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외국전

한나라가 흉노가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4개의 조약을 마련함

  • 국가
    흉노(匈奴)
마침 서역 거사후왕 구고(句姑) 주 001
각주 001)
句姑(姑句)(?~2) : 前漢 말기 西域 車師後國의 王이다. 『漢書』 권96 「西域傳」에는 “姑句”로 되어 있다.
닫기
·거호래왕(去胡來王)주 002
각주 002)
“去胡來王”이라는 王號에 대하여 顔師古는 胡를 떠나 漢으로 來降했다는 뜻으로 보았지만 顧炎武는 이러한 해석에 반대하였고, ‘去胡來’는 현지음의 音寫로 보인다(岑仲勉 1981 : 5). 余太山(2005 : 77~78)은 이 말이 Tochari를 옮긴 것이라 하지만, 단언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去胡來王은 婼羌國의 王이다. 婼는 중국측 기록에서 『左傳』과 『穀梁傳』에 기원전 7세기 魯國의 한 귀족의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지만, 여기서는 羌族의 일부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Hulsewé 1979 : 80). 婼羌은 곤륜산맥에서 인도 서북부에 이르는 고산지대에 광범위하게 분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岑仲勉(1981 : 1~6)은 이 지명이 후일 야르칸드(Yarkand, 葉爾羌)의 기원이 된 것으로 보았다. 都城은 현재 新疆 위구르 자치구 婼羌縣의 동남쪽에 있었다. 『漢書』 권96, 「西域傳」(3875)에 따르면 婼羌國은 陽關에서 1천 8백리, 長安에서는 6천 3백 리 떨어져 있었다. 중국에서 陽關을 나가면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국가였다. 그러나 西南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孔道와 만나지 않았다. 450戶에 1,750口가 살았고, 勝兵을 500명 보유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且末國과 인접하고, 가축을 방목하여 물과 풀을 따라 생활하였다. 농사는 짓지 않고, 且末國과 鄯善國에서 곡식을 가져와 먹었다. 산에는 鐵이 생산되어 스스로 병기를 제작할 수 있었다. 서북쪽으로 鄯善國에 가야만 孔道와 만날 수 있었다.
닫기
당두(唐兜) 등이 모두 [의] 도호교위(都護校尉)에 대해 원한을 품고, 처자와 인민을 이끌고 흉노에게로 도망하였다. 이 이야기는 [『한서』] 「서역전」에 있다.주 003
각주 003)
『漢書』 「西域傳」(3924∼3925)에는 車師後王 姑句와 去胡來王 唐兜가 匈奴에 항복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姑句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平帝 元始 2년(후2)에 車師後王國에 새로운 길이 열렸다. 五船의 북쪽을 나와 玉門關으로 통하였는데, 往來하기가 비교적 가까웠다. 戊己校尉 徐普는 이 길을 새로 내어 (서역에 왕래하는 거리를) 절반 가량 줄이고, 白龍堆의 험로를 우회하려 하였다. 하지만 車師後王 姑句는 이 길이 자기 나라를 관통하기 때문에 (徐普의 제안에) 마음이 불편하였다. 새로운 길의 위치가 匈奴 南將軍의 관할구역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徐普는 姑句를 불러 그 경계를 명확히 해 둔 다음 황제에게 上奏하려 하였다. 하지만 姑句가 이에 응하지 않자, 그를 하옥하였다. 姑句는 소와 양을 뇌물로 바쳐 탈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姑句의 집에서 창끝에 불이 붙는 일이 발생하자, 姑句의 처는 姑句가 곧 살해될 것이라 하여 匈奴로 도주할 것을 권유했다. 이에 姑句는 高昌壁을 뚫고 나와 匈奴로 도주하였다. 한편 (婼羌國의) 去胡來王 唐兜는 (국가가) 大種 赤水羌과 근접하여 여러 차례 서로 침략하였는데, 이기지 못하자 都護에게 긴급히 구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都護 但欽은 제때에 구조하지 않아 唐兜는 困急해졌다. 이에 但欽을 원망하면서, 동쪽 玉門關으로 갔다. 하지만 玉門關에서도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자, 唐兜는 妻子, 人民 1천여 명을 이끌고 匈奴로 가서 항복하였다. 匈奴는 이들을 받아들이고 이 사실을 漢 天子에게 上書하여 알렸다.
