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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문궤

유키나가 등 왜적 무리가 소굴로 돌아가는 일 등을 조사하는 일에 관한 조선국왕의 회자(回咨)

16. 回咨
  • 발신자
    조선국왕
  • 발송일
    1595년 2월 26일(음)(만력 23년 2월 26일)
발신: 조선국왕
사유: 왜정을 조사하여 보고하는 일입니다.
 
[조선국왕] 본년 2월 19일, 흠차경영좌영관유격장군사도지휘진(陳)의 자문을 받았습니다. 살펴보건대, 「저는 만력 22년 11월 6일에 명지를 공경히 받들어 부산에 가서 유시하고 유키나가로 하여금 소굴로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운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받고 같은 날 또 본부의 자문을 받고 살펴보았습니다.
[진운홍] 저는 명지를 공경히 받들어 이달 12일에 경략군문의 위관 낙일룡(駱一龍)과 함께 조선의 배신 이시발(李時發), 통사 이해륭(李海隆)·장춘열(張春悅), 왜통사(倭通事) 이언서(李彦瑞)를 대동하고 왜영(倭營)으로 들어갔습니다. 직접 유키나가주 001
각주 001)
원문에는 ‘行長’으로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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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유시하여 화(禍)와 복(福)을 보이고 국가의 은혜를 들어 타일렀더니 유키나가는 고개를 숙이고 명을 들었습니다. 이어서 19일에는 저에게 소굴로 돌아가는 왜선 36척을 독려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의 말에 의거하면 각 포구에서 같은 날 일제히 출발한다고 하였습니다. 21일에는 유키나가가 직접 회답 3본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나의 정문은 병부의 석(성), 하나의 정문은 경략 손(광)에게 보낸 것이고 하나는 제게 답장한 것이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좌도의 각 포구에서 물러가는 왜병이 7,000명, 우도의 각 포구에서 물러가는 왜병이 8,000명으로 총 1만 5,000명입니다. 천사(天使)를 기다리기 위해 적절히 헤아려 남게 한 자는 유키나가 막하의 몇 안 되는 군사와 군량·선박을 지키는 무리 정도에 불과합니다.
[진운홍] 제게 도착했습니다. 바로 부마(夫馬)와 선척(船隻)을 준비하여 저를 진영 밖으로 직접 내보내 주면서, 또 천사가 가급적 빨리 도착해서 “비천한 저희[卑某]’들이 조속히 일본으로 돌아가게 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받고 살펴보니, 유키나가가 제가 선유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즉시 왜적 무리들을 소굴로 돌려보낸 만큼 책봉을 받은 뒤에는 다른 뜻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또한 본국의 배신 이시발 등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이니 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땅히 자문을 보내니, 번거롭더라도 살펴 주십시오.
[조선국왕] 이를 받고 조사해 보건대 앞서 본년 1월 27일 귀부로부터 자문을 받았습니다. 대략 다음의 내용이었습니다.
[병부] 지금 특별히 전담할 관원으로 하여금 해국의 군신에게 격문을 전하게 해서 성명의 자소지인(字小之仁)을 본받게 하고 적당한 배신에게 책임을 맡겨 부산에 파견하여 유키나가와 직접 회동하여 천조의 은혜와 위엄을 유시하고 그로 하여금 부산의 왜적을 모두 돌려보내고 성책과 가옥을 불사른 뒤에 사실대로 주보하여 책봉사가 가서 책봉하기에 편리하도록 해야 합니다.
[조선국왕] 이를 받고 이미 배신 박진종을 선발하여 귀부의 위관인 누국안(婁國安)을 쫓아 왜적 진영에 가서 재차 동정을 살펴보기를 완료했습니다. 이어서 이달 2일에 본부의 사후배신 이시발이 올린 장계를 받았습니다.주 002
각주 002)
해당 기사는 『선조실록』에 실려 있다. 『宣祖實錄』 卷60, 宣祖 28年 2月 乙巳(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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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발] 신이 삼가 선발되어 본부를 쫓아서 본년 정월 13일에 웅천에 있는 다이라노 유키나가주 003
각주 003)
원문에는 ‘平行長’으로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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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진영 안으로 들어가 5일을 머물렀습니다. 유키나가와 겐소주 004
