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구간(남벽구간)
1) 제1구간(남벽구간)
남벽은 정문인 남문이 시설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외부의 침입과 공격을 일차적으로 방어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안학궁의 네 성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격을 띄고 있다. 따라서 다른 구간의 성벽과는 달리 보다 공들여 축조되어졌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번의 공동 조사에서는 현존 상황에 대한 지표 조사와 함께 간단한 측량 조사만이 이루어져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남벽의 전체 길이는 622m이고주 047방향은 서벽과 만나는 지점을 기준으로 할 때 동벽과 접하는 지점이 북쪽으로 6.2°주 048북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성벽은 직선상이다.
● 남벽 일반 ●
남벽은 1958~1971년 조사 전 규모가 너비 16~19m, 높이 3.0~3.2m였는데, 발굴 결과 너비 8.2~10m, 잔존 높이 5.8~6.0m(성벽 바깥측 성기석 기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현재 남벽은 일정 높이까지 성토 처리되어 있는데, 성벽 바깥 측을 기준으로 할 경우 남벽이 동,서벽과 접하는 지점은 현재 높이가 10~11m, 문지와 문지 사이의 중간 지점은 현재 높이가 7~8m, 문지 좌우 성벽은 6m 가량이다.주 049성벽의 현재 너비는 문지 좌우 성벽의 폭이 좁은 것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 일반적으로 16~18m이다. 따라서 현재 남벽은 복원된 것이라기 보다는 원 성벽의 보존을 위해 성토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아뭏튼 현재 남벽의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즉, 우수로 인한 성벽의 유실을 막기 위해 성벽 전반에 잔디를 입혀 놓았고, 나무로 인한 원 성벽의 변형과 부식토화를 방지하기 위해 남벽 상의 나무가 모두 제거된 상태이다. 다만 수구문 서벽 상단의 경우, 길이 19m, 높이 0.5~0.7m의 범위가 원래의 토축이 아닌 다량의 막돌을 포함하고 있는 토석으로 보수되어 있어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외 성벽 일반과 관련하여 수구문 서벽을 기점으로 서쪽 43.9m 처 성벽 바깥 측에 성기석으로 보이는 대형 판상석 3매가주 050밀려나와 있다는 점과 남중문 1.5m 앞 논두렁 사면에 다량의 소형 막돌과 함께 대형 판상석 1매가주 051인위적으로 집적되어 있다는점이 특기할만하다.
아뭏튼 현재 남벽의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즉, 우수로 인한 성벽의 유실을 막기 위해 성벽 전반에 잔디를 입혀 놓았고, 나무로 인한 원 성벽의 변형과 부식토화를 방지하기 위해 남벽 상의 나무가 모두 제거된 상태이다. 다만 수구문 서벽 상단의 경우, 길이 19m, 높이 0.5~0.7m의 범위가 원래의 토축이 아닌 다량의 막돌을 포함하고 있는 토석으로 보수되어 있어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외 성벽 일반과 관련하여 수구문 서벽을 기점으로 서쪽 43.9m 처 성벽 바깥 측에 성기석으로 보이는 대형 판상석 3매가주 050밀려나와 있다는 점과 남중문 1.5m 앞 논두렁 사면에 다량의 소형 막돌과 함께 대형 판상석 1매가주 051인위적으로 집적되어 있다는점이 특기할만하다.
● 남벽 제1단면 조사 지점 ●
이번 공동 조사에서는 남벽 전 구간에 대한 지표 조사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북측이 절개하여 조사한 지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외 보고서 기술 및 도면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항에 대한 확인도 이루어졌다. 1973년의 보고서에도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북측은 1958~1971년의 조사에서 남서문으로부터 남벽과 서벽 접합처 사이의 성벽 두 곳을 절개하여 단면 조사하였다. 그러나 한 지점은 ‘남서문 부근’(이하 남벽 제1단면 조사 지점), 다른 한 지점은 ‘서쪽 모서리 부근’(이하 남벽 제2단면 조사 지점)이라고만 기술되어 있어 그 정확한 지점을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번에 확인한 결과 그중 ‘남서문 부근’(1973년 보고서, 그림 88)이 현재의 남서문 서벽으로부터 서쪽으로 29m 처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1973년의 보고서에는 폭 1m의 시굴 트렌치를 넣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2m 폭으로 절개하였음도 알게 되었다. 이외 1973년의 보고서 기술과 도면만으로는 제1단면 조사 지점의 축조 상태가 어떠하였는지, 성벽과 생토면과의 관계가 어떠하였는지가 분명치가 않은데, 이러한 의문점을 풀기 위해 전제헌으로부터 당시 발굴 정황에 대한 여러 가지 답변을 듣기는 하였으나, 판축 상태에 대한 약간의 정보 외에는 명확하게 풀리지 않는 것이 있어 아쉬웠다.