닫기
선우는 [이들을] 받아들여 좌록리[왕이 관할하는] 지역(左谷蠡地)에 두고 [에] 사신을 보내 상서하여 상황을 설명하면서 말하였다. “신이 삼가 이미 받아들였습니다.” [천자는] 조서를 내어 중랑장 한륭(韓隆)·왕창(王昌) 주 004
각주 004)
王昌 : 전한의 列侯이다. 平帝代 中郞將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中少府로 遷任되고, 建威侯로 封해졌다. 王莽 居攝 2년(7) 東郡太守 翟義가 擧兵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中堅將軍으로 나가 진압하였다.
닫기
·부교위(副校尉) 견부(甄阜) 주 005
각주 005)
甄阜(?∼23) : 漢 平帝 때 副校尉로 임명되어 2차에 걸쳐 匈奴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그 뒤 王莽의 편에 서서 다시 匈奴에 出使했다. 地皇 3년(23) 前隊大夫로 임명되어 군대를 이끌고 綠林軍을 진압하다가 피살되었다.
닫기
·시중알자(侍中謁者)주 006
각주 006)
侍中謁者 : 侍中은 秦代 처음 설치되었고 漢代에도 이어졌는데, 정규 관직이 아닌 加官의 하나였다. 황제의 좌우에서 시종하면서 궁정에 출입하였고, 朝政 일들에 대한 자문을 담당하였다. 점차 貴重한 자리가 되어 晉代 이후에는 宰相의 지위에 상당하게 되었고, 唐代에는 門下省의 장관이 되었다.
닫기
백창(帛敞) 주 007
각주 007)
帛敞 : 平帝시기 侍中․謁者에 임명되었다. 元始 2년(2) 匈奴에 出使하였고, 王莽의 新朝가 설립된 뒤에 다시 匈奴에 出使하여 새로운 單于 印綬를 사여했다.
닫기
·장수교위(長水校尉)주 008
각주 008)
長水校尉 : 漢武帝 때 설치된 武官으로 北軍 八校尉 가운데 하나이다. 秩은 二千石이다. 『漢書』 권19, 「百官公卿表」(738) 따르면, 그 직책이 “長水宣曲胡騎”를 관장한다고 하였는데, 顔師古는 “長水는 胡名이고, 宣曲은 觀의 명칭으로, 宣曲에 주둔하는 胡騎를 말한다”고 주석하였다. 항상 오랑캐의 정세에 밝은 사람이 이 자리에 임명되어 京師에 주둔하는 정예의 상비군을 지휘하였다. 後漢初에 잠시 罷했다가 다시 설치되었다.
닫기
왕흡(王歙) 주 009
각주 009)
王歙 : 南郡 秭歸 사람으로 王昭君의 생질이다. 平帝시대 長水校尉로 임명되었고, 王莽이 新朝를 개창한 뒤, 和親侯로 封해졌다. 4차례에 걸쳐 匈奴에 出使하여, 匈奴의 單于印璽를 바꾸고, 叛將 陳良 등을 사로잡았다. 新莽 시대의 가장 중요한 외교관으로 평가받는다.
