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에게 거둔 것을 대부분 돌궐에게 주었는데 그 은혜를 모르고 노략질을 하니 짐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짐이 하늘의 분명한 명령을 받아 천하[의 백성들]을 아들과 같이 기르고 신하들의 수고스러움을 가엽게 여겨 기존의 폐단을 없앴다. [짐이] 백성들에게 [조세를] 많이 거두어들여 승냥이나 이리[와 같은 돌궐]에게 대부분을 주었는데, [그들이] 은혜를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밑천 삼아 노략질을 한 것은 하늘과 땅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고 제왕의 도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제] 예로서 절도 있게 대해 [그들에 대한 과분한] 비용을 낭비하지 않고, 요역을 줄이고 부세를 적게 해서 나라의 재정에 남음이 있도록 하겠다. 이로 인해 도적들에게 들어갔던 물자를 부대의 장병들에게 더 줄 수 있고 왕래하는 백성들을 멈춰 농사일과 길쌈에 힘쓰게 하여, 변경을 깨끗이 하고 승리할 수 있는 계책이 [짐의] 마음에 있다.
흉폭하고 추악한 무리들이 어리석어 [짐의] 깊은 뜻을 몰랐기 때문에 장차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음에도 [마치] 나라들이 싸우던 시절처럼 생각하고 [여전히] 과거의 교만함을 빌어 지금 [중국과] 원한을 맺었다. 최근에 그 소굴[의 힘]을 기울여 모두 북변을 침범하니, 짐이 군대를 나누어 배치하고 각자가 있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이] 깊숙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본 다음 한꺼번에 없애려 했다. 그런데 멀리 떨어진 군진의 부대가 [돌궐 군사를] 맞아 꺾어 버리는 바람에 [그들이 더 이상] 남쪽으로 오지도 못해 바로 북쪽으로 도망했으며 [이들에게] 활시위를 당기고 칼날을 [피로] 물들여 과반을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또한 그 우두머리[渠師]의 숫자가 대저 다섯주 001인데, 형제가 서로 자리를 다투고,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가 서로 싫어해 밖으로는 꿰매져 있는 것 같아 보이나 안으로는 심복들조차 서로 반목하니 대대로 포학하게 굴고 가법(家法)마저 잔인했다. [그러므로] 동이(東夷) 주 002의 여러 나라가 [이들에게] 모두 사적인 복수심을 품고, 서융(西戎) 주 003의 여러 추장들이 모두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돌궐의 북쪽에는 거란(契丹) 주 004의 무리가 이를 악물고 어금니를 갈면서 늘 그들을 [습격하기] 편한 때를 엿보고 있다. 달두[가한](達頭可汗) 주 005
흉폭하고 추악한 무리들이 어리석어 [짐의] 깊은 뜻을 몰랐기 때문에 장차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음에도 [마치] 나라들이 싸우던 시절처럼 생각하고 [여전히] 과거의 교만함을 빌어 지금 [중국과] 원한을 맺었다. 최근에 그 소굴[의 힘]을 기울여 모두 북변을 침범하니, 짐이 군대를 나누어 배치하고 각자가 있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이] 깊숙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본 다음 한꺼번에 없애려 했다. 그런데 멀리 떨어진 군진의 부대가 [돌궐 군사를] 맞아 꺾어 버리는 바람에 [그들이 더 이상] 남쪽으로 오지도 못해 바로 북쪽으로 도망했으며 [이들에게] 활시위를 당기고 칼날을 [피로] 물들여 과반을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또한 그 우두머리[渠師]의 숫자가 대저 다섯주 001인데, 형제가 서로 자리를 다투고,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가 서로 싫어해 밖으로는 꿰매져 있는 것 같아 보이나 안으로는 심복들조차 서로 반목하니 대대로 포학하게 굴고 가법(家法)마저 잔인했다. [그러므로] 동이(東夷) 주 002의 여러 나라가 [이들에게] 모두 사적인 복수심을 품고, 서융(西戎) 주 003의 여러 추장들이 모두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돌궐의 북쪽에는 거란(契丹) 주 004의 무리가 이를 악물고 어금니를 갈면서 늘 그들을 [습격하기] 편한 때를 엿보고 있다. 달두[가한](達頭可汗) 주 005
각주 005)
이 이전에 주천[군](酒泉郡)
주 006達頭可汗(재위 576∼603): 고대 투르크어로 ‘타르두쉬 카간(Tardush qaghan)’의 음사인데, 한자로는 西面可汗에 해당한다. 突厥을 建國한 土門의 동생인 西面可汗 室點密의 아들로 이름은 玷厥이었다. 그 역시 아버지를 이어 西面可汗이었다가 突厥의 계승분쟁으로 東, 西突厥로 분열된 이후에 583년에 西突厥의 可汗이 되었다. 步迦可汗(빌게 카간)이라고 칭하고, 東突厥의 都藍可汗과 대결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 隋나라와 연결된 染干(啓民可汗)을 공격했다. 都藍可汗이 죽은 이후에는 東突厥까지 차지하고 隋나라를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仁壽 3년(603) 복속되었던 鐵勒이 隋나라에 투항하고 부락이 흩어지게 되자 吐谷渾으로 망명했는데, 그 이후 종적은 알 수 없다.