예를 들어 1973년 보고서의 도면에는 성벽 가운데에 생토면이 방형으로 돌출되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원 지형을 삭토한 것인지, 아니면 토축의 성심인지가 분명치 않다. 그러나 전제헌이 이 부분이 점질성이 강한 적색 점토가 아주 단단하게 다져져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성심일 가능성이 높을 듯 하다. 그 위의 ‘진흙 다짐한 층’은 적색 점토를 다진 층으로 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예에 의하면 30~50cm 안팎의 두께로 다져졌을 것이나주 052도면에는 판축 층위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또 그 위의 ‘돌과 진흙 다짐한 층’은 1입방m 내에 3~5cm 크기의 잔돌이 20~30% 비율로 함유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또한 일정 두께를 두고 다져졌을 것으로 여겨진다.주 053
이번에 확인한 결과 그중 ‘남서문 부근’(1973년 보고서, 그림 88)이 현재의 남서문 서벽으로부터 서쪽으로 29m 처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1973년의 보고서에는 폭 1m의 시굴 트렌치를 넣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2m 폭으로 절개하였음도 알게 되었다. 이외 1973년의 보고서 기술과 도면만으로는 제1단면 조사 지점의 축조 상태가 어떠하였는지, 성벽과 생토면과의 관계가 어떠하였는지가 분명치가 않은데, 이러한 의문점을 풀기 위해 전제헌으로부터 당시 발굴 정황에 대한 여러 가지 답변을 듣기는 하였으나, 판축 상태에 대한 약간의 정보 외에는 명확하게 풀리지 않는 것이 있어 아쉬웠다.
예를 들어 1973년 보고서의 도면에는 성벽 가운데에 생토면이 방형으로 돌출되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원 지형을 삭토한 것인지, 아니면 토축의 성심인지가 분명치 않다. 그러나 전제헌이 이 부분이 점질성이 강한 적색 점토가 아주 단단하게 다져져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성심일 가능성이 높을 듯 하다. 그 위의 ‘진흙 다짐한 층’은 적색 점토를 다진 층으로 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예에 의하면 30~50cm 안팎의 두께로 다져졌을 것이나주 052도면에는 판축 층위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또 그 위의 ‘돌과 진흙 다짐한 층’은 1입방m 내에 3~5cm 크기의 잔돌이 20~30% 비율로 함유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또한 일정 두께를 두고 다져졌을 것으로 여겨진다.주 053
● 남벽 제2단면 조사 지점 ●
남벽 제2단면 조사 지점은 남벽과 서벽 접합처로부터 동쪽으로 21.7m 처에 있다. 남벽 제1단면 조사 지점과 마찬가지로 2m 너비로 절개하였는데, 안학궁의 다른 성벽과 마찬가지로 성기석까지만 조사 되었다.
제1단면 조사 지점과는 여러 면에서 축조 상태가 다른데, 우선 별도의 성심을 마련하지 않고 생토를 파고 다져 수평면을 마련하였거나 또는 구 지표 위에 축토하였거나 또는 지면을 단순히 정지한 다음 그 위에 체성벽을 축조하였다. 제1단면 조사 지점 보다 석축이 강화되어 있는 것이 주목되는데, 바깥 쪽은 12단, 안 쪽은 5단이 들여쌓기로 축조되어 있다. 또한 성벽 바깥 쪽 성기석(석축 2단 높이)에는 석축의 밀림 방지를 위해 높이 50cm, 너비 80cm의 단면 반환형의 점토 다짐 턱이 있고 그 바깥 측으로 1.2m 가량의 범위에 길이 30~50cm 크기의 납작한 막돌이 한 벌 깔려져 있다.