닫기
등을 흉노에 사신으로 보냈다. 선우에게 고하기를 “서역은 [에] 내속되어 있다. [너희가 투항자들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지금 돌려보내라”고 하였다. 선우는 말했다. “효선황제 주 010
각주 010)
宣帝 劉詢(전92∼전49 ; 재위 전73∼전49) : 前漢 7대 皇帝로 본명은 病己이다. 武帝의 증손자이고, 戾太子의 손자이다. 태어난 지 수개월 뒤, 戾太子의 巫蠱사건이 발생하여 郡邸獄에 갇혀 자랐다. 나중에 大赦令을 만나 皇族 신분을 회복한다. 전74년 昭帝가 사망한 뒤, 繼位할 아들이 없자, 霍光 등은 18세의 宣帝를 옹립하였다. 즉위 초에는 霍光에게 정사를 맡겼으나, 얼마 후 親政에 나서, 吏治를 정돈하고 황제권을 강화하였다. 法令 政策을 숙지하고 있는 文法吏를 다수 임용하였으며, 治書侍御史를 두어 廷尉의 판결형량을 심의하도록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流亡者를 招撫하고, 농업생산력을 증대시켰으며, 빈민 구제를 위해 노력하였다. 元康 연간(전65∼전62)에는 풍년이 지속되어 穀價가 1石當 5錢까지 내려갔는데, 이는 前漢시기에 기록된 가장 저렴한 가격이었다. 주변 지역과의 관계를 보면, 神爵 연간(전61∼전58)에는 羌族의 난을 진압하였고, 金城屬國을 설치하여 降羌人들을 安置하였다. 또한 西域都護를 설치하여 鄭吉을 임명하였다. 甘露 2년에는 呼韓邪單于가 來降 稱臣하였다. 이에 邊境이 안정되고, 徭役이 감소되었다.
닫기
효원황제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약속을 정하시어, 장성의 남쪽은 천자께서 영유하시고 장성의 이북은 선우가 영유한다고 하였습니다. 변새를 침범하는 일이 발생하면 즉시 상황을 [서로] 알리고, 투항자가 생기면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신 지(知) 주 011
각주 011)
원문의 “臣知”란 囊知牙斯를 말한다. 그는 곧 烏珠留若鞮單于이다.
닫기
의 부친인 호한야선우는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입어, 죽을 때 유언하길 ‘중국에서 투항해 오는 사람이 있으면 받지 말고, 곧 변새로 보내라. 그로써 천자의 두터운 은혜에 보답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거사후국과 야강국이 중국이 아니라] 외국[의 투항자]이기 때문에 받을 수 있습니다.” 사신은 말하였다. “흉노는 골육 간에 서로 공격하여 나라가 거의 멸절될 뻔하였다. 중국의 큰 은혜를 입어 위태로워 망할 뻔한 나라가 다시 이어지고 처자가 온전히 안전하게 되어 누대에 걸쳐 서로 이어졌다. 응당 두터운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선우는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빌고 2명의 오랑캐 [구고당두]를 돌려보내 [의] 사자에게 넘겼다. [천자는] 조서를 내려 중랑장 왕맹(王萌) 주 012
각주 012)
王萌 : 平帝時 中郞將으로 임명되었다. 王莽이 匈奴를 대거 침공할 계획을 세웠을 때, 王萌은 平狄將軍으로 임명되어 代郡에 주둔하면서 출동 명령을 기다렸다. 그 후 王莽이 邊將을 철수시켰을 때, 王萌도 돌아왔다.
