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太宗)이 고려에 사신을 보냄
태자중윤(太子中允)주 001 직사인원(直舍人院)주 002 장계(張洎)주 003
각주 003)
와 저작좌랑(著作佐郎)주 004張洎 : 934~997. 五代 宋初의 관인. 滁州 全椒(현재 안휘성 소속) 사람. 字는 偕仁이다.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고 고전에 통달했다. 南唐에서 進士가 되었고 관직이 中書舍人, 淸輝殿學士에 이르렀다. 남당 멸망 후 북송에 귀부하여 太子中允에 제수되었고, 태종 즉위 후 知相州, 知譯經院, 判大理寺, 翰林學士 등 관직을 역임했다. 문체가 유려하고 황제의 비위를 잘 맞추어 태종의 총애를 받았다. 至道 元年(995)에 參知政事가 되고, 다음해(996) 탕구트의 李繼遷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靈州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포기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그 다음해(997) 刑部侍郞으로 좌천되었다가 얼마 후 병으로 죽었다.
각주 004)
직사관(直史館)주 005 화양(華陽)주 006 구중정(勾中正)주 007에게 고려에 사신으로 가도록 명했다.著作佐郎 : 북송의 관직. 曹魏 明帝 시기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역할은 國史를 다루는 著作郎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晋 元康 연간에 秘書省에 소속되어 인원은 8명이 배정되었으며 佐著作郎이라 칭하기도 했다. 北魏 시기에는 品秩이 從5品上이었다. 北齊는 2명을 두었고, 北周에는 著作中士 4명이 있었다. 唐代에는 著作局에 佐郎 4명을 두었고, 開元 연간에 2명으로 감축했다가 龍朔 연간에는 명칭을 司文郎으로 바꾸었다가 이후 다시 되돌렸다. 북송은 당대의 제도를 이어받아 著作佐郎의 品位는 초기에 從6品上이었다가 元豊新制 후 正8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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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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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3)
張洎 : 934~997. 五代 宋初의 관인. 滁州 全椒(현재 안휘성 소속) 사람. 字는 偕仁이다.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고 고전에 통달했다. 南唐에서 進士가 되었고 관직이 中書舍人, 淸輝殿學士에 이르렀다. 남당 멸망 후 북송에 귀부하여 太子中允에 제수되었고, 태종 즉위 후 知相州, 知譯經院, 判大理寺, 翰林學士 등 관직을 역임했다. 문체가 유려하고 황제의 비위를 잘 맞추어 태종의 총애를 받았다. 至道 元年(995)에 參知政事가 되고, 다음해(996) 탕구트의 李繼遷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靈州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포기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그 다음해(997) 刑部侍郞으로 좌천되었다가 얼마 후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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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4)
著作佐郎 : 북송의 관직. 曹魏 明帝 시기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역할은 國史를 다루는 著作郎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晋 元康 연간에 秘書省에 소속되어 인원은 8명이 배정되었으며 佐著作郎이라 칭하기도 했다. 北魏 시기에는 品秩이 從5品上이었다. 北齊는 2명을 두었고, 北周에는 著作中士 4명이 있었다. 唐代에는 著作局에 佐郎 4명을 두었고, 開元 연간에 2명으로 감축했다가 龍朔 연간에는 명칭을 司文郎으로 바꾸었다가 이후 다시 되돌렸다. 북송은 당대의 제도를 이어받아 著作佐郎의 品位는 초기에 從6品上이었다가 元豊新制 후 正8品이 되었다.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