두 지점 간의 차이는 성심의 유무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제2단면 조사 지점의 경우 평면에서 그대로 판축하여 토성을 축조한 까닭에 그만큼 성벽의 밀림과 쓸려내림이 강할 수 밖에 없고 그러하기에 이러한 현상을 방지할 목적으로 석축 및 부대 시설이 강화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보완적 조치는 판축 상태에서도 드러난다. 즉, 토성벽을 잘게 수평 판축하지 않고 성벽 바닥으로부터 최대 3.5m 높이까지를 길이 4~8cm 가량의 잔돌과 주먹돌이 30~40% 가량 포함되어 있는 적색점토를 반원상으로 다져 쌓고 그 위에 이를 기초로 적색점토를 수평 다짐하여 놓았다.
이외 토성 안쪽 벽의 경우 석축이 정지면 바로 위에 시설되어 있지 않는 대신, 잔돌과 점토 혼합 다짐층 위에 성기석이 놓여져 있고(석축 바닥면 위 1m 처), 5단 석축 상단부로부터 성심 쪽으로 2.3m까지가 4~5cm 크기의 잔자갈이 20% 가량 섞여 있는 점성이 강한 회색 점질토가 최고 두께 0.5m로 덧대어 다져져 있다. 물론 이러한 조치 또한 앞과 같은 원인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제2단면 조사 지점의 최하층이 성벽 안쪽으로 흘러 내린 양상을 보이고 있음과 동시에 그 1/3처 높이에 축석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혹 이 부분의 경우 2, 3차적으로 보축된 것이 아닐까 한다.
제1단면 조사 지점과는 여러 면에서 축조 상태가 다른데, 우선 별도의 성심을 마련하지 않고 생토를 파고 다져 수평면을 마련하였거나 또는 구 지표 위에 축토하였거나 또는 지면을 단순히 정지한 다음 그 위에 체성벽을 축조하였다. 제1단면 조사 지점 보다 석축이 강화되어 있는 것이 주목되는데, 바깥 쪽은 12단, 안 쪽은 5단이 들여쌓기로 축조되어 있다. 또한 성벽 바깥 쪽 성기석(석축 2단 높이)에는 석축의 밀림 방지를 위해 높이 50cm, 너비 80cm의 단면 반환형의 점토 다짐 턱이 있고 그 바깥 측으로 1.2m 가량의 범위에 길이 30~50cm 크기의 납작한 막돌이 한 벌 깔려져 있다.
두 지점 간의 차이는 성심의 유무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제2단면 조사 지점의 경우 평면에서 그대로 판축하여 토성을 축조한 까닭에 그만큼 성벽의 밀림과 쓸려내림이 강할 수 밖에 없고 그러하기에 이러한 현상을 방지할 목적으로 석축 및 부대 시설이 강화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보완적 조치는 판축 상태에서도 드러난다. 즉, 토성벽을 잘게 수평 판축하지 않고 성벽 바닥으로부터 최대 3.5m 높이까지를 길이 4~8cm 가량의 잔돌과 주먹돌이 30~40% 가량 포함되어 있는 적색점토를 반원상으로 다져 쌓고 그 위에 이를 기초로 적색점토를 수평 다짐하여 놓았다.
이외 토성 안쪽 벽의 경우 석축이 정지면 바로 위에 시설되어 있지 않는 대신, 잔돌과 점토 혼합 다짐층 위에 성기석이 놓여져 있고(석축 바닥면 위 1m 처), 5단 석축 상단부로부터 성심 쪽으로 2.3m까지가 4~5cm 크기의 잔자갈이 20% 가량 섞여 있는 점성이 강한 회색 점질토가 최고 두께 0.5m로 덧대어 다져져 있다. 물론 이러한 조치 또한 앞과 같은 원인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제2단면 조사 지점의 최하층이 성벽 안쪽으로 흘러 내린 양상을 보이고 있음과 동시에 그 1/3처 높이에 축석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혹 이 부분의 경우 2, 3차적으로 보축된 것이 아닐까 한다.
