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산(도비리국)을 넘어 영토를 넓혔고, 상수[국]을 아울러서 강토를 열었다.
초산(도비리국)을 넘어 영토를 넓혔고, 상수[국]을 아울러서 강토를 열었다.
『위지』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있다. 성곽이 없다. 원양국·모양수국주 001·상수국주 002·소석색국·대석색국·우휴모록국주 003·신복첨국주 004
각주 004)
·백제국·속로불사국·일화국·고탄자국·고잡국주 005·노람국·목지국주 006·자리모로국·소위건국·고애국주 007·영로[국]·비리국·고비리국주 008·신첩국주 009·지침[국]·지구로국주 010·비미국·감해비리[국]·고만[국]주 011·치리국국·아림국주 012·사로국·내비리[국]·감해국·매로국·군비리국주 013·전사오차국주 014·일리국·불미국·정로국주 015·모로리국주 016·신소도국·막로국·고즐국주 017·임소반국·신운신국주 018『三國志』 卷30 韓에는 ‘臣濆活(혹은 沽)國’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通志』 卷94 馬韓에는 ‘臣濆沽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臣僕沾國(臣濆活國, 臣濆沽國)은 대방군 설치 이후 마한과 대방군과의 충돌을 보여주는 崎離營전투를 주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기리영전투의 성격과 주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충돌하고 있다.
『三國志』 卷30 韓에 따르면 部從事 吳林이 辰韓 8국을 나누어 낙랑에 주려 하였으나, 통역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臣智激韓忿’하여 대방군과 기리영에서 전투를 벌인 것으로(『三國志』 卷30 韓 “部從事吳林 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보이는 ‘臣智激韓忿’이 『三國志』의 판본에 따라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문제가 된다. 通行本 魏志에서는 「臣智激韓忿」이라고 기록된 것과는 달리 百衲本 魏志에는 「臣幘沾韓忿」이라고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通志』의 기록과 『三國志』 판본의 발행 시기에 따른 비교 분석을 통해 ‘臣智激韓’을 ‘臣濆活韓’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尹龍九, 「三韓의 對中交涉과 그 性格」 『國史館論叢』, 1999, 101~105쪽). 이에 근거하여 기리영전투의 주체를 臣濆沽國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다수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여전히 ‘臣智激韓忿’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鄭載潤, 「魏의 對韓政策과 崎離營 전투」 『중원문화연구』 5, 2001, 32~35쪽). 한편 이와 함께 기리영전투의 주체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기리영전투의 주체를 臣濆沽國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다수를 이루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전투를 이끌었던 신지는 당시 마한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목지국의 진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盧重國, 「馬韓의 成立과 變遷」 『馬韓・百濟文化』 10, 1987, 37쪽; 兪元載, 「晋書의 馬韓과 百濟」 『韓國上古史學報』 17, 1994, 147쪽).
『三國志』 卷30 韓에 따르면 部從事 吳林이 辰韓 8국을 나누어 낙랑에 주려 하였으나, 통역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臣智激韓忿’하여 대방군과 기리영에서 전투를 벌인 것으로(『三國志』 卷30 韓 “部從事吳林 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보이는 ‘臣智激韓忿’이 『三國志』의 판본에 따라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문제가 된다. 通行本 魏志에서는 「臣智激韓忿」이라고 기록된 것과는 달리 百衲本 魏志에는 「臣幘沾韓忿」이라고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通志』의 기록과 『三國志』 판본의 발행 시기에 따른 비교 분석을 통해 ‘臣智激韓’을 ‘臣濆活韓’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尹龍九, 「三韓의 對中交涉과 그 性格」 『國史館論叢』, 1999, 101~105쪽). 이에 근거하여 기리영전투의 주체를 臣濆沽國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다수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여전히 ‘臣智激韓忿’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鄭載潤, 「魏의 對韓政策과 崎離營 전투」 『중원문화연구』 5, 2001, 32~35쪽). 한편 이와 함께 기리영전투의 주체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기리영전투의 주체를 臣濆沽國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다수를 이루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전투를 이끌었던 신지는 당시 마한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목지국의 진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盧重國, 「馬韓의 成立과 變遷」 『馬韓・百濟文化』 10, 1987, 37쪽; 兪元載, 「晋書의 馬韓과 百濟」 『韓國上古史學報』 17, 1994, 147쪽).
