고 제왕의 도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제] 예로서 절도 있게 대해 [그들에 대한 과분한] 비용을 낭비하지 않고, 요역을 줄이고 부세를 적게 해서 나라의 재정에 남음이 있도록 하겠다. 이로 인해 도적들에게 들어갔던 물자를 부대의 장병들에게 더 줄 수 있고 왕래하는 백성들을 멈춰 농사일과 길쌈에 힘쓰게 하여, 변경을 깨끗이 하고 승리할 수 있는 계책이 [짐의] 마음에 있다.
흉폭하고 추악한 무리들이 어리석어 [짐의] 깊은 뜻을 몰랐기 때문에 장차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음에도 [마치] 나라들이 싸우던 시절처럼 생각하고 [여전히] 과거의 교만함을 빌어 지금 [중국과] 원한을 맺었다. 최근에 그 소굴[의 힘]을 기울여 모두 북변을 침범하니, 짐이 군대를 나누어 배치하고 각자가 있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이] 깊숙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본 다음 한꺼번에 없애려 했다. 그런데 멀리 떨어진 군진의 부대가 [돌궐 군사를] 맞아 꺾어 버리는 바람에 [그들이 더 이상] 남쪽으로 오지도 못해 바로 북쪽으로 도망했으며 [이들에게] 활시위를 당기고 칼날을 [피로] 물들여 과반을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또한 그 우두머리[渠師]의 숫자가 대저 다섯주 001
각주 001)
다섯 명의 우두머리는 沙鉢略可汗, 第二可汗, 達頭可汗, 阿波可汗, 貪汗可汗 등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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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데, 형제가 서로 자리를 다투고,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가 서로 싫어해 밖으로는 꿰매져 있는 것 같아 보이나 안으로는 심복들조차 서로 반목하니 대대로 포학하게 굴고 가법(家法)마저 잔인했다. [그러므로] 동이(東夷) 주 002
각주 002)
東夷: 突厥의 동쪽에 거주하는 여러 종족을 의미하는데, 저본에서는 高句麗, 契丹, 靺鞨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대 투르크 비문에는 동부 지역에 대해서 구체적인 명칭을 지칭하기 보다는 뵈클리(Bökli) 또는 뵉 엘리(Bök eli) 등으로 전사가 가능한 국가의 명칭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高句麗 내지는 貊과 관련된 종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岩佐精一郞, 1936: 6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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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여러 나라가 [이들에게] 모두 사적인 복수심을 품고, 서융(西戎) 주 003
각주 003)
西戎: 突厥의 서쪽에 거주하는 여러 종족을 의미하는데, 저본에서는 오아시스 도시인 于闐과 그 서쪽에 있는 遊牧國家인 挹怛(에프탈)과 그보다 더 서쪽에 위치한 波斯(사산조 페르시아), 그리고 더 멀리 떨어져 있는 大秦國(비잔티움)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모두 突厥의 서방 진출과 함께 대결을 벌이거나 외교적인 교섭을 벌인 대상으로 고대 투르크 비문에서도 열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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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여러 추장들이 모두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돌궐의 북쪽에는 거란(契丹) 주 004
각주 004)
『北史』에는 契丹이 아니라 契骨(키르기즈)이라고 되어 있다. 거주지가 북쪽이었다는 점에서 『北史』에서 契骨이라고 한 것이 정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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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무리가 이를 악물고 어금니를 갈면서 늘 그들을 [습격하기] 편한 때를 엿보고 있다. 달두[가한](達頭可汗) 주 005
각주 005)
達頭可汗(재위 576∼603): 고대 투르크어로 ‘타르두쉬 카간(Tardush qaghan)’의 음사인데, 한자로는 西面可汗에 해당한다. 突厥을 建國한 土門의 동생인 西面可汗 室點密의 아들로 이름은 玷厥이었다. 그 역시 아버지를 이어 西面可汗이었다가 突厥의 계승분쟁으로 東, 西突厥로 분열된 이후에 583년에 西突厥의 可汗이 되었다. 步迦可汗(빌게 카간)이라고 칭하고, 東突厥의 都藍可汗과 대결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 隋나라와 연결된 染干(啓民可汗)을 공격했다. 都藍可汗이 죽은 이후에는 東突厥까지 차지하고 隋나라를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仁壽 3년(603) 복속되었던 鐵勒이 隋나라에 투항하고 부락이 흩어지게 되자 吐谷渾으로 망명했는데, 그 이후 종적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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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전에 주천[군](酒泉郡) 주 006
각주 006)
酒泉郡: 前漢 元狩 2년(전121) 匈奴의 昆邪王이 항복하자 설치되었다. 治所 城 아래에 泉이 있었는데, 泉의 맛이 술과 같다 해서 이름이 붙었다. 治所는 祿福縣인데, 晉代 福祿縣으로 改稱되었고, 隋代에 酒泉縣으로 바뀌었다. 관할 구역은 지금 甘肅省 河西回廊 서부였다. 일설에 의하면 元鼎 2∼3년(전115∼114) 혹은 元鼎 6년(전111)에 酒泉郡이 처음 설치되었으며, 관할 구역 구역은 河西回廊 전체였다고 한다. 후에 武威郡과 酒泉郡으로 분할되어 張掖郡과 敦煌郡이 설치되었는데, 관할 구역은 지금 甘肅省 疏勒河 以東, 高合縣 以西의 지역이었다. 後漢時代에는 涼州에 속했다. 五胡十六國時代에 李暠가 이곳에 도읍을 정했다. 唐 天寶年間과 至德年間 肅州가 酒泉郡으로 改稱되었다. 이곳은 동서교통로에 위치해 南北朝時代에 많은 소그드 상인[胡商]들의 거주지가 만들어져 唐代에 六胡州가 설치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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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공격하자 그 이후 우전(于闐)과,주 007