● 남중문 터 ●
남중문은 남벽 정중앙에 시설되어 있는 안학궁의 정문이다. 1973년의 보고서에 의하면, 길이 45.6m, 너비 18m의 문 터 위에 여덟 개 씩의 적심석 자리가 전후 3열 배열되어 있고, 각 열 간의 높낮이는 가운데 열이 첫 번째 열 보다는 30cm, 세 번째 열 보다는 10cm 높게 처리되어 있다.주 054각 열 간의 차이는 높낮이 외에 적심석 기초의 깊이에서도 나타나는데, 가운데 열은 1~1.2m인 반면 첫 번째 열은 1.2m, 세 번째 열은 1.4~1.7m 가량이다. 이와 같은 차이는 적심석 자리의 크기에서도 나타나는데, 가운데와 세 번째 열은 직경이 3.5m인 반면 첫 번째 열은 3.0m이다. 아뭏튼 기왕의 조사에 의하면 남중문은 가운데 칸이 측칸 보다 약간 넓은 정면 7칸에 측면 2칸의 누문으로 복원된다.
현재의 남중문 터는 북측의 발굴 당시보다 약간 변형된 상태인데, 남중문 터 가운데로 비포장 길(폭 3.4m)이 나있고 이 길로 인해 적심석 한 개 자리의 상부가 없어진 상태이다. 또한 1973년의 보고서에는 남중문에서 기둥 초석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 가운데 열 네 번째 자리에 (서벽 → 동벽) 직경 0.7m의 원형 기둥 초석이주 055하나 놓여져 있다. 또한 적심석 중 일부는 원래 발굴 당시와는 다른 모습으로 이동되어 있기도 하다. 북측 공동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중 원형 초석은 발굴 당시에는 없었던 것이나 나중에 남중문 부근에서 수습되었기에 전시를 위해 적심석 자리에 갖다 놓은 것이라 한다. 남중문에서 흘러나온 원래의 기둥 초석일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남중문의 지표에 적심석이 노출되어 있는 기둥 자리 가운데 비교적 원래의 상태에 가까울 것으로 여겨지는 것으로는 동벽을 기준으로 할 때 첫 번째 열 두 번째와 세 번째 적심석과 세 번째 열의 첫 번째 적심석이 있다.
이번 조사에서는 이를 순서대로 2006남중문1~3호 적심석으로 명명하였는데, 이들 역시 길이 15cm이내의 소형 돌은 나중에 이동되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2006남중문 1호는 길이 63cm, 너비 51cm와 길이 63cm, 너비 49cm 크기의 부정형 사암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에 길이 15~45cm, 너비 8.0~18cm 크기의 적심석 11개가, 2006남중문 2호는 길이 98cm, 너비 53cm의 대형 적심석을 중심으로 주변에 길이 15~45cm, 너비 9~39cm의 적심석 다섯 개가, 2006남중문 3호는 기둥 자리 중심부에 길이 52~83cm, 너비 35~60cm의 적심석 세 개가 노출되어 있다.
현재의 남중문 터는 북측의 발굴 당시보다 약간 변형된 상태인데, 남중문 터 가운데로 비포장 길(폭 3.4m)이 나있고 이 길로 인해 적심석 한 개 자리의 상부가 없어진 상태이다. 또한 1973년의 보고서에는 남중문에서 기둥 초석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 가운데 열 네 번째 자리에 (서벽 → 동벽) 직경 0.7m의 원형 기둥 초석이주 055하나 놓여져 있다. 또한 적심석 중 일부는 원래 발굴 당시와는 다른 모습으로 이동되어 있기도 하다. 북측 공동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중 원형 초석은 발굴 당시에는 없었던 것이나 나중에 남중문 부근에서 수습되었기에 전시를 위해 적심석 자리에 갖다 놓은 것이라 한다. 남중문에서 흘러나온 원래의 기둥 초석일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남중문의 지표에 적심석이 노출되어 있는 기둥 자리 가운데 비교적 원래의 상태에 가까울 것으로 여겨지는 것으로는 동벽을 기준으로 할 때 첫 번째 열 두 번째와 세 번째 적심석과 세 번째 열의 첫 번째 적심석이 있다.
이번 조사에서는 이를 순서대로 2006남중문1~3호 적심석으로 명명하였는데, 이들 역시 길이 15cm이내의 소형 돌은 나중에 이동되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2006남중문 1호는 길이 63cm, 너비 51cm와 길이 63cm, 너비 49cm 크기의 부정형 사암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에 길이 15~45cm, 너비 8.0~18cm 크기의 적심석 11개가, 2006남중문 2호는 길이 98cm, 너비 53cm의 대형 적심석을 중심으로 주변에 길이 15~45cm, 너비 9~39cm의 적심석 다섯 개가, 2006남중문 3호는 기둥 자리 중심부에 길이 52~83cm, 너비 35~60cm의 적심석 세 개가 노출되어 있다.
