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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문궤

평양을 수복한 승전에 대해 감사하는 조선국왕의 주문(奏文)

38. 天兵克復平壤奏
  • 발신자
    조선국왕 신 이(李) 휘(諱)
  • 발송일
    1593년 2월 10일(음)(만력 21년 2월 10일)
발신: 조선국왕 신 이(李) 휘(諱)는 삼가 상주합니다.
사유: 우러러 황상의 위엄에 의지하여 평양을 수복한 승전을 비보합니다.
 
[조선국왕] 만력 21년 1월 9일, 배신 제도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이 치계하였습니다.
[유성룡] 제도도순찰사 김명원(金命元)의 정(呈)을 받았습니다.
[김명원] 평안도 관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신(申)입니다.
[이원익] 이달 6일, 흠차제독계료보정산동등처방해어왜군무총병관도독동지 이여송(李如松)이 대군을 거느리고 곧장 평양성의 밖으로 나아가니 여러 장수가 부대를 나누어 본성을 포위하였습니다. 왜적 2천여 명이 성의 북쪽 모란봉에 올라 청백의 기치를 세우고 함성을 지르며 포를 쏘아 댔습니다. 또 왜적 1만여 명이 성 위에 늘어서서는 앞에 녹각책(鹿角柵)을 세우고 방패를 두른 채 칼을 휘둘렀는데 형세가 매우 왕성하였습니다. 또 왜적 4~5천 명이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어 대며 성을 순시하면서 여러 적을 지휘하였습니다. 본성은 성의 안팎에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어 갑자기 공격하기 어려운 형세였으므로 총병이 군대를 거두어 돌아갔습니다. 이날 밤, 인시에 왜적 3천여 명이 재갈을 물고 몰래 나와 (도독) 양원(楊元), 도독 이여백(李如栢), 도지휘 장세작(張世爵) 등의 군영을 습격했으나 그들이 통솔한 병사들에 의해 격퇴되었습니다. 7일 밤에 왜적 800여 명이 다시 도독 이여백의 군영을 공격했으나 역시 본관에게 격퇴되었습니다. 8일 동틀 무렵, 총병이 향을 피우고 날을 점쳤는데 ‘길(吉)’을 얻었기에, 밥 지어 먹기를 마치고 세 군영의 장관들과 함께 각기 관할 장수와 군병을 통솔하여 칠성문(七星門)‧함구문(含毬門)‧보통문(普通門) 밖에 진을 쳤습니다. 총병이 친병 200여 기를 거느리고 오가면서 지휘하니 장사들이 뛸 듯이 기뻐하면서 모두 힘껏 싸울 각오를 다졌습니다. 진시에 여러 군사들을 나누어 비늘처럼 차례대로 조금씩 전진하게 하고, 각종 화기를 일제히 쏘니 소리는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고, 온 들판이 어두워졌습니다. 화전(火箭) 하나가 밀덕(密德)의 토굴에 닿자 갑자기 벌건 불이 하늘로 치솟았고 불길이 번지면서 주변을 모조리 태웠습니다. 성가퀴를 지키는 왜적이 연환(鉛丸)과 끓는 물, 돌덩이 등을 섞어 쓰면서 죽기로 버티며 지켰고, 또 긴 창과 큰 칼을 밖으로 내어 일제히 날을 세웠는데 고슴도치의 털처럼 빽빽하였습니다. 총병이 손수 겁을 내는 자 하나를 베어 진(陣) 앞에 걸어 두니 여러 군사들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성에 다가갔습니다. 삼베로 만든 방패를 등에 걸고 창을 쥐고서 서로 앞다투어 일제히 나가며 혹 활을 쏘거나 포를 놓고, 혹 성가퀴를 지키는 적병을 올려다 찌르기도 하니 적이 지탱해 내지 못하고 조금씩 물러났습니다. 그러자 총병이 몸을 솟구쳐 먼저 (성에) 오르고 여러 장수를 독려하여 들어가게 했습니다. 