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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보는 독도

강원도 관찰사 이극돈이 무릉도를 수색한 바를 치계하다

  • 저필자
    장순순(전북대학교 교수)
  • 날짜
    1472년 6월 12일(음)
  • 출전
사료해설
5월 18일에 삼봉도 수색을 위해 4척의 배가 울진포(蔚珍浦)에서 출발하였다. 삼봉도 경차관 박종원(朴宗元)이 탄 배는 삼봉도를 찾지 못하고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멀리서 무릉도(武陵島;울릉도)를 바라보기만 하고 돌아왔다. 나머지 3척의 배는 무릉도에 도착하여 3일간 머물면서 섬 일대만을 조사하고 돌아와, 섬 가운데를 수색해보니 사람이 살지는 않고 옛 집터만이 있을 뿐이었다고 강원도 관찰사 이극돈(李克墩)을 통하여 보고하였다. 이에 성종은 삼봉도 수색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일년에 두 번 시도하기는 어렵다고 수색을 일시 중단시켰다. 세종대부터 실시된 울릉도민에 대한 쇄환정책으로 이 시기에 이르면 울릉도에는 백성들이 살지 않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조선 왕조가 동해에 있는 섬의 존재에 대해서 영토의식을 갖고 지속적으로 탐색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원문
○江原道觀察使李克墩馳啓曰: “三峯島敬差官朴宗元與所領軍士, 分乘四船, 去五月二十八日, 自蔚珍浦發去, 卽遇大風四散。 朴宗元之船, 東北去, 二十九日平明, 向東南, 望見武陵島, 可十五里, 復遇大風, 船纜絶, 漂流大洋中, 不知東西者七晝夜。 本月初六日午時, 到杆城郡淸簡津。 司直郭永江等三船, 去五月二十九日, 至武陵島, 留三日, 搜索島中, 不見居人, 只有舊家址而已。 島中有竹, 其大異常, 永江等取數竿載船, 發回, 本月初六日, 至江陵羽溪縣梧耳津。 今風氣漸高, 海波險惡, 更遣爲難。 放遣本道軍士, 京軍士分運上送, 何如?”
번역문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이극돈(李克墩)이 치계(馳啓)하기를,
“삼봉도 경차관(三峯島敬差官) 박종원(朴宗元)이 거느린 군사와 더불어 4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지난 5월 28일에 울진포(蔚珍浦)로부터 출발하여 가다가 곧 큰 바람을 만나서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박종원의 배는 동북쪽으로 가서, 29일 새벽[平明]에 동남쪽을 향하여 무릉도(武陵島)를 바라보니 15리(里) 쯤 되었는데 다시 큰 바람을 만나 닻줄[纜]이 끊어져서 대양(大洋) 가운데로 표류(漂流)하여 동서(東西)를 알지 못한 지 7주야(晝夜)가 되었다가 이달 초6일 오시(午時)에 간성군(杆城郡)의 청간진(淸簡津)에 이르렀습니다. 사직(司直) 곽영강(郭永江) 등의 세 배는 지난 5월 29일에 무릉도에 이르러 3일을 머물렀는데, 섬 가운데를 수색(搜索)하여 보니 사는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옛 집터만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섬 가운데 대[竹]가 있어 그 크기가 이상하였으므로 곽영강 등이 두어 개[數竿]를 베어 배에 싣고 돌아와, 이달 초6일에 강릉(江陵) 우계현(羽溪縣) 오이진(梧耳津)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바람 기운이 점점 높고 바다의 물결도 험악하여 다시 보내기가 어렵습니다. 본도의 군사와 서울의 군사를 놓아 보내는데, 운(運)을 나누어서 올려 보내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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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관찰사 이극돈이 무릉도를 수색한 바를 치계하다 자료번호 : sd.d_0149_0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