● 남서문 터 ●
남서문은 남중문 서쪽 90m에 위치하고 있다. 기왕에 조사된 바에 의하면, 길이 36m, 너비 18m의 문터에 일곱 개 씩 세줄의 적심석 자리가 있다. 적심석 자리의 크기는 첫째 줄이 3m, 가운데 줄이 2.6~3.0m, 세 번째 줄이 2.8~3.0m이고, 깊이는 첫째 줄이 1.2m, 가운데 줄과 셋째 줄이 0.8m이며, 첫째 줄이 있는 문터가 가운데 줄이 있는 문터 보다 20cm 낮다. 적심석 자리 간의 간격은 좌우 맨 끝이 4.55m인 것을 제외하고는 4.9m이다. 적심석의 배치 정형을 고려할 때, 남서문은 정면 6칸에 측면 2칸의 문루로 복원되는데, 세 개의 남문 중 규모가 가장 작다.
남서문의 양측 성벽 또한 기왕에 단면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에 의하면, 동벽은 지면을 다지거나 또는 평탄하게 정지한 다음 그 위에 사각추 꼴의 사암 석재를 3단 축석하고, 축석부 내부와 위에 황색 풍화암반 부식토를 0.3~0.9m 가량 비스듬하게 다진 후, 다시 그 위에 점성이 강한 황색 점토 및 잔돌이 20~30% 가량 섞여 있는 적색 점토를 각각 1m와 최고 1.9m 가량 다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외 성벽 바깥측에는 성기석의 밀림을 방지할 목적으로 성기석 바깥 측에 적색 점토를 28cm 높이로 편평하게 다져 놓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성벽 바깥 쪽으로 어느 정도 확장되어 있는지는 조사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위의 각 층위, 특히 황색 점토층은 현장에서 전제헌과 토의한 결과, 황색 점토층과 잔돌이 포함되어 있는 적색점토층이 7~9cm 간격으로 교대하여 판축되었고, 그 위의 적색점토층 또한 중간에 얇은 사질토층이 협재한 가운데 여러 층으로 판축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아마 이러한 판축 상황은, 도면과 보고서 기술에 반영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안학궁의 다른 성벽 또한 모두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서벽은 3단 축석부 내부와 위에 황색 점질토를 군데 군데 덩어리로 박아 놓은 적색 점질토층이, 그 위에 적색점토층이, 그 위에 흑색 점질토층이, 그 위에 잔돌이 20~30% 섞여 있는 적색 점질토층이 판축되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남서문의 양측 성벽 또한 기왕에 단면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에 의하면, 동벽은 지면을 다지거나 또는 평탄하게 정지한 다음 그 위에 사각추 꼴의 사암 석재를 3단 축석하고, 축석부 내부와 위에 황색 풍화암반 부식토를 0.3~0.9m 가량 비스듬하게 다진 후, 다시 그 위에 점성이 강한 황색 점토 및 잔돌이 20~30% 가량 섞여 있는 적색 점토를 각각 1m와 최고 1.9m 가량 다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외 성벽 바깥측에는 성기석의 밀림을 방지할 목적으로 성기석 바깥 측에 적색 점토를 28cm 높이로 편평하게 다져 놓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성벽 바깥 쪽으로 어느 정도 확장되어 있는지는 조사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위의 각 층위, 특히 황색 점토층은 현장에서 전제헌과 토의한 결과, 황색 점토층과 잔돌이 포함되어 있는 적색점토층이 7~9cm 간격으로 교대하여 판축되었고, 그 위의 적색점토층 또한 중간에 얇은 사질토층이 협재한 가운데 여러 층으로 판축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아마 이러한 판축 상황은, 도면과 보고서 기술에 반영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안학궁의 다른 성벽 또한 모두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서벽은 3단 축석부 내부와 위에 황색 점질토를 군데 군데 덩어리로 박아 놓은 적색 점질토층이, 그 위에 적색점토층이, 그 위에 흑색 점질토층이, 그 위에 잔돌이 20~30% 섞여 있는 적색 점질토층이 판축되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 남동문 터 ●
남동문은 남중문 동쪽 95m에 위치하고 있다. 기왕에 조사된 바에 의하면, 길이 46m, 너비 18m의 문터에 여덟 개 씩 세 줄의 적심석 자리가 있다. 적심석 자리의 크기는 첫째 줄이 3.5m, 가운데 줄과 세 번째 줄이 3m이고, 깊이는 첫째 줄이 1.2m, 가운데 줄과 셋째 줄이 1.2~1.5m이며, 문 터의 높이는 가운데 줄이 첫째 줄 보다 1m, 세 번째 줄이 가운데 줄 보다 0.1m 높다. 적심석 자리 간의 간격은 중심에 있는 것으로부터 옆으로 가면서 5.5m, 5m, 5(동쪽)~7m(서쪽), 5m이다. 적심석의 배치 정형을 고려할 때, 남서문은 정면 7칸에 측면 2칸의 문루로 복원되는데, 세 개의 남문 중 규모가 가장 크다.