닫기
으로 하여금 서역 악도노(惡都奴)주 013
각주 013)
惡都奴 : 顔師古는 服虔을 인용하여 “西域의 계곡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西域傳」에 보이는 “伊吾盧”에 해당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
닫기
의 경계 위에서 [사신 일행을] 맞이하고 [구고당두도] 접수하도록 하였다. 선우는 사신을 [한조에] 보내 그 죄[의 용서]를 청하였다.주 014
각주 014)
원문은 “單于遣使送到國”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현대 한어본과 일역본의 해석이 다르다. 현대 한어본에는 單于가 漢朝에 사신을 보냈다고 되어 있다(安平秋, 2004 : 1905). 하지만 漢朝를 단순히 ‘國’으로 표현한 것이 다소 어색하다. 일역본에서는 單于가 사신을 句姑와 唐兜 두 사람의 本國으로 보냈다고 하였다(內田吟風, 1971 : 129). 이것은 ‘國’의 의미를 중시한 해석이다. 하지만 「西域傳」의 기사에서 보았듯이 唐兜의 경우 自國民 천여 명과 집단 망명하였기 때문에 本國 조정이 남아 있는지 의문이고, 또한 이들이 本國에 대하여 罪를 짓고 망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赦罪를 요청할 이유도 없다. 따라서 일역에도 문제가 있다. 그런데 『資治通鑑』에는 해당 기사가 “單于遣使送”이라고만 되어 있고 ‘到國’은 생략하였다. 또한 胡三省은 “두 포로를 위하여 漢에 요청하여, 그들의 背叛罪를 사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라고 주석하여 匈奴가 사신을 漢朝로 보냈음을 명확히 하였다(『資治通鑑』 권35 : 1137). 번역문에서는 이 해석이 합리적인 것으로 보고 그에 따라 ‘到國’을 생략하고 번역하였다.
닫기
[흉노에서 귀환한] 사신이 이 사실을 보고하자, 조서를 내려 허락하지 않았으며 서역 국가들의 왕을 모아놓고 [구고당두의] 참수를 보도록 하였다.
그리고 4개조의 [규약을] 만들어 세웠다. 중국인이 흉노에 도망쳐 들어간 경우, 오손[인]이 흉노에 도망쳐 항복한 경우, 서역의 여러 국가 가운데 중국의 인수(印綬)를 받은 [국가의 사람이] 흉노에 항복한 경우, 오환[인]이 흉노에 항복한 경우 등은 모두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천자는] 중랑장 왕준(王駿) 주 015
각주 015)
王駿(?∼16) : 王莽시기의 장군이다. 平帝 때 中郞將으로 임명되었다. 匈奴에 出使하여 匈奴가 망명자를 받을 수 없다는 내용의 條文을 單于에게 포고하였다. 王莽이 稱帝한 뒤, 五威將으로 임명되어 재차 匈奴에 出使하여 單于의 印璽를 교환하였다. 그 뒤 備武將軍이 되어 張掖에서 匈奴 공격을 준비하였다. 天鳳 3년(16) 군대를 이끌고 西域으로 나갔다가, 焉耆國의 伏兵에게 피살되었다.
닫기
·왕창·부교위 견부·왕심(王尋) 주 016
각주 016)
王尋(?∼23) : 王莽 시기의 大臣이다. 平帝대 副校尉로 匈奴에 出使하여 匈奴가 망명인을 받을 수 없다는 條文을 반포하였다. 그 뒤 王莽의 皇位 찬탈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여 그 공로로 丕進侯에 봉해졌다. 始建國 원년(9)에 章新公으로 進封되었고, 大司徒에 제수되었다. 地皇 4년(23) 綠林軍 王鳳과 劉秀 등이 昆陽을 공격하였을 때, 王尋은 王邑과 함께 42만의 군대를 이끌고 대적하였다. 이 전쟁에서 대패하고 被殺되었다.
