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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고구려의 하취문 등이 돌아가고 도화라인들도 돌아가기를 청함(『일본세기와』 『이길련박덕서』에서 전하는 백제의 멸망)

가을 7월 경자삭 을묘(16일)에 고구려의 사신 을상 하취문 등이 일을 마치고 돌아갔다. 또한 도화라인주 001
번역주 001)
제명천황 3년 7월조 覩貨邏國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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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두파사달아(乾豆波斯達阿;겐즈하시다치아)주 002
번역주 002)
乾豆波斯達阿는 乾豆는 인도, 波斯는 페르시아, 達阿는 인명에 붙는 어미로 ‘인도, 페르시아의 남자’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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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본토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송사를 청하며 “원컨대 이후에 다시 대국(大國)을 섬기려 합니다. 그래서 그 증표로 처를 머무르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수십 명과 서해로(西海路)주 003
번역주 003)
중국으로 가는 항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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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출항하였다[고구려 승려 도현(道顯;다우켄)주 004
번역주 004)
도현을 고구려의 승려라고 적고 있는 것은 이 기록뿐이다. 제명천황 7년 4월조, 천지즉위전기 12월조 분주 , 천지천황 원년 4월조에는 ‘釋道顯’ 즉, 승려 도현이라 기재되어 있다. 그의 도해나 사망 시기 등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中臣鎌足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천치천황 8년 10월조 분주에 인용된 『일본세기』에는 「日本世記曰, 內大臣, 春秋五十, 薨于私第. 遷殯於山南. 天何不淑, 不憖遺耆. 鳴呼哀哉. 碑曰, 春秋五十有六而薨.」이라고 적혀 있어 藤原家와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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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세기(日本世記) 주 005
번역주 005)
도현에 의해 기술된 편년체 역사서로 『日本書紀』 편찬 자료의 하나가 되었다. 사서의 전체 내용이나 권수, 성립 연대 등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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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7월에 운운. 춘추지(春秋智) 주 006
번역주 006)
春秋는 신라 태종무열왕(재위:654∼661)의 諱이다. 智는 경칭어미이다. 『日本書紀』 孝德天皇 大化 3년 시세조의 金春秋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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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대장군 소정방(蘇定方) 주 007
번역주 007)
당 太宗 때 李靖을 따라 東突厥을 정벌하였고, 657년에는 서돌궐을 쳐 항복시킴으로써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모두 安西都護府에 예속시켰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太宗 武烈王 6년(659)에 사신을 보내 군대를 청하자 唐 高宗이 다음해 3월 소정방을 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을 副大摠管으로 하여 左衛將軍 劉伯英 등 수륙 13만 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660년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으로서 당군을 거느리고 산동반도에서 황해를 건넜다. 이어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협공하여 泗沘城을 함락시키고 의자왕과 태자 隆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보냈다. 그 다음 해인 661년에는 나당 연합군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平壤城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철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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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도움을 얻어 백제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 혹은 백제는 자멸하였다. 왕의 대부인주 008
번역주 008)
『삼국사기』에는 왕비, 왕족 등의 호칭으로 널리 ‘夫人’이 사용되었다. 특히 신라본기에는 王妃들이 대부분 夫人을 칭하고 있다. 백제본기에는 왕비 관련 기사가 거의 보이지 않지만, 침류왕의 어머니 阿彌夫人, 전지왕의 부인 八須夫人의 예를 통해 보더라도 본조의 ‘大夫人’은 의자왕의 비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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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요사스럽고 무도하여 국정주 009
번역주 009)
원문은 國柄이다. 국가의 정사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후한서』 陳元傳에서는 「專操國柄以偷天下.」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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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좌우하고 현명하고 어진 신하를 주살주 010
번역주 010)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16년(656) 3월조에는 「王與宮人淫荒耽樂. 飮酒不止. 佐平成忠[或云淨忠]極諫. 王怒. 囚之獄中. 由是. 無敢言者. 成忠瘦死. 臨終.」이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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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초래하였다.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주 011
번역주 011)
백제 멸망의 주된 요인은 외적인 요인으로는 국제관계의 변화라는 새로운 시대상황 속에서 당이라는 외부 세력의 개입 및 이를 적절히 활용한 신라의 백제에 대한 공격, 내적인 요인으로는 의자왕의 전제적인 정치와 일반 귀족층의 결속에 문제가 발생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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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주주 012
번역주 012)
道顯이 단 註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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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신라의 춘추지가 내신주 013