남동문 또한 기왕에 문터 양측 성벽의 단면이 조사되었는데, 동벽은 성벽 안 측에 수직으로 9단의 석축이(윗쪽의 세 단은 들여쌓기), 바깥 측에 8단의 석축이 기울여 쌓아져 있고(아래 쪽의 두 단은 들여쌓기), 석축 내부에 석축 바닥 면과 같은 적색토가 채워져 있으며, 그 위에 잔돌이 포함되어 있는 적색점토가 다져져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주 058주목되는 것은 성벽 안측의 석축 최상단부에 높이 60cm, 두께 20cm 가량의 흑색점토가 수평으로 다져져 있다는 점과 석축부 상단의 성심부에 너비 3m의 축석부(전체 4단)가 시설되어 있다는 점이다. 판축부 하단의 석축부는 판축의 용이를 위한 성심의 기능을, 흑색점토층은 석축부를 고정시킴은 물론 판축의 용이를 위해 시설된 것으로 여겨진다.
서벽은 성벽 안측이 단면 조사되었는데,주 059사각추 꼴의 사암 석재를 다섯 단 들여쌓기하고 그 내부에 불명의 흙을 채운 다음 그 위에 약간 점성이 있는 사질토를 5cm 두께로 깐 후 그 위에 잔돌이 섞여 있는 적색점토가 다져져 있다. 주목할만한 것은 성벽 바깥 쪽이 아닌 안쪽에 성기석으로부터 위로 0.92m 높이까지 적색점토가 수평으로 단단히 다져져 있고 그 위에 적색 점질토가 성벽으로부터 수평 다짐된 적색점토층까지 비스듬하게 다져져 있다는 점이다. 이 두 층은 당연히 지표에 퇴적된 성벽 붕적층과는 성격이 다른 인위적인 것으로서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와 관련되는 것이다.
한편 1973년의 보고서에는 남동문 터로 농수로가 일부 적심석을 깨고 지나가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번 조사 결과 물길이 크게 바뀌어 남동문 동벽과 남동문 터 사이를 지나(북 → 남) 남동문 앞에서 서쪽으로 크게 꺽어져 남동문 서벽 앞 농수로로(너비 2.86m, 깊이 0.7m) 유입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농수로가 지나가는 자리는 남동문 적심석 첫 번째~세 번째 열의 동벽으로부터 두 번째와 세 번째 적심석이 있는 자리이므로 농수로 변경으로 인해 남동문 적심석 일부가 파괴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또한 남동문 서벽 단부가 3m가량 철거되고 그 자리에 작은 텃밭이 개간되고 있다. 이외 텃밭에(첫번째 적심석 자리 약간 위쪽 지점) 길이 70cm 가량의 판상석 1매가 노출되어 있다.
남동문 또한 기왕에 문터 양측 성벽의 단면이 조사되었는데, 동벽은 성벽 안 측에 수직으로 9단의 석축이(윗쪽의 세 단은 들여쌓기), 바깥 측에 8단의 석축이 기울여 쌓아져 있고(아래 쪽의 두 단은 들여쌓기), 석축 내부에 석축 바닥 면과 같은 적색토가 채워져 있으며, 그 위에 잔돌이 포함되어 있는 적색점토가 다져져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주 058주목되는 것은 성벽 안측의 석축 최상단부에 높이 60cm, 두께 20cm 가량의 흑색점토가 수평으로 다져져 있다는 점과 석축부 상단의 성심부에 너비 3m의 축석부(전체 4단)가 시설되어 있다는 점이다. 판축부 하단의 석축부는 판축의 용이를 위한 성심의 기능을, 흑색점토층은 석축부를 고정시킴은 물론 판축의 용이를 위해 시설된 것으로 여겨진다.