닫기
등을 흉노에 사신으로 보내, 4개 조항을 선우에게 나누어주고, [새서(璽書)와] 함께 상자 안에 봉하여 선우에게 주고 받들어 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돌아가신 선제가 약속한 [규약이 담겨 있는] 봉함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 당시 왕망은 상주하여 중국에서는 이름에 두 글자를 사용할 수 없게 하였다.주 017
각주 017)
胡三省은 “『公羊春秋傳』이 두 글자의 이름을 비난하였다. 그래서 王莽이 그것을 본받았다”고 하였다(『資治通鑑』 권35 : 1137). 『春秋』 定公 6년 經文에 다음의 구절이 있다. “季孫斯와 仲孫己가 군대를 이끌고 鄆國을 포위하였다.” 이에 대하여 公羊傳은 “(仲孫忌는) 仲孫何忌를 말한다. 어찌하여 仲孫忌라고 하였는가? 두 글자의 이름을 비난한 것이다. 두 글자의 이름은 非禮이다.”라고 하였다. 何休는 『公羊解詁』에서 “(두 글자로 이름을 짓는 것을 非禮라 하는 이유는) 避諱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 글자로 이름을 만들면 부르기 어렵고 避諱하기는 쉽다. 그래서 (윗사람에 대한) 신하나 자식의 恭敬心을 조장하며 아랫사람을 핍박하지 않을 수 있다. …… 이는 春秋時代의 제도이다.”라고 해설하였다. 반면 『左傳』에는 해당 經文을 설명하는 傳文이 없으며, 杜預는 左傳注에서 “(仲孫何忌를 仲孫忌라 말한 이유는 『春秋』 經文에서) 글자가 빠졌기 때문이다.”라고 간단히 설명하였다. 楊伯峻도 “(공양전의 해설은) 妄說이다. 先人들의 비판이 많았다.”(楊伯峻 : 1555)고 하였다. 王莽이 公羊傳의 說에 따른 것은 漢代 公羊 春秋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일이라 할 수 있다(趙伯雄, 2004 : 「兩漢春秋學」 참조).
닫기
이에 사신으로 하여금 선우에게 넌지시 알리길, 응당 상서하여 [천자의] 덕화를 그리워하여 한 글자만 가지고 이름을 만들겠다고 하면 은 반드시 후한 상을 내릴 것이라고 하였다. 선우가 이에 따라 상서하여 말하였다. “다행스럽게 번신(藩臣)이 되어 남몰래 [의] 태평성제(太平聖制)를 좋아하였습니다. 신은 원래 이름이 낭지아사입니다만 이제 삼가 이름을 바꾸어 지(知)라고 하겠습니다.” 왕망은 크게 기뻐하여 태후에게 말하고, 사신을 [흉노에] 보내 유지(諭旨)로 답하고 큰 상을 사여하였다.

  • 각주 001)
    句姑(姑句)(?~2) : 前漢 말기 西域 車師後國의 王이다. 『漢書』 권96 「西域傳」에는 “姑句”로 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去胡來王”이라는 王號에 대하여 顔師古는 胡를 떠나 漢으로 來降했다는 뜻으로 보았지만 顧炎武는 이러한 해석에 반대하였고, ‘去胡來’는 현지음의 音寫로 보인다(岑仲勉 1981 : 5). 余太山(2005 : 77~78)은 이 말이 Tochari를 옮긴 것이라 하지만, 단언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去胡來王은 婼羌國의 王이다. 婼는 중국측 기록에서 『左傳』과 『穀梁傳』에 기원전 7세기 魯國의 한 귀족의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지만, 여기서는 羌族의 일부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Hulsewé 1979 : 80). 婼羌은 곤륜산맥에서 인도 서북부에 이르는 고산지대에 광범위하게 분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岑仲勉(1981 : 1~6)은 이 지명이 후일 야르칸드(Yarkand, 葉爾羌)의 기원이 된 것으로 보았다. 都城은 현재 新疆 위구르 자치구 婼羌縣의 동남쪽에 있었다. 『漢書』 권96, 「西域傳」(3875)에 따르면 婼羌國은 陽關에서 1천 8백리, 長安에서는 6천 3백 리 떨어져 있었다. 중국에서 陽關을 나가면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국가였다. 그러나 西南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孔道와 만나지 않았다. 450戶에 1,750口가 살았고, 勝兵을 500명 보유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且末國과 인접하고, 가축을 방목하여 물과 풀을 따라 생활하였다. 농사는 짓지 않고, 且末國과 鄯善國에서 곡식을 가져와 먹었다. 산에는 鐵이 생산되어 스스로 병기를 제작할 수 있었다. 