천병 한 갈래는 본국의 관군과 함께 함구문으로 들어가고 한 갈래는 보통문으로 들어갔으며 한 갈래는 밀덕의 동쪽 성에 올랐는데, 기병과 보병이 구름처럼 모여 사면에서 쳐죽이니 많은 적병들이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천병이 전투에서 참획한 수급 1,285과를 조사해 보니 그 안에 적의 추장인 평수충(平秀忠), 평진신(平鎭信), 종일(宗逸) 등 25명의 수급이 있었습니다. 왜적 2명과 통사 장대선(張大膳)을 생포하였고 말 2,985필을 빼앗았으며 일본 무기 452건을 얻고 본국의 잡혀갔던 남녀 1,015명을 구출하였습니다. 천병이 승세를 타고 불을 놓아 건물을 모두 소각하니 숨어들었던 많은 적병이 불에 타 1만여 명이 죽었는데 그 냄새가 10여 리나 퍼졌습니다. 남은 적들은 풍월루(風月樓)의 작은 성에 숨어들어갔는데 총병이 땔나무와 풀을 운반하게 하여 사방에 쌓아 두고 이어서 화전을 쏘아 대니 순식간에 불타서 모두 재가 되었습니다. 또 남은 적들 가운데는 성을 넘어 강을 건너다가 얼음이 깨지면서 익사한 자들도 있었는데 그 수를 다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칠성문‧보통문‧모란봉(牡丹峯) 등지의 여러 적들은 그대로 토굴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견고하여 빼앗기 어려웠습니다. 총병이 군병을 거두어 밥을 먹이며 말하기를 “적들이 반드시 야반도주할 것이다.” 하고, 곧바로 참장 이녕(李寧), 부총병 조승훈(祖承訓), 유격 갈봉하(葛逢夏)주 001
각주 001)
원문에 따르면 ‘부총병과 참장 등의 관원 이녕’이지만, 『선조실록』 동년 1월 11일자의 영병수목(領兵數目)에 나타나는 명군 지휘부의 명단을 토대로 정리했음을 밝힌다. 이녕은 유격이라고 하지만 ‘원임참장(原任參將)’이라고 나타나는 점으로 미루어 참장으로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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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관원을 파견하여 군병을 이끌고 매복하게 하였습니다. 총병이 양원, 이여백, 장세작 등 3명의 부장과 함께 큰 길을 따라서 추격하니 그 적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이녕 등이 매복한 길목에서 요격되었습니다. 359과를 참획하였고 왜적 3명을 생포하였습니다. 남은 적들이 갑옷을 벗고 창을 내던지면서 겁에 질려 도망하니 절령(岊嶺)주 002
각주 002)
황해도 봉산과 서흥 사이에 위치한 자비령(慈悲嶺)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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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서쪽은 모두 탕평되었습니다.
[유성룡] 신이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평양부는 실로 본국의 옛 도읍으로서 성지가 험하고 견고한데 흉적들이 짓쳐들어 와서 점거하고 소굴로 삼았었습니다. 지금 천병이 진격하자 북소리 한 번에 격파되었고, 흉악한 잔적들은 도망쳐 목숨을 부지할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본국을 재조(再造)할 기회가 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은 이원익 등과 함께 각처의 말먹이와 군량을 운반하여 본성에 들여서 독부(督府)의 쓰임에 대비하게 하는 것 외에, 승전 보고[捷音]이므로 이에 갖추어 아룁니다.