각주 006)
을 공격하자 그 이후 우전(于闐)과,주 007酒泉郡: 前漢 元狩 2년(전121) 匈奴의 昆邪王이 항복하자 설치되었다. 治所 城 아래에 泉이 있었는데, 泉의 맛이 술과 같다 해서 이름이 붙었다. 治所는 祿福縣인데, 晉代 福祿縣으로 改稱되었고, 隋代에 酒泉縣으로 바뀌었다. 관할 구역은 지금 甘肅省 河西回廊 서부였다. 일설에 의하면 元鼎 2∼3년(전115∼114) 혹은 元鼎 6년(전111)에 酒泉郡이 처음 설치되었으며, 관할 구역 구역은 河西回廊 전체였다고 한다. 후에 武威郡과 酒泉郡으로 분할되어 張掖郡과 敦煌郡이 설치되었는데, 관할 구역은 지금 甘肅省 疏勒河 以東, 高合縣 以西의 지역이었다. 後漢時代에는 涼州에 속했다. 五胡十六國時代에 李暠가 이곳에 도읍을 정했다. 唐 天寶年間과 至德年間 肅州가 酒泉郡으로 改稱되었다. 이곳은 동서교통로에 위치해 南北朝時代에 많은 소그드 상인[胡商]들의 거주지가 만들어져 唐代에 六胡州가 설치되기도 했다.
각주 007)
파사(波斯),주 008
읍달(挹怛) 세 나라가 일시에 반란을 일으켰다. 사발략[가한]이 주반[성]에 다다랐을 때 그 부락 내에 있는 박고속흘라(薄孤束紇羅)
주 009가 바로 또 이반을 했다. 지난해에 이계찰(利稽察)
주 010이 고[구]려(高句麗)
주 011와 말갈(靺鞨)
주 012에게 크게 패했고, 사비설(娑毗設)
주 013이 또한 흘지가한(紇支可汗)
주 014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들과 이웃이 되는 모두가 [그를] 죽여 없애기를 바라였다. 부락의 내부가 모두 [가한을] 따르는 백성[純民]과 다르게 굴고 [그 주변의] 온갖 종족들이 적대시하며 원수로 대하고, 피를 흘리며 가슴을 치고 슬픔을 머금고 원한을 쌓고 있다. 둥근 머리와 각진 다리를 가진 이는 모두 사람으로 한 가지인데, 이처럼 [비참한 처지의] 사람 하나라도 있다면 짐의 마음은 더욱 찢어지는 듯 아프다.于闐: 타림분지 南邊의 주요한 오아시스 도시인 호탄(Khotan, 지금 和田으로 불림)을 지칭한다. 호탄은 崑崙山脈에서 北流하는 두 개의 강, 즉 白玉河와 黑玉河에 의지해 형성된 오아시스 도시로 동서로 35km 남북으로 20km 정도의 큰 규모이다. 주민들은 농경과 과수재배를 통해 생활을 하며 고대로부터 河床에서 채취되는 軟玉(nephrite)이 아주 유명했다. 호탄의 고대 주민은 印歐語에 속하는 호탄어를 사용했으며, 中國 기록에 따르면 尉遲(伏闍) 즉, 비자야(Vijaya)라는 姓을 가진 王家가 다스렸다고 한다. 동쪽으로는 니야(Niya, 精絶)에서 서쪽으로는 구마(Guma, 皮山)까지의 영역이 하나의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했다. 고대 于闐國의 都城은 호탄 서쪽에 있는 칼체(Khalche) 부근의 요트칸(Yotkan) 유적지에 남아있다. 지금 中國에서 于田이라고 부르는 도시는 케리야(Keriya)에 해당된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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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5)