서북쪽으로 鄯善國에 가야만 孔道와 만날 수 있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漢書』 「西域傳」(3924∼3925)에는 車師後王 姑句와 去胡來王 唐兜가 匈奴에 항복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姑句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平帝 元始 2년(후2)에 車師後王國에 새로운 길이 열렸다. 五船의 북쪽을 나와 玉門關으로 통하였는데, 往來하기가 비교적 가까웠다. 戊己校尉 徐普는 이 길을 새로 내어 (서역에 왕래하는 거리를) 절반 가량 줄이고, 白龍堆의 험로를 우회하려 하였다. 하지만 車師後王 姑句는 이 길이 자기 나라를 관통하기 때문에 (徐普의 제안에) 마음이 불편하였다. 새로운 길의 위치가 匈奴 南將軍의 관할구역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徐普는 姑句를 불러 그 경계를 명확히 해 둔 다음 황제에게 上奏하려 하였다. 하지만 姑句가 이에 응하지 않자, 그를 하옥하였다. 姑句는 소와 양을 뇌물로 바쳐 탈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姑句의 집에서 창끝에 불이 붙는 일이 발생하자, 姑句의 처는 姑句가 곧 살해될 것이라 하여 匈奴로 도주할 것을 권유했다. 이에 姑句는 高昌壁을 뚫고 나와 匈奴로 도주하였다. 한편 (婼羌國의) 去胡來王 唐兜는 (국가가) 大種 赤水羌과 근접하여 여러 차례 서로 침략하였는데, 이기지 못하자 都護에게 긴급히 구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都護 但欽은 제때에 구조하지 않아 唐兜는 困急해졌다. 이에 但欽을 원망하면서, 동쪽 玉門關으로 갔다. 하지만 玉門關에서도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자, 唐兜는 妻子, 人民 1천여 명을 이끌고 匈奴로 가서 항복하였다. 匈奴는 이들을 받아들이고 이 사실을 漢 天子에게 上書하여 알렸다.
     바로가기
  • 각주 004)
    王昌 : 전한의 列侯이다. 平帝代 中郞將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中少府로 遷任되고, 建威侯로 封해졌다. 王莽 居攝 2년(7) 東郡太守 翟義가 擧兵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中堅將軍으로 나가 진압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5)
    甄阜(?∼23) : 漢 平帝 때 副校尉로 임명되어 2차에 걸쳐 匈奴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그 뒤 王莽의 편에 서서 다시 匈奴에 出使했다. 地皇 3년(23) 前隊大夫로 임명되어 군대를 이끌고 綠林軍을 진압하다가 피살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侍中謁者 : 侍中은 秦代 처음 설치되었고 漢代에도 이어졌는데, 정규 관직이 아닌 加官의 하나였다. 황제의 좌우에서 시종하면서 궁정에 출입하였고, 朝政 일들에 대한 자문을 담당하였다. 점차 貴重한 자리가 되어 晉代 이후에는 宰相의 지위에 상당하게 되었고, 唐代에는 門下省의 장관이 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帛敞 : 平帝시기 侍中․謁者에 임명되었다. 元始 2년(2) 匈奴에 出使하였고, 王莽의 新朝가 설립된 뒤에 다시 匈奴에 出使하여 새로운 單于 印綬를 사여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8)
    長水校尉 : 漢武帝 때 설치된 武官으로 北軍 八校尉 가운데 하나이다. 秩은 二千石이다. 『漢書』 권19, 「百官公卿表」(738) 따르면, 그 직책이 “長水宣曲胡騎”를 관장한다고 하였는데, 顔師古는 “長水는 胡名이고, 宣曲은 觀의 명칭으로, 宣曲에 주둔하는 胡騎를 말한다”고 주석하였다. 항상 오랑캐의 정세에 밝은 사람이 이 자리에 임명되어 京師에 주둔하는 정예의 상비군을 지휘하였다. 後漢初에 잠시 罷했다가 다시 설치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9)
    王歙 : 南郡 秭歸 사람으로 王昭君의 생질이다. 平帝시대 長水校尉로 임명되었고, 王莽이 新朝를 개창한 뒤, 和親侯로 封해졌다. 4차례에 걸쳐 匈奴에 出使하여, 匈奴의 單于印璽를 바꾸고, 叛將 陳良 등을 사로잡았다. 新莽 시대의 가장 중요한 외교관으로 평가받는다.