각주 018)
·여래비리국·초산도비리국·일난국·구해국주 019·불운국·불사분사[국]·해타[국]주 020·[건]마국·초리국이 있다.주 021 모두 50여 국이며, 대국은 만여 가이고, 소국은 수천 가이다. 또한 섬 위에 주호국이 있다.”臣雲新國은 영산강 유역의 주요한 세력 중 하나로 지칭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료로는 『三國志』의 ‘신지는 혹 우대하는 臣雲遣支報 安邪踧支 濆臣離兒不例 拘邪秦支廉의 호칭을 더한다는 기사(『三國志』 卷30 韓 “辰王治月支國臣智 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 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가 있다. 여기서 보이는 臣雲遣支報가 바로 신운신국의 수장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李丙燾, 「三韓問題의 新考察」 『震檀學報』 4, 1936, 38쪽). 신운신국의 위치는 마한 諸國의 기술 순서에 따라 지금의 전라남도 광산군이나 나주군 일대로 추정하거나(이병도, 『韓國史-古代』, 乙酉文化社, 1959, 300쪽) 해남 백포만 일대로 보기도 한다(문안식, 「榮山江流域 土着社會의 成長과 聯盟體 形成」 『史學硏究』 68, 2002, 8쪽). 신운신국은 1~3세기 단계에 중국 군현과 한반도, 일본 열도를 잇는 교통로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음으로써 영산강 유역의 주요한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정재윤, 「삼국시대 나주와 영산강 유역 세력의 동향」 『歷史學硏究』 62, 2016, 30쪽).
• 참고
『三國志』 卷30 韓 馬韓在西 … 有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國臣濆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咨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釁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監奚卑離國古蒲國致利鞠國冉路國兒林國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國辟卑離國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莫盧國古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濆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 凡五十餘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三國志』 卷30 韓에는 ‘臣濆活(혹은 沽)國’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通志』 卷94 馬韓에는 ‘臣濆沽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臣僕沾國(臣濆活國, 臣濆沽國)은 대방군 설치 이후 마한과 대방군과의 충돌을 보여주는 崎離營전투를 주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기리영전투의 성격과 주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충돌하고 있다.
『三國志』 卷30 韓에 따르면 部從事 吳林이 辰韓 8국을 나누어 낙랑에 주려 하였으나, 통역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臣智激韓忿’하여 대방군과 기리영에서 전투를 벌인 것으로(『三國志』 卷30 韓 “部從事吳林 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보이는 ‘臣智激韓忿’이 『三國志』의 판본에 따라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문제가 된다. 通行本 魏志에서는 「臣智激韓忿」이라고 기록된 것과는 달리 百衲本 魏志에는 「臣幘沾韓忿」이라고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通志』의 기록과 『三國志』 판본의 발행 시기에 따른 비교 분석을 통해 ‘臣智激韓’을 ‘臣濆活韓’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尹龍九, 「三韓의 對中交涉과 그 性格」 『國史館論叢』, 1999, 101~105쪽). 이에 근거하여 기리영전투의 주체를 臣濆沽國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다수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여전히 ‘臣智激韓忿’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鄭載潤, 「魏의 對韓政策과 崎離營 전투」 『중원문화연구』 5, 2001, 32~35쪽). 한편 이와 함께 기리영전투의 주체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기리영전투의 주체를 臣濆沽國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다수를 이루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전투를 이끌었던 신지는 당시 마한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목지국의 진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盧重國, 「馬韓의 成立과 變遷」 『馬韓・百濟文化』 10, 1987, 37쪽; 兪元載, 「晋書의 馬韓과 百濟」 『韓國上古史學報』 17, 1994, 147쪽).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 각주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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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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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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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8)
臣雲新國은 영산강 유역의 주요한 세력 중 하나로 지칭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료로는 『三國志』의 ‘신지는 혹 우대하는 臣雲遣支報 安邪踧支 濆臣離兒不例 拘邪秦支廉의 호칭을 더한다는 기사(『三國志』 卷30 韓 “辰王治月支國臣智 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 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가 있다. 여기서 보이는 臣雲遣支報가 바로 신운신국의 수장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李丙燾, 「三韓問題의 新考察」 『震檀學報』 4, 1936, 38쪽). 신운신국의 위치는 마한 諸國의 기술 순서에 따라 지금의 전라남도 광산군이나 나주군 일대로 추정하거나(이병도, 『韓國史-古代』, 乙酉文化社, 1959, 300쪽) 해남 백포만 일대로 보기도 한다(문안식, 「榮山江流域 土着社會의 成長과 聯盟體 形成」 『史學硏究』 68, 2002, 8쪽). 신운신국은 1~3세기 단계에 중국 군현과 한반도, 일본 열도를 잇는 교통로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음으로써 영산강 유역의 주요한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정재윤, 「삼국시대 나주와 영산강 유역 세력의 동향」 『歷史學硏究』 62, 2016, 30쪽).
- 각주 019)
- 각주 020)
- 각주 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