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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문궤

투항한 왜병을 풀어주는 일에 관한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의 자문(咨文)

9. 都司咨令降倭分籍各營
  • 발신자
    요동도지휘사사
  • 발송일
    1595년 1월 9일(음)(만력 23년 1월 9일)
발신: 요동도지휘사사
사유: 항왜를 해송하는 일입니다.
 
[요동도지휘사사] 흠차분수요해동녕도겸리변비둔전 산동포정사사우참의 양(호)의 자문을 받았습니다.
[양호] 전사주 001
각주 001)
본 문서의 사안인 ‘爲觧送降倭事’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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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관련하여 본도(분수요해동녕도)에서 올린 정(呈)과 요동도사가가 올린 정에 대해서 흠차총독계료보정등처군무겸리양향경략어왜병부좌시랑겸도찰원우첨도어사 손(광)으로부터 「분수도에 내리니 바라건대 조사하여 보고하십시오.」라는 비(批)를 받들었습니다. 똑같이 전사와 관련하여 요동도사가 올린 정에 대하여 흠차순무요동지방찬리군무겸관비왜도찰원우첨도어사 이(李)주 002
각주 002)
앞의 1번 문서에 등장하는 이화룡이다. 『事大文軌』 卷12, 都司欽奉聖旨先許倭封 萬曆二十二年 十一月 二十七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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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터 「분수도에 내리니 바라건대 조사하여 보고하십시오.」라는 비(批)를 받았습니다. 이를 받들어 도사 만유무(萬栁茂)에게 문서를 보냈고 만유무로부터 정을 받았습니다.
[만유무] 그대로 준행했습니다. 얼마 후 통사 동녕위(東寧衛) 백호(百戶) 전사외(田四畏)와 조선통사 박대근(朴大根)을 불렀고 아울러 항왜간여문 등 22명이 각각 관역(官驛)에 도착하여 심문해서 ‘모두 일본국 원산주(圓山州) 곧, (그) 나라의 왕도(王都) 등지의 사람인데 지난해 조선국을 침범한다는 연유로 관백에게 동원되어 훈련을 받고 군사가 됐습니다. 간여문·소여문·견계로·시니수계·도화지·구라노수계·요기지·야사구는 왜추(倭酋) 가토 기요마사(淸正)주 003
각주 003)
원문에는 ‘淸正’으로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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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의 병졸이고, 심파지·이로화지·사구소는 왜추 모리 요시나리주 004
각주 004)
원문에는 ‘森侍從’으로 기재되어 있다. 모리 요시나리(森可成, ?~1611)는 임진왜란기 제4군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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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병졸이며, 돈삼보라·소기지·마다수계·신기지·규우로고는 왜추 나베시마 나오시게주 005
각주 005)
원문에는 ‘加賀守’로 기재되어 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7~1619)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와 함께 제2군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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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병졸이며, 위여문·요삼보라는 왜추 모리 요시나리주 006
각주 006)
원문에는 ‘壹岐守’로 기재되어 있다. 앞의 모리 요시나리와 중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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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병졸이며, 수계여문·니여문·시로사여문·다라여문은 왜추 구로다 나가마사주 007
각주 007)
원문에는 ‘甲斐守’로 기재되어 있다.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1568~1623)는 임진왜란기 제3군을 이끌고 황해도 방면으로 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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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병졸인데 각 부에서 이들을 통할했습니다. 평양에서 패전한 후로 관백이 또한 명하여 부산에서 성을 쌓고 집을 지어 주둔하라고 했지만 고초를 잘 넘기지 못했고 또한 군법의 이해에서 단지 어기기만 해도 곧바로 참하니 치여문 등이 선후로 작당하여 만력 22년(1594) 8·9·10월에 투항했습니다.’라는 공초를 얻었습니다. 조선국왕은 병조에 명령을 내려 통사와 회동하여 명백히 심문하도록 지시하고 해송하여 보냈습니다. 왜적의 실정을 심문함에 미쳐서는 실로 이들이 산졸(散卒)이라 크고 자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가토 기요마사 등의 관속으로 있었지만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들으니 관백이 (군사들에게) 부산에 오랫동안 주둔하다가 오직 천조(天朝)에서 봉해 준 뒤에야 본국으로 돌아오라고 하여 그 부하와 병졸은 모두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속히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한탄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관백은 아직까지 지시가 없다고 합니다. 또한, ‘올해에 공사(貢事)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음해 봄에 다시 침략하여 범한다고 하였으나 아직 어느 곳으로 정해지지는 않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를 받고서 각 왜의 사정을 심문하였으나 모두 오랑캐의 말이고 통사 백호 전사외와 조선통사 박대근만이 말을 전달하니 중간의 진위를 차례대로 믿기 어렵습니다. 이전의 공초와 대조하고 항왜를 각 보로 나누어 보내 안착하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양호] 만유무의 회답이 도(분수요해동녕도)에 도착했습니다. 「살펴보건대, 간여문 등은 몹시 절박하여 투항한 것이 확실한 듯합니다. 다만 우리와 같은 족류(族類)가 아니라 정형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마땅히 각 영보(營堡)에 나누어 보내 활동을 제한하면서 돌봐 주십시오.」라는 내용으로 갖추어 정문을 올려 자세히 살펴 주시기를 요청했습니다. 「각 항왜를 의논대로 각 보로 나누어 보내 안착하도록 하십시오. 왜정을 심문하는 일에 대해서는 대략 이미 드러났으니 바라건대 도사(遼東都司)에 문서를 보내어 조선국에 이문(移文)하고 이후에는 만약 항왜가 있더라도 이렇게 호송해 보낼 필요는 없다고 하십시오. 사안이 처리되면 격보(繳報)하십시오.」라는 (손광의) 비문을 받았습니다. 이를 받들어 항왜를 각 보에 나누어 보내 안착하도록 하는 외에 헤아려 보건대 곧바로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이에 마땅히 자문을 보내니 번거롭더라도 내용을 살펴서 조선국에 이문하여 이후에 항왜가 있더라도 여기로 호송해 올 필요가 없다고 해 주십시오. 시행한 연유를 회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요동도지휘사사] 이를 받고 헤아려 보건대 마땅히 곧바로 시행해야겠습니다. 이에 마땅히 자문을 보내니 번거롭겠지만 청컨대 귀국은 이후에 항왜가 있더라도 곧바로 그들을 안착시키되 호송하여 심문할 필요는 없습니다. 덧붙여 시행한 연유를 자문으로 회답해 주십시오. 자문이 잘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이 자문을 조선국왕에게 보냅니다.
 
만력 23년 1월 9일.

  • 각주 001)
    본 문서의 사안인 ‘爲觧送降倭事’를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앞의 1번 문서에 등장하는 이화룡이다. 『事大文軌』 卷12, 都司欽奉聖旨先許倭封 萬曆二十二年 十一月 二十七日. 바로가기
  • 각주 003)
    원문에는 ‘淸正’으로 기재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원문에는 ‘森侍從’으로 기재되어 있다. 모리 요시나리(森可成, ?~1611)는 임진왜란기 제4군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원문에는 ‘加賀守’로 기재되어 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7~1619)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와 함께 제2군에서 활동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원문에는 ‘壹岐守’로 기재되어 있다. 앞의 모리 요시나리와 중복된다. 바로가기
  • 각주 007)
    원문에는 ‘甲斐守’로 기재되어 있다.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1568~1623)는 임진왜란기 제3군을 이끌고 황해도 방면으로 전진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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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항한 왜병을 풀어주는 일에 관한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의 자문(咨文) 자료번호 : sdmg.k_0003_0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