     바로가기
  • 각주 010)
    宣帝 劉詢(전92∼전49 ; 재위 전73∼전49) : 前漢 7대 皇帝로 본명은 病己이다. 武帝의 증손자이고, 戾太子의 손자이다. 태어난 지 수개월 뒤, 戾太子의 巫蠱사건이 발생하여 郡邸獄에 갇혀 자랐다. 나중에 大赦令을 만나 皇族 신분을 회복한다. 전74년 昭帝가 사망한 뒤, 繼位할 아들이 없자, 霍光 등은 18세의 宣帝를 옹립하였다. 즉위 초에는 霍光에게 정사를 맡겼으나, 얼마 후 親政에 나서, 吏治를 정돈하고 황제권을 강화하였다. 法令 政策을 숙지하고 있는 文法吏를 다수 임용하였으며, 治書侍御史를 두어 廷尉의 판결형량을 심의하도록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流亡者를 招撫하고, 농업생산력을 증대시켰으며, 빈민 구제를 위해 노력하였다. 元康 연간(전65∼전62)에는 풍년이 지속되어 穀價가 1石當 5錢까지 내려갔는데, 이는 前漢시기에 기록된 가장 저렴한 가격이었다. 주변 지역과의 관계를 보면, 神爵 연간(전61∼전58)에는 羌族의 난을 진압하였고, 金城屬國을 설치하여 降羌人들을 安置하였다. 또한 西域都護를 설치하여 鄭吉을 임명하였다. 甘露 2년에는 呼韓邪單于가 來降 稱臣하였다. 이에 邊境이 안정되고, 徭役이 감소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1)
    원문의 “臣知”란 囊知牙斯를 말한다. 그는 곧 烏珠留若鞮單于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2)
    王萌 : 平帝時 中郞將으로 임명되었다. 王莽이 匈奴를 대거 침공할 계획을 세웠을 때, 王萌은 平狄將軍으로 임명되어 代郡에 주둔하면서 출동 명령을 기다렸다. 그 후 王莽이 邊將을 철수시켰을 때, 王萌도 돌아왔다.
     바로가기
  • 각주 013)
    惡都奴 : 顔師古는 服虔을 인용하여 “西域의 계곡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西域傳」에 보이는 “伊吾盧”에 해당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
     바로가기
  • 각주 014)
    원문은 “單于遣使送到國”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현대 한어본과 일역본의 해석이 다르다. 현대 한어본에는 單于가 漢朝에 사신을 보냈다고 되어 있다(安平秋, 2004 : 1905). 하지만 漢朝를 단순히 ‘國’으로 표현한 것이 다소 어색하다. 일역본에서는 單于가 사신을 句姑와 唐兜 두 사람의 本國으로 보냈다고 하였다(內田吟風, 1971 : 129). 이것은 ‘國’의 의미를 중시한 해석이다. 하지만 「西域傳」의 기사에서 보았듯이 唐兜의 경우 自國民 천여 명과 집단 망명하였기 때문에 本國 조정이 남아 있는지 의문이고, 또한 이들이 本國에 대하여 罪를 짓고 망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赦罪를 요청할 이유도 없다. 따라서 일역에도 문제가 있다. 그런데 『資治通鑑』에는 해당 기사가 “單于遣使送”이라고만 되어 있고 ‘到國’은 생략하였다. 또한 胡三省은 “두 포로를 위하여 漢에 요청하여, 그들의 背叛罪를 사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라고 주석하여 匈奴가 사신을 漢朝로 보냈음을 명확히 하였다(『資治通鑑』 권35 : 1137). 번역문에서는 이 해석이 합리적인 것으로 보고 그에 따라 ‘到國’을 생략하고 번역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5)