각주 007)
于闐: 타림분지 南邊의 주요한 오아시스 도시인 호탄(Khotan, 지금 和田으로 불림)을 지칭한다. 호탄은 崑崙山脈에서 北流하는 두 개의 강, 즉 白玉河와 黑玉河에 의지해 형성된 오아시스 도시로 동서로 35km 남북으로 20km 정도의 큰 규모이다. 주민들은 농경과 과수재배를 통해 생활을 하며 고대로부터 河床에서 채취되는 軟玉(nephrite)이 아주 유명했다. 호탄의 고대 주민은 印歐語에 속하는 호탄어를 사용했으며, 中國 기록에 따르면 尉遲(伏闍) 즉, 비자야(Vijaya)라는 姓을 가진 王家가 다스렸다고 한다. 동쪽으로는 니야(Niya, 精絶)에서 서쪽으로는 구마(Guma, 皮山)까지의 영역이 하나의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했다. 고대 于闐國의 都城은 호탄 서쪽에 있는 칼체(Khalche) 부근의 요트칸(Yotkan) 유적지에 남아있다. 지금 中國에서 于田이라고 부르는 도시는 케리야(Keriya)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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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波斯),주 008
각주 008)
波斯(226∼651): 페르시아 즉, ‘파르스(Pars)’의 음사이다. 지금의 이란으로 정확하게는 사산조를 지칭한다. 漢代에는 安息이라고 했고, 隋唐代에 波斯라 했다.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를 했고, 사산조 페르시아 말기에 隋 煬帝가 李昱을 사신으로 보내자 그를 통해 토산물을 보냈다. 唐代에는 양자의 교류가 활발해 상인들이 적극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中國 내에 거주하는 사람도 많았다. 나라가 멸망 이후에 왕자인 페로스(Peros)가 唐朝에 투항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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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달(挹怛) 세 나라가 일시에 반란을 일으켰다. 사발략[가한]주반[성]에 다다랐을 때 그 부락 내에 있는 박고속흘라(薄孤束紇羅) 주 009
각주 009)
薄孤束紇羅: 음사로 볼 때 鐵勒의 하나인 僕固 부락 출신의 인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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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바로 또 이반을 했다. 지난해에 이계찰(利稽察) 주 010
각주 010)
利稽察: 고대 투르크어로 ‘이길 샤드(Igil shad)’의 음사로 추정된다. 그가 察(샤드)라는 지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종실 출신의 군사령관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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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 주 011
각주 011)
『魏書』 이후 中國의 北朝, 隋唐 계열의 史書에서는 모두 “高麗”라고 표기했다. 이에 대해서는 高夷, 高句驪, 句驪, 高酈, 橐離, 槀離 등의 다른 표기가 있는데, 번역문에서는 모두 高句麗로 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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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靺鞨) 주 012
각주 012)
靺鞨: 隋唐時代 지금의 滿州와 韓半島 북부에 살았던 퉁구스계 주민의 통칭이었다. 지역에 따라 수렵, 목축, 반농반목, 농경 등 다양하게 살았다. 周代에 肅愼, 漢代에 挹婁라 불리는 집단과 연계된 것으로 보인다. 松花江 유역의 勿吉이 지배력을 확대하기도 했으나 6세기 중엽 그 세력이 약화되자 각 부족들이 자립했는데, 이들을 唐代에 총칭해 靺鞨이라고 기록했다. 이후 이들은 高句麗, 渤海 등에 복속 되어 있다가 遼代에 女眞으로 불렸다가 淸代에 滿洲라 불린 집단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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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크게 패했고, 사비설(娑毗設) 주 013
각주 013)
娑毗設: 突厥의 관칭으로 ‘사빌(Sabïl)’ 또는 ‘세빌 샤드(Sebil shad)’의 음사로 추정된다. 『北史』에는 “沙毗”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고대 투르크어로 ‘사빌(sabïl)’ 또는 ‘세빌((sebil)’의 음사로 추정되고, 堡壘를 의미한다. 이것이 확실하다면 이 직책은 성채를 지키는 장군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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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흘지가한(紇支可汗) 주 014
각주 014)
紇支可汗: 突厥 북방 예니세이 강 상류에 거주하고 있었던 세력인 契骨(키르기즈)의 君長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紇支가 고대 투르크어 ‘키르기즈(Qïrghïz)’의 음사로 추정될 뿐만 아니라 고대 투르크 비문에서도 키르기즈의 추장을 可汗이라는 칭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추론에 불과할 뿐 확실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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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들과 이웃이 되는 모두가 [그를] 죽여 없애기를 바라였다. 부락의 내부가 모두 [가한을] 따르는 백성[純民]과 다르게 굴고 [그 주변의] 온갖 종족들이 적대시하며 원수로 대하고, 피를 흘리며 가슴을 치고 슬픔을 머금고 원한을 쌓고 있다. 둥근 머리와 각진 다리를 가진 이는 모두 사람으로 한 가지인데, 이처럼 [비참한 처지의] 사람 하나라도 있다면 짐의 마음은 더욱 찢어지는 듯 아프다.