[조선국왕] 신은 이를 받고 자세히 살펴보건대 소방의 군병은 취약하고 날로 줄어드는데 또 평양성은 험하여 쉽게 수복할 수 없었습니다. 신은 낮과 밤으로 걱정하고 마음 졸이면서 죽을 곳을 알지 못하다가 성명의 천지부모와 같은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선대를 굽어살피어 신이 직사에 실패한 점에 죄를 가하지 않고, 도리어 남북의 정예병을 조발하라고 명하여 소방을 도탄에서 구하셨습니다. 군병의 먹을 것이 부족할까 걱정하여 은량을 먼저 내리셨고, 군량과 말먹이가 부족할까 걱정하여 계속해서 날라 주셨습니다. 사졸들이 들판에서 이슬에 젖고 노새와 나귀가 길에서 나뒹굴다 죽는 것은 신의 허물로써 천조에 걱정 끼치기를 이렇게까지 하였으니 신은 감격하고도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왕사(王師)의 정벌함에 천자의 관리에게는 대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본년 1월 8일 임술일에 평양으로 진공하여 아침이 끝나기도 전에 성을 격파하니 타 죽고, 빠져 죽고, 참살된 자들 외에 남은 적들은 혼비백산하였습니다. 그 성대한 군대의 위엄과 신속한 승전은 실로 전대의 역사에서도 있지 않았던 바입니다. 신은 대소의 배신들과 함께 처음 승전보를 듣고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습니다. 이는 대개 성천자의 성대한 덕이 널리 퍼지고, 신묘한 무공이 멀리까지 펼쳐진 데다 명공(名公)들이 계책을 돕고 본병(本兵)이 전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시랑 송응창이 기무에 온 마음을 다해 방략을 지휘했기에 계책이 부합하여 큰 공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총병 이여송은 강개하게 군대를 경계시켰으며, 의로운 기운으로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군사들이 지나는 길에 터럭만큼도 범함이 없었고, 전투에서는 싸움을 독려하며 몸소 여러 장교들보다 앞장섰습니다. 심지어 말이 납탄에 맞고 불길이 몸을 에워싸기에 이르러서도 두려운 기색 없이 오히려 태연했습니다. 성을 함락하던 날에는 기자(箕子)에게 제사 지내고 먼저 그 무덤을 봉했으며 다친 자를 어루만지고, 전사자들의 영혼을 두루 위로하여 덕의를 선포하고 고아와 과부를 위로하였으니 비록 배도(裵度)가 회서(淮西)를 평정한 일주 003
각주 003)
배도(裵度)는 당 헌종 13년(818) 중서시랑(中書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회서(淮西, 지금의 안휘성 북부) 지역의 번진 세력을 평정하였다. 배도의 정벌 이후, 하북성의 번진들이 당 조정에 귀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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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조빈(曹彬)이 강남에 내려간 일주 004
각주 004)
조빈(曹彬)은 오대(五代)의 후한(後漢)부터 송대 초에 이르기까지 활약한 관인으로 관직이 동평장사(同平章事)에 이르렀다. 본 고사는 개보(開寶) 7년(974) 승주서남로행영마보군전도도부서(昇州西南路行營馬步軍戰櫂都部署)에 임명되어 남당(南唐)을 정벌하고 금릉(金陵)을 함락시키면서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은 일로 명성을 떨친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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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습니다. 부총병․참장․유격․도사 이하 각 급의 장령들도 용감하기가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하고 신이 기세를 돕는 듯하여, 큰 돌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이를 무릅쓰고 올라간 자도 있었고 탄환이 가슴에 박혔는데도 무찌르기를 그치지 않는 자도 있었습니다. 소방의 장사들은 소매에 손을 넣은 채 놀라서 움츠러들어 그 사이에 감히 힘을 보태지 못하고 단지 철기의 말발굽이 먼지를 일으키면서 들판을 달리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화전이 미치는 곳에는 벌건 화염이 하늘을 찔렀고, 포탄이 방책에 닿으면 털이 흩날리듯이 부서졌으며 창으로 성가퀴를 지키는 자를 찌를 때 민첩하기가 날아오르는 매와 같았습니다. 비린 연기는 하늘에 가득하고 흐르는 피는 여러 갈래로 흘러 강을 이루었으니 천지가 찢어져서 산과 연못이 뒤바뀌었습니다. 저 적들의 조총이나 끓는 물, 돌멩이는 바로 사마귀가 수레바퀴에 맞서는 듯 감히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평양성은 실로 그들의 정예병과 기계가 있는 곳이어서 신이 한 도의 힘을 다하였으나 해가 지나도록 엿보지 못했습니다. 수복한 뒤에 그곳에 설치된 방비에 대해 들으니 결코 소방의 병력으로 공격하여 함락시킬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천자의 위엄이 한 번 떨쳐지자 여러 부대가 소문만 듣고 이미 대나무가 쪼개지는 형세가 이루어져, 황해도 동쪽은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물러갔으니 옛 도읍을 수복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고 종사도 차례대로 회복될 것입니다. 