각주 004)
원문에는 ‘玄蘇’로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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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함께 말하기를, “우리들은 조속히 대마도로 돌아가 천사를 기다리고자 합니다만 생각해 보건대 종전에 공갈이 심히 많았기 때문에 반드시 이곳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만약 천사가 왕경·남원(南原) 등처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우리들은 꼭 관백에게 보고할 것 없이 곧장 무리를 거두어 바다를 건널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본부에서 천조가 책봉을 허락한 덕의(德意)로 유키나가에게 두 번, 세 번 선유하고 즉각 크고 작은 선박 30여 척을 내어 각기 기호(旗號)를 내걸어 항구에 열을 지어 정박하게 하고 “모든 병선을 철수시켜 돌려보내라.”라고 하였습니다. 18일 본부의 명을 받아 신은 통사 이해륭을 대동하고 먼저 밀양 등처로 돌아와 마부와 말을 점검하고 기다리고자 그날 적의 진영에서 따로 나왔습니다. 20일에는 유천참(楡川站)주 005
각주 005)
당시 밀양부에 속했다. 조방장 정희연과 김태허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뒤의 20번 문서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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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돌아왔습니다.
[조선국왕] 또 같은 달 9일에 본관(이시발)의 장계를 받았습니다.
[이시발] 이달 5일 신이 본부와 함께 공주로 돌아오던 중에 본부의 패차(牌箚)를 가지고 도착한 병부차관 누국안을 노상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본부가 즉시 관하의 지휘 김문봉(金文鳳)을 차출하여 앞서 언급한 패차 6장과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내리는 개유첩 1장을 가지고 본관을 따라서 함께 웅천의 적 진영에 나아가도록 하였습니다.
[조선국왕] 또 같은 달 10일, 의정부의 장계를 받았습니다.
[의정부] 유격부를 쫓아간 통사 장춘열이 올린 정문입니다.
[장춘열] 올해 정월 13일, 제가 본부를 쫓아서 웅천의 적 진영에 들어가 머물렀는데 19일 오시쯤 적의 추장 유키나가가 그의 이름 모를 휘하의 작은 추장으로 하여금 본부와 낙(駱) 수비를 맞이하게 하고 함께 항구로 가서 누각 위에서 철수해 돌아가는 왜선들을 점검하였습니다. 저도 쫓아가서 엿보았는데 크고 작은 왜선 총 36척이 일제히 포를 놓고 돛을 펴서 동쪽으로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의정부] 정문을 갖춥니다.
[조선국왕] 갖추어 온 장계를 받고서 사안을 처리하는 동안 이번에 위의 자문을 받고 가만히 살펴보니 전항의 누국안·김문봉이 이미 왜적의 진영에 가서 다시 동정을 살피니 각 관원들이 돌아와 말하기를 기다렸다가 별도로 비보하는 것 외에도, 유격장군 진의 자문 내용의 사리는 실로 긴급한 성식에 관련된 바입니다. 이에 마땅히 자문을 보내오니 청컨대 살펴서 대신 상주하여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자문이 잘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이 자문을 병부에 보냅니다.
 
만력 23년 2월 26일.

  • 각주 001)
    원문에는 ‘行長’으로 기재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해당 기사는 『선조실록』에 실려 있다. 『宣祖實錄』 卷60, 宣祖 28年 2月 乙巳(2日). 바로가기
  • 각주 003)
    원문에는 ‘平行長’으로 기재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원문에는 ‘玄蘇’로 기재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당시 밀양부에 속했다. 조방장 정희연과 김태허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뒤의 20번 문서에 보인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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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나가 등 왜적 무리가 소굴로 돌아가는 일 등을 조사하는 일에 관한 조선국왕의 회자(回咨) 자료번호 : sdmg.k_0003_0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