  • 각주 001)
    다섯 명의 우두머리는 沙鉢略可汗, 第二可汗, 達頭可汗, 阿波可汗, 貪汗可汗 등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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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東夷: 突厥의 동쪽에 거주하는 여러 종족을 의미하는데, 저본에서는 高句麗, 契丹, 靺鞨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대 투르크 비문에는 동부 지역에 대해서 구체적인 명칭을 지칭하기 보다는 뵈클리(Bökli) 또는 뵉 엘리(Bök eli) 등으로 전사가 가능한 국가의 명칭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高句麗 내지는 貊과 관련된 종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岩佐精一郞, 1936: 6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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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西戎: 突厥의 서쪽에 거주하는 여러 종족을 의미하는데, 저본에서는 오아시스 도시인 于闐과 그 서쪽에 있는 遊牧國家인 挹怛(에프탈)과 그보다 더 서쪽에 위치한 波斯(사산조 페르시아), 그리고 더 멀리 떨어져 있는 大秦國(비잔티움)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모두 突厥의 서방 진출과 함께 대결을 벌이거나 외교적인 교섭을 벌인 대상으로 고대 투르크 비문에서도 열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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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北史』에는 契丹이 아니라 契骨(키르기즈)이라고 되어 있다. 거주지가 북쪽이었다는 점에서 『北史』에서 契骨이라고 한 것이 정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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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達頭可汗(재위 576∼603): 고대 투르크어로 ‘타르두쉬 카간(Tardush qaghan)’의 음사인데, 한자로는 西面可汗에 해당한다. 突厥을 建國한 土門의 동생인 西面可汗 室點密의 아들로 이름은 玷厥이었다. 그 역시 아버지를 이어 西面可汗이었다가 突厥의 계승분쟁으로 東, 西突厥로 분열된 이후에 583년에 西突厥의 可汗이 되었다. 步迦可汗(빌게 카간)이라고 칭하고, 東突厥의 都藍可汗과 대결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 隋나라와 연결된 染干(啓民可汗)을 공격했다. 都藍可汗이 죽은 이후에는 東突厥까지 차지하고 隋나라를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仁壽 3년(603) 복속되었던 鐵勒이 隋나라에 투항하고 부락이 흩어지게 되자 吐谷渾으로 망명했는데, 그 이후 종적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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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酒泉郡: 前漢 元狩 2년(전121) 匈奴의 昆邪王이 항복하자 설치되었다. 治所 城 아래에 泉이 있었는데, 泉의 맛이 술과 같다 해서 이름이 붙었다. 治所는 祿福縣인데, 晉代 福祿縣으로 改稱되었고, 隋代에 酒泉縣으로 바뀌었다. 관할 구역은 지금 甘肅省 河西回廊 서부였다. 일설에 의하면 元鼎 2∼3년(전115∼114) 혹은 元鼎 6년(전111)에 酒泉郡이 처음 설치되었으며, 관할 구역 구역은 河西回廊 전체였다고 한다. 후에 武威郡과 酒泉郡으로 분할되어 張掖郡과 敦煌郡이 설치되었는데, 관할 구역은 지금 甘肅省 疏勒河 以東, 高合縣 以西의 지역이었다. 後漢時代에는 涼州에 속했다. 五胡十六國時代에 李暠가 이곳에 도읍을 정했다. 唐 天寶年間과 至德年間 肅州가 酒泉郡으로 改稱되었다. 이곳은 동서교통로에 위치해 南北朝時代에 많은 소그드 상인[胡商]들의 거주지가 만들어져 唐代에 六胡州가 설치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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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于闐: 타림분지 南邊의 주요한 오아시스 도시인 호탄(Khotan, 지금 和田으로 불림)을 지칭한다. 호탄은 崑崙山脈에서 北流하는 두 개의 강, 즉 白玉河와 黑玉河에 의지해 형성된 오아시스 도시로 동서로 35km 남북으로 20km 정도의 큰 규모이다. 주민들은 농경과 과수재배를 통해 생활을 하며 고대로부터 河床에서 채취되는 軟玉(nephrite)이 아주 유명했다. 호탄의 고대 주민은 印歐語에 속하는 호탄어를 사용했으며, 中國 기록에 따르면 尉遲(伏闍) 즉, 비자야(Vijaya)라는 姓을 가진 王家가 다스렸다고 한다. 동쪽으로는 니야(Niya, 精絶)에서 서쪽으로는 구마(Guma, 皮山)까지의 영역이 하나의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했다. 고대 于闐國의 都城은 호탄 서쪽에 있는 칼체(Khalche) 부근의 요트칸(Yotkan) 유적지에 남아있다. 