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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입조후 선우가 돌아갈 때 한황(韓況)을 보내 호송하게 함

  • 국가
    흉노(匈奴)
[애제] 원수(元壽) 2년(전1) 선우가 와서 입조하였다. 황제는 태세(太歲) [기년법에 따른 금기]를 눌러 이기기[厭勝] 위하여,주 001
각주 001)
“太歲”는 목성이다. 胡三省에 따르면 이해 太歲가 申의 地支에 있었다고 한다(『資治通鑑』 : 1123). 太歲가 申에 있는 것을 “涒灘”이라고 하는데(『爾雅注疏』 권6 : 187), 그때에는 특정한 방향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미신이 있었다. 漢代에는 천체의 순환 주기를 계산할 때, 달과 목성을 기준으로 삼았는데, 이들의 순환 주기를 대략 12년으로 보고, 이 숫자 12를 자연계와 인간사회의 다양한 현상을 파악하는 기준수로 삼았다. 이러한 관념은 漢代人들의 일상생활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는데(최진묵, 2001 : 247), 특히 목성(太歲)을 諸神을 통솔하는 人君의 상징으로 보고, 그것이 지시하는 方位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凶災를 막기 위해서 각각의 방위에 五行의 물건을 걸어두는 등 厭勝之法을 행하였는데, 그것을 “太歲避忌之法”이라고 하였다(『陔餘叢考』 「太歲大將軍」 : 692). 『論衡』에 보면 당시의 미신서인 『移徙法』이란 책에 “太歲의 운행 방향에 따라도 凶하고 그와 반대되어도 凶하다”고 되어 있다. 예를 들어 太歲가 子의 地支에 있을 경우, 天下 사람들은 모두 南北으로 이동해서는 안 되고, 집을 짓거나 嫁娶하는 일도 피해야 하며, 대신 東西 방향이나 東北, 東南 등 네 귀퉁이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다는 믿음이 있었다(『論衡』 :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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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를 상림원(上林苑)주 002
각주 002)
“上林苑”은 秦代 도성인 咸陽에 처음 조성되었는데, 현재 西安市 서쪽, 渭水의 남쪽에 있었다. 始皇帝 35년(전212)에 이곳 안에 宮을 건설하였는데, 阿房宮이 그 前殿이다. 전한 초기에 황폐화되어 백성들이 들어가 개간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漢武帝가 다시 이곳을 宮苑으로 확대 조성하고, 水衡都尉, 上林苑令, 丞, 尉 등을 두어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곳에서 皇帝는 사냥을 하기도 하고, 離宮과 觀, 館 수십 곳을 세웠다. 蒲陶宮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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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는 포도궁(蒲陶宮)에 머물게 하였다.주 003
각주 003)
원문 “舍之上林苑蒲陶宮”에서 “舍”는 顔師古에 따르면 “止宿”의 의미이다. 胡三省에 따르면, 포도는 본래 大宛國에서 나는데, 武帝가 大宛을 정벌한 뒤, 蒲陶를 채집하여 離宮에 심었기 때문에 이곳이 蒲陶宮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資治通鑑』 권35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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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치가] 선우에게 공경을 더하는 것이라고 [선우에게] 고하였으나, 선우가 [사실을] 알게 되어 [불쾌하게 생각하였다].주 004
각주 004)
[불쾌하게 생각하였다]는 원문에 없는 구절이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충하지 않으면 “單于知之”의 뜻이 모호하다. 單于에게 ‘告’하였으면, 응당 單于가 ‘知’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따로 그것을 밝힐 필요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뒤에 무엇인가 생략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資治通鑑』에는 “單于知之” 다음에 “不悅”(1123)이란 말이 추가되어 있다. 『漢書』 哀帝 본기에도 單于가 2월, 匈奴로 돌아가면서 “不說”하였고 이 말이 「匈奴傳」에 있다고 하였다(권11 「哀帝紀」 : 344). 하지만 “不說”이란 표현은 「匈奴傳」에 보이지 않는다. 일단 司馬光은 哀帝本紀의 기사에 의거하여 “不悅”을 “單于知之” 다음에 삽입하였다고 생각되는데, 타당하다고 본다. 일역본도 같은 의견이다(內田吟風, 1971 : 126∼127). 요컨대 원문에서 “單于知之” 다음에 “不說”이 빠진 것으로 보고 위의 내용을 추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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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복 370벌과 수놓은 비단과 [기타] 견직물 3만 필, 명주 솜 3만 근을 추가로 사여하였고, 나머지 [사여품은] 하평 연간(전28∼전25)과 같았다.주 005
각주 005)
“河平 4년(전25) 정월 입조하였을 때, 수놓은 비단․무늬 없는 비단 2만 필과 명주솜 2만 근을 추가 사여하고, 나머지는 景寧 연간(전33)과 같았다”고 하였다(『漢書』 권94하 「匈奴傳」 : 3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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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이] 끝난 뒤 중랑장 한황(韓況)을 보내 선우를호송하게 하였다. 선우는 변새 밖으로 나가 휴둔정(休屯井)에 도착하였고, 거전(車田) 노수(盧水)를 북쪽으로 건넜는데 그 길이 에둘러 돌아가 멀었다. [그래서] 한황 등의 식량이 부족해졌다. 선우가 이에 자신들의 양식을 주었다. [한황 등은 귀환하기로] 약속된 날짜에서 50여 일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 각주 001)