신은 선령들이 땅속에서 감격할 것을 생각하고, 남은 백성들이 소생될 희망을 생각하니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여 멍할 뿐입니다. 비록 되살려 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지만 실로 도모할 길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신이 크게 통쾌하게 여기는 것은, 보잘것없는 자가 날뛰면서 바다 한 모퉁이에서 스스로를 높이고, 천자의 위엄을 알지 못하고 누차 방자하게 미친 소리를 해대는 것을 신은 늘 통탄했는데, 지금 귀신이 그 본심을 열어 스스로 천벌을 취하여 바다와 섬이 두려워서 벌벌 떨며 감히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거의 살아가지도 못하게 된 것이니 이것이 어찌 다만 소방의 수치를 씻는 것이겠습니까. 실로 또한 백왕의 위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은 또 듣건대, 소원이 있으면 곡진히 들어줌이 천지의 큰 덕이요, 품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는 것이 신자의 지극한 정리라고 합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오늘날 흉적이 초멸된 것은 전적으로 천사(天師)에 의한 것이요, 소방은 터럭만큼도 한 일이 없습니다. 저들이 천조의 장수가 회군하는 것과 나라 안이 외롭고 약함을 보고 다시 침략하여 씹어 먹을 계책을 낸다면 그 화는 더욱 심하여 막아 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은 다시 성상께 동쪽을 돌아보는 걱정을 끼치고 미열한 신이 ‘방어에 실패한 죄’를 거듭 짓게 될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상의 자애로움으로 바다 귀퉁이의 잔약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끝까지 천조의 자혜지인(子惠之仁)을 베풀어서 독부로 하여금 절강 포수 5천 명을 적절히 헤아려 뽑고 이들을 한두 명의 장관에게 맡겨서 연해의 요해처인 부산 등지에 몇 달간 나누어 주둔하게 하십시오. 한편으로는 소방의 군민을 가르치고 한편으로는 흉악한 적들의 음모를 소멸시키게 한다면, 신은 아마도 천자의 위엄에 영원히 의지하여 타다 남은 것을 수습하여 훗날에 대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이 이미 나라의 땅을 회복하고도 선후책을 바라는 것은 지극히 참람하고 외람되어 죄가 진실로 용서하기 어려운 것임을 알지만, 천조에서 굽어살피어 긍휼히 여김이 이미 내복과도 같음이 있으니 하방(下邦)이 어찌 감히 외국이라 자처하겠습니까. 신은 한편으로 사람과 가축을 징발하여 군량과 말먹이의 운반을 독려하고 한편으로는 병마를 조발해 모아서 왕사와 힘을 합쳐 경성으로 진격하여 취하기를 도모하고 또 함경도에서 서쪽으로 향한 적들에 대비하고자 합니다. 신은 수복하기를 기다렸다가 즉시 경성으로 돌아가 관군을 맞이하여 위로하고, 이어서 전후에 받은 은혜에 별도로 사례하는 것 외에도, 우러러 황상의 위엄에 의지하여 평양을 수복했다는 승전보를 비보합니다. 이에 삼가 주본을 갖추어 아룁니다.
 
만력 21년 2월 10일 조선국왕 신 이(李) 휘(諱)가 이같이 삼가 주문합니다. ―이호민이 지었다. 예부에 보낸 자문이 있다.주 005
각주 005)
이호민이 본 주본의 찬술을 맡았으며, 주본과 동일한 내용의 자문을 예부에도 보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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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원문에 따르면 ‘부총병과 참장 등의 관원 이녕’이지만, 『선조실록』 동년 1월 11일자의 영병수목(領兵數目)에 나타나는 명군 지휘부의 명단을 토대로 정리했음을 밝힌다. 이녕은 유격이라고 하지만 ‘원임참장(原任參將)’이라고 나타나는 점으로 미루어 참장으로 기술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황해도 봉산과 서흥 사이에 위치한 자비령(慈悲嶺)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3)
    배도(裵度)는 당 헌종 13년(818) 중서시랑(中書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회서(淮西, 지금의 안휘성 북부) 지역의 번진 세력을 평정하였다. 배도의 정벌 이후, 하북성의 번진들이 당 조정에 귀순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조빈(曹彬)은 오대(五代)의 후한(後漢)부터 송대 초에 이르기까지 활약한 관인으로 관직이 동평장사(同平章事)에 이르렀다. 본 고사는 개보(開寶) 7년(974) 승주서남로행영마보군전도도부서(昇州西南路行營馬步軍戰櫂都部署)에 임명되어 남당(南唐)을 정벌하고 금릉(金陵)을 함락시키면서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은 일로 명성을 떨친 것을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05)
    이호민이 본 주본의 찬술을 맡았으며, 주본과 동일한 내용의 자문을 예부에도 보냈음을 의미한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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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을 수복한 승전에 대해 감사하는 조선국왕의 주문(奏文) 자료번호 : sdmg.k_0001_0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