達頭可汗(재위 576∼603): 고대 투르크어로 ‘타르두쉬 카간(Tardush qaghan)’의 음사인데, 한자로는 西面可汗에 해당한다. 突厥을 建國한 土門의 동생인 西面可汗 室點密의 아들로 이름은 玷厥이었다. 그 역시 아버지를 이어 西面可汗이었다가 突厥의 계승분쟁으로 東, 西突厥로 분열된 이후에 583년에 西突厥의 可汗이 되었다. 步迦可汗(빌게 카간)이라고 칭하고, 東突厥의 都藍可汗과 대결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 隋나라와 연결된 染干(啓民可汗)을 공격했다. 都藍可汗이 죽은 이후에는 東突厥까지 차지하고 隋나라를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仁壽 3년(603) 복속되었던 鐵勒이 隋나라에 투항하고 부락이 흩어지게 되자 吐谷渾으로 망명했는데, 그 이후 종적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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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6)
酒泉郡: 前漢 元狩 2년(전121) 匈奴의 昆邪王이 항복하자 설치되었다. 治所 城 아래에 泉이 있었는데, 泉의 맛이 술과 같다 해서 이름이 붙었다. 治所는 祿福縣인데, 晉代 福祿縣으로 改稱되었고, 隋代에 酒泉縣으로 바뀌었다. 관할 구역은 지금 甘肅省 河西回廊 서부였다. 일설에 의하면 元鼎 2∼3년(전115∼114) 혹은 元鼎 6년(전111)에 酒泉郡이 처음 설치되었으며, 관할 구역 구역은 河西回廊 전체였다고 한다. 후에 武威郡과 酒泉郡으로 분할되어 張掖郡과 敦煌郡이 설치되었는데, 관할 구역은 지금 甘肅省 疏勒河 以東, 高合縣 以西의 지역이었다. 後漢時代에는 涼州에 속했다. 五胡十六國時代에 李暠가 이곳에 도읍을 정했다. 唐 天寶年間과 至德年間 肅州가 酒泉郡으로 改稱되었다. 이곳은 동서교통로에 위치해 南北朝時代에 많은 소그드 상인[胡商]들의 거주지가 만들어져 唐代에 六胡州가 설치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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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7)
于闐: 타림분지 南邊의 주요한 오아시스 도시인 호탄(Khotan, 지금 和田으로 불림)을 지칭한다. 호탄은 崑崙山脈에서 北流하는 두 개의 강, 즉 白玉河와 黑玉河에 의지해 형성된 오아시스 도시로 동서로 35km 남북으로 20km 정도의 큰 규모이다. 주민들은 농경과 과수재배를 통해 생활을 하며 고대로부터 河床에서 채취되는 軟玉(nephrite)이 아주 유명했다. 호탄의 고대 주민은 印歐語에 속하는 호탄어를 사용했으며, 中國 기록에 따르면 尉遲(伏闍) 즉, 비자야(Vijaya)라는 姓을 가진 王家가 다스렸다고 한다. 동쪽으로는 니야(Niya, 精絶)에서 서쪽으로는 구마(Guma, 皮山)까지의 영역이 하나의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했다. 고대 于闐國의 都城은 호탄 서쪽에 있는 칼체(Khalche) 부근의 요트칸(Yotkan) 유적지에 남아있다. 지금 中國에서 于田이라고 부르는 도시는 케리야(Keriya)에 해당된다.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 각주 014)
색인어
- 이름
- 달두[가한](達頭可汗), 사발략[가한], 박고속흘라(薄孤束紇羅), 이계찰(利稽察), 사비설(娑毗設), 흘지가한(紇支可汗)
- 지명
- 동이(東夷), 서융(西戎), 돌궐, 거란(契丹), 주천[군](酒泉郡), 우전(于闐), 파사(波斯), 읍달(挹怛), 주반[성], 고[구]려(高句麗), 말갈(靺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