번역주 013)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을 ‘내신’이라 칭한 예가 있고, 중국에서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신하를 ‘내신’이라 칭한 사례가 있다. 백제에서는 육좌평 가운데 하나를 ‘內臣佐平’이라 한다. 『日本書紀』에는 효덕즉위전기에 中臣鎌子連이 내신에 취임한 사례가 있다. 『日本書紀』 흠명천황 14년 8월조 內臣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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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금(蓋金) 주 014
번역주 014)
연개소문의 다른 이름이다. 『삼국사기』나 중국 사서에는 泉蓋蘇文이지만, 그의 아우 淨土를 『삼국사기』에는 淵淨土라 기재하고 있다. 원래 淵氏였는데, 당 고조 李淵과 이름이 같아서 避諱하여 泉씨로 고친 것이다. 『日本書紀』 황극천황 원년 2월조 伊梨柯須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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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자주 015
번역주 015)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원년조(642)에는 「新羅謀伐百濟. 遣金春秋乞師. 不從.」이라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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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주 016
번역주 016)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덕왕 2년조(648)와 동왕 3년(649) 정월조에는 김춘추가 당에 파견되어 태종을 만나 백제 토벌의 원군을 구한 내용과 신라의 관복제 변화에 관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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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국에서 사용하던 의관을 버리고 천자에게 아첨하여 이웃 나라에 화를 미치게 함으로써 그 뜻주 017
번역주 017)
원문은 義行이다. ‘意行’은 ‘心行’과 통한다. 『문선』 王簡棲 「頭陀寺碑文」에서는 「心行之表, 不生不滅者哉.」라고 적고 있고, 李善注에서는 「竺道生曰, 心行, 心所行之行也.」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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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이루었다. 이길련박덕서 주 018
번역주 018)
아래 내용은 제명천황 5년 7월조 博德書와 연결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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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경신년주 019
번역주 019)
경신년 8월은 제명천황 6년(660) 8월에 해당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660) 정월조에서는 백제 의자왕의 항복이 7월 18일이라 적고 있다. 따라서 당에 이 소식이 전해진 것은 적어도 8월 이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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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 백제가 평정되고 난 뒤인 9월 12일에 객인주 020
번역주 020)
일본인 사신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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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귀국을 허가하였다. 19일에 서경주 021
번역주 021)
중국의 長安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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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출발하였다. 10월 16일에 동경주 022
번역주 022)
중국의 洛陽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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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도착하여 비로소 아리마(阿利麻;아리마)주 023
번역주 023)
『日本書紀』 齊明天皇 5년 7월조 분주의 伊吉連博德書에는 東漢直阿利麻라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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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다섯 사람과 만날 수 있었다. 11월 1일에 장군 소정방 등에게 잡힌 백제의 왕주 024
번역주 024)
의자왕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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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태자 융(隆)주 025
번역주 025)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4년(644) 정월에 태자가 되었다. 백제가 멸망된 이후 당의 점령 정책에 동조하여 663년에는 백촌강 싸움에 당의 수군과 동행하였다. 665년에는 웅진도독으로 신라의 문무왕과 화의를 맹약했지만, 내부적인 문제로 당으로 돌아간 인물이다. 그의 묘비명이 낙양에서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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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여러 왕자 13명, 대좌평주 026
번역주 026)
대좌평은 백제의 6좌평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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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택천복(沙宅千福), 국변성(國辨成) 주 027
번역주 027)
沙宅氏, 國氏는 모두 백제 귀족의 성이다. 『日本書紀』 흠명천황 4년 12월조 沙宅己婁, 國雖多 참조. 「唐平百濟碑」에는 沙吒千福과 국변성은 모두 당에 연행된 인물이라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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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37명, 모두 50여 명주 028
번역주 028)
아래의 10월조 분주에도 50여 명이라 적혀 있다. 『舊唐書』 백제전에는 「五十八人等送京師.」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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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조정에 바쳤다. 곧 천자 앞에 끌려갔다. 천자는 은칙을 내리고 그 자리에서 풀어주었다. 19일에 노고를 치하하고 위로하였다. 24일에 동경을 출발하였다.].