서벽은 성벽 안측이 단면 조사되었는데,주 059사각추 꼴의 사암 석재를 다섯 단 들여쌓기하고 그 내부에 불명의 흙을 채운 다음 그 위에 약간 점성이 있는 사질토를 5cm 두께로 깐 후 그 위에 잔돌이 섞여 있는 적색점토가 다져져 있다. 주목할만한 것은 성벽 바깥 쪽이 아닌 안쪽에 성기석으로부터 위로 0.92m 높이까지 적색점토가 수평으로 단단히 다져져 있고 그 위에 적색 점질토가 성벽으로부터 수평 다짐된 적색점토층까지 비스듬하게 다져져 있다는 점이다. 이 두 층은 당연히 지표에 퇴적된 성벽 붕적층과는 성격이 다른 인위적인 것으로서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와 관련되는 것이다.
한편 1973년의 보고서에는 남동문 터로 농수로가 일부 적심석을 깨고 지나가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번 조사 결과 물길이 크게 바뀌어 남동문 동벽과 남동문 터 사이를 지나(북 → 남) 남동문 앞에서 서쪽으로 크게 꺽어져 남동문 서벽 앞 농수로로(너비 2.86m, 깊이 0.7m) 유입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농수로가 지나가는 자리는 남동문 적심석 첫 번째~세 번째 열의 동벽으로부터 두 번째와 세 번째 적심석이 있는 자리이므로 농수로 변경으로 인해 남동문 적심석 일부가 파괴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또한 남동문 서벽 단부가 3m가량 철거되고 그 자리에 작은 텃밭이 개간되고 있다. 이외 텃밭에(첫번째 적심석 자리 약간 위쪽 지점) 길이 70cm 가량의 판상석 1매가 노출되어 있다.
● 수구문 터 ●
수구문 터는 남벽이 동벽과 접하는 지점으로부터 서쪽으로 92m에 위치하고 있다. 이번 공동 조사에서는 수구문의 현상을 확인하기만 하였을 뿐 별도의 조사 활동은 없었다.
1973년의 보고서에 의하면, 조사 당시 이미 수구문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구문 자리를 중심으로 남벽이 10m 정도 유실된 상태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대부분 메워져 폭 1m, 깊이 1.2m의 좁은 농수로로 변하여 있다. 성벽은 조사 당시에서 크게 변모되어 있지는 않다. 조사 당시 수구문은 성벽 바닥 정지면 보다 0.8m 아래에 바닥이 있었고, 길이 10m, 너비 2m, 높이 0.2m 가량의 규모가 잔존하였었다고 한다. 또한 수구문 바닥에는 길이 1.5m, 너비 1m, 두께 0.2m 안팎의 대형 판돌로 바닥을 깔았고 그 위에 2m 간격으로 장방상으로 거칠게 다듬은 돌을 쌓아 벽체를 만든 상태였다고 한다.
1973년의 보고서에 의하면, 조사 당시 이미 수구문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구문 자리를 중심으로 남벽이 10m 정도 유실된 상태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대부분 메워져 폭 1m, 깊이 1.2m의 좁은 농수로로 변하여 있다. 성벽은 조사 당시에서 크게 변모되어 있지는 않다. 조사 당시 수구문은 성벽 바닥 정지면 보다 0.8m 아래에 바닥이 있었고, 길이 10m, 너비 2m, 높이 0.2m 가량의 규모가 잔존하였었다고 한다. 또한 수구문 바닥에는 길이 1.5m, 너비 1m, 두께 0.2m 안팎의 대형 판돌로 바닥을 깔았고 그 위에 2m 간격으로 장방상으로 거칠게 다듬은 돌을 쌓아 벽체를 만든 상태였다고 한다.
- 각주 047)
- 각주 048)
- 각주 049)
- 각주 050)
- 각주 051)
- 각주 052)
- 각주 053)
- 각주 054)
- 각주 055)
- 각주 056)
- 각주 057)
- 각주 058)
- 각주 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