    “太歲”는 목성이다. 胡三省에 따르면 이해 太歲가 申의 地支에 있었다고 한다(『資治通鑑』 : 1123). 太歲가 申에 있는 것을 “涒灘”이라고 하는데(『爾雅注疏』 권6 : 187), 그때에는 특정한 방향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미신이 있었다. 漢代에는 천체의 순환 주기를 계산할 때, 달과 목성을 기준으로 삼았는데, 이들의 순환 주기를 대략 12년으로 보고, 이 숫자 12를 자연계와 인간사회의 다양한 현상을 파악하는 기준수로 삼았다. 이러한 관념은 漢代人들의 일상생활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는데(최진묵, 2001 : 247), 특히 목성(太歲)을 諸神을 통솔하는 人君의 상징으로 보고, 그것이 지시하는 方位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凶災를 막기 위해서 각각의 방위에 五行의 물건을 걸어두는 등 厭勝之法을 행하였는데, 그것을 “太歲避忌之法”이라고 하였다(『陔餘叢考』 「太歲大將軍」 : 692). 『論衡』에 보면 당시의 미신서인 『移徙法』이란 책에 “太歲의 운행 방향에 따라도 凶하고 그와 반대되어도 凶하다”고 되어 있다. 예를 들어 太歲가 子의 地支에 있을 경우, 天下 사람들은 모두 南北으로 이동해서는 안 되고, 집을 짓거나 嫁娶하는 일도 피해야 하며, 대신 東西 방향이나 東北, 東南 등 네 귀퉁이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다는 믿음이 있었다(『論衡』 :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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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上林苑”은 秦代 도성인 咸陽에 처음 조성되었는데, 현재 西安市 서쪽, 渭水의 남쪽에 있었다. 始皇帝 35년(전212)에 이곳 안에 宮을 건설하였는데, 阿房宮이 그 前殿이다. 전한 초기에 황폐화되어 백성들이 들어가 개간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漢武帝가 다시 이곳을 宮苑으로 확대 조성하고, 水衡都尉, 上林苑令, 丞, 尉 등을 두어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곳에서 皇帝는 사냥을 하기도 하고, 離宮과 觀, 館 수십 곳을 세웠다. 蒲陶宮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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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원문 “舍之上林苑蒲陶宮”에서 “舍”는 顔師古에 따르면 “止宿”의 의미이다. 胡三省에 따르면, 포도는 본래 大宛國에서 나는데, 武帝가 大宛을 정벌한 뒤, 蒲陶를 채집하여 離宮에 심었기 때문에 이곳이 蒲陶宮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資治通鑑』 권35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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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불쾌하게 생각하였다]는 원문에 없는 구절이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충하지 않으면 “單于知之”의 뜻이 모호하다. 單于에게 ‘告’하였으면, 응당 單于가 ‘知’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따로 그것을 밝힐 필요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뒤에 무엇인가 생략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資治通鑑』에는 “單于知之” 다음에 “不悅”(1123)이란 말이 추가되어 있다. 『漢書』 哀帝 본기에도 單于가 2월, 匈奴로 돌아가면서 “不說”하였고 이 말이 「匈奴傳」에 있다고 하였다(권11 「哀帝紀」 : 344). 하지만 “不說”이란 표현은 「匈奴傳」에 보이지 않는다. 일단 司馬光은 哀帝本紀의 기사에 의거하여 “不悅”을 “單于知之” 다음에 삽입하였다고 생각되는데, 타당하다고 본다. 일역본도 같은 의견이다(內田吟風, 1971 : 126∼127). 요컨대 원문에서 “單于知之” 다음에 “不說”이 빠진 것으로 보고 위의 내용을 추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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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河平 4년(전25) 정월 입조하였을 때, 수놓은 비단․무늬 없는 비단 2만 필과 명주솜 2만 근을 추가 사여하고, 나머지는 景寧 연간(전33)과 같았다”고 하였다(『漢書』 권94하 「匈奴傳」 : 3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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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애제, 한황(韓況), 한황, 한황
지명
노수(盧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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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조후 선우가 돌아갈 때 한황(韓況)을 보내 호송하게 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4_1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