지금 中國에서 于田이라고 부르는 도시는 케리야(Keriya)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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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波斯(226∼651): 페르시아 즉, ‘파르스(Pars)’의 음사이다. 지금의 이란으로 정확하게는 사산조를 지칭한다. 漢代에는 安息이라고 했고, 隋唐代에 波斯라 했다.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를 했고, 사산조 페르시아 말기에 隋 煬帝가 李昱을 사신으로 보내자 그를 통해 토산물을 보냈다. 唐代에는 양자의 교류가 활발해 상인들이 적극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中國 내에 거주하는 사람도 많았다. 나라가 멸망 이후에 왕자인 페로스(Peros)가 唐朝에 투항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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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薄孤束紇羅: 음사로 볼 때 鐵勒의 하나인 僕固 부락 출신의 인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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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利稽察: 고대 투르크어로 ‘이길 샤드(Igil shad)’의 음사로 추정된다. 그가 察(샤드)라는 지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종실 출신의 군사령관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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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魏書』 이후 中國의 北朝, 隋唐 계열의 史書에서는 모두 “高麗”라고 표기했다. 이에 대해서는 高夷, 高句驪, 句驪, 高酈, 橐離, 槀離 등의 다른 표기가 있는데, 번역문에서는 모두 高句麗로 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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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靺鞨: 隋唐時代 지금의 滿州와 韓半島 북부에 살았던 퉁구스계 주민의 통칭이었다. 지역에 따라 수렵, 목축, 반농반목, 농경 등 다양하게 살았다. 周代에 肅愼, 漢代에 挹婁라 불리는 집단과 연계된 것으로 보인다. 松花江 유역의 勿吉이 지배력을 확대하기도 했으나 6세기 중엽 그 세력이 약화되자 각 부족들이 자립했는데, 이들을 唐代에 총칭해 靺鞨이라고 기록했다. 이후 이들은 高句麗, 渤海 등에 복속 되어 있다가 遼代에 女眞으로 불렸다가 淸代에 滿洲라 불린 집단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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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娑毗設: 突厥의 관칭으로 ‘사빌(Sabïl)’ 또는 ‘세빌 샤드(Sebil shad)’의 음사로 추정된다. 『北史』에는 “沙毗”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고대 투르크어로 ‘사빌(sabïl)’ 또는 ‘세빌((sebil)’의 음사로 추정되고, 堡壘를 의미한다. 이것이 확실하다면 이 직책은 성채를 지키는 장군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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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紇支可汗: 突厥 북방 예니세이 강 상류에 거주하고 있었던 세력인 契骨(키르기즈)의 君長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紇支가 고대 투르크어 ‘키르기즈(Qïrghïz)’의 음사로 추정될 뿐만 아니라 고대 투르크 비문에서도 키르기즈의 추장을 可汗이라는 칭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추론에 불과할 뿐 확실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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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달두[가한](達頭可汗), 사발략[가한], 박고속흘라(薄孤束紇羅), 이계찰(利稽察), 사비설(娑毗設), 흘지가한(紇支可汗)
지명
동이(東夷), 서융(西戎), 돌궐, 거란(契丹), 주천[군](酒泉郡), 우전(于闐), 파사(波斯), 읍달(挹怛), 주반[성], 고[구]려(高句麗), 말갈(靺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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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에게 거둔 것을 대부분 돌궐에게 주었는데 그 은혜를 모르고 노략질을 하니 짐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자료번호 : jo.k_0013_0084_0010_00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