    王駿(?∼16) : 王莽시기의 장군이다. 平帝 때 中郞將으로 임명되었다. 匈奴에 出使하여 匈奴가 망명자를 받을 수 없다는 내용의 條文을 單于에게 포고하였다. 王莽이 稱帝한 뒤, 五威將으로 임명되어 재차 匈奴에 出使하여 單于의 印璽를 교환하였다. 그 뒤 備武將軍이 되어 張掖에서 匈奴 공격을 준비하였다. 天鳳 3년(16) 군대를 이끌고 西域으로 나갔다가, 焉耆國의 伏兵에게 피살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6)
    王尋(?∼23) : 王莽 시기의 大臣이다. 平帝대 副校尉로 匈奴에 出使하여 匈奴가 망명인을 받을 수 없다는 條文을 반포하였다. 그 뒤 王莽의 皇位 찬탈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여 그 공로로 丕進侯에 봉해졌다. 始建國 원년(9)에 章新公으로 進封되었고, 大司徒에 제수되었다. 地皇 4년(23) 綠林軍 王鳳과 劉秀 등이 昆陽을 공격하였을 때, 王尋은 王邑과 함께 42만의 군대를 이끌고 대적하였다. 이 전쟁에서 대패하고 被殺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7)
    胡三省은 “『公羊春秋傳』이 두 글자의 이름을 비난하였다. 그래서 王莽이 그것을 본받았다”고 하였다(『資治通鑑』 권35 : 1137). 『春秋』 定公 6년 經文에 다음의 구절이 있다. “季孫斯와 仲孫己가 군대를 이끌고 鄆國을 포위하였다.” 이에 대하여 公羊傳은 “(仲孫忌는) 仲孫何忌를 말한다. 어찌하여 仲孫忌라고 하였는가? 두 글자의 이름을 비난한 것이다. 두 글자의 이름은 非禮이다.”라고 하였다. 何休는 『公羊解詁』에서 “(두 글자로 이름을 짓는 것을 非禮라 하는 이유는) 避諱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 글자로 이름을 만들면 부르기 어렵고 避諱하기는 쉽다. 그래서 (윗사람에 대한) 신하나 자식의 恭敬心을 조장하며 아랫사람을 핍박하지 않을 수 있다. …… 이는 春秋時代의 제도이다.”라고 해설하였다. 반면 『左傳』에는 해당 經文을 설명하는 傳文이 없으며, 杜預는 左傳注에서 “(仲孫何忌를 仲孫忌라 말한 이유는 『春秋』 經文에서) 글자가 빠졌기 때문이다.”라고 간단히 설명하였다. 楊伯峻도 “(공양전의 해설은) 妄說이다. 先人들의 비판이 많았다.”(楊伯峻 : 1555)고 하였다. 王莽이 公羊傳의 說에 따른 것은 漢代 公羊 春秋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일이라 할 수 있다(趙伯雄, 2004 : 「兩漢春秋學」 참조).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구고(句姑), 당두(唐兜), 한륭(韓隆), 왕창(王昌), 견부(甄阜), 백창(帛敞), 왕흡(王歙), 효선황제, 효원황제, 지(知), 호한야선우, 구고, 당두, 왕맹(王萌), 구고, 당두, 구고, 당두, 왕준(王駿), 왕창, 견부, 왕심(王尋), 왕망, 낭지아사, 지(知), 왕망
지명
, , , , ,
서명
한서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한나라가 흉노가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4개의 조약을 마련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4_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