  • 번역주 001)
    제명천황 3년 7월조 覩貨邏國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02)
    乾豆波斯達阿는 乾豆는 인도, 波斯는 페르시아, 達阿는 인명에 붙는 어미로 ‘인도, 페르시아의 남자’라는 의미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중국으로 가는 항로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도현을 고구려의 승려라고 적고 있는 것은 이 기록뿐이다. 제명천황 7년 4월조, 천지즉위전기 12월조 분주 , 천지천황 원년 4월조에는 ‘釋道顯’ 즉, 승려 도현이라 기재되어 있다. 그의 도해나 사망 시기 등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中臣鎌足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천치천황 8년 10월조 분주에 인용된 『일본세기』에는 「日本世記曰, 內大臣, 春秋五十, 薨于私第. 遷殯於山南. 天何不淑, 不憖遺耆. 鳴呼哀哉. 碑曰, 春秋五十有六而薨.」이라고 적혀 있어 藤原家와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도현에 의해 기술된 편년체 역사서로 『日本書紀』 편찬 자료의 하나가 되었다. 사서의 전체 내용이나 권수, 성립 연대 등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春秋는 신라 태종무열왕(재위:654∼661)의 諱이다. 智는 경칭어미이다. 『日本書紀』 孝德天皇 大化 3년 시세조의 金春秋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07)
    당 太宗 때 李靖을 따라 東突厥을 정벌하였고, 657년에는 서돌궐을 쳐 항복시킴으로써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모두 安西都護府에 예속시켰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太宗 武烈王 6년(659)에 사신을 보내 군대를 청하자 唐 高宗이 다음해 3월 소정방을 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을 副大摠管으로 하여 左衛將軍 劉伯英 등 수륙 13만 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660년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으로서 당군을 거느리고 산동반도에서 황해를 건넜다. 이어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협공하여 泗沘城을 함락시키고 의자왕과 태자 隆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보냈다. 그 다음 해인 661년에는 나당 연합군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平壤城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철군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삼국사기』에는 왕비, 왕족 등의 호칭으로 널리 ‘夫人’이 사용되었다. 특히 신라본기에는 王妃들이 대부분 夫人을 칭하고 있다. 백제본기에는 왕비 관련 기사가 거의 보이지 않지만, 침류왕의 어머니 阿彌夫人, 전지왕의 부인 八須夫人의 예를 통해 보더라도 본조의 ‘大夫人’은 의자왕의 비를 가리키는 용어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9)
    원문은 國柄이다. 국가의 정사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후한서』 陳元傳에서는 「專操國柄以偷天下.」라고 적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0)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16년(656) 3월조에는 「王與宮人淫荒耽樂. 飮酒不止. 佐平成忠[或云淨忠]極諫. 王怒. 囚之獄中. 由是. 無敢言者. 成忠瘦死. 臨終.」이라고 적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1)
    백제 멸망의 주된 요인은 외적인 요인으로는 국제관계의 변화라는 새로운 시대상황 속에서 당이라는 외부 세력의 개입 및 이를 적절히 활용한 신라의 백제에 대한 공격, 내적인 요인으로는 의자왕의 전제적인 정치와 일반 귀족층의 결속에 문제가 발생한 것 등을 들 수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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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을 ‘내신’이라 칭한 예가 있고, 중국에서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신하를 ‘내신’이라 칭한 사례가 있다. 백제에서는 육좌평 가운데 하나를 ‘內臣佐平’이라 한다. 『日本書紀』에는 효덕즉위전기에 中臣鎌子連이 내신에 취임한 사례가 있다. 『日本書紀』 흠명천황 14년 8월조 內臣 참조.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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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개소문의 다른 이름이다. 『삼국사기』나 중국 사서에는 泉蓋蘇文이지만, 그의 아우 淨土를 『삼국사기』에는 淵淨土라 기재하고 있다. 원래 淵氏였는데, 당 고조 李淵과 이름이 같아서 避諱하여 泉씨로 고친 것이다. 『日本書紀』 황극천황 원년 2월조 伊梨柯須彌 참조.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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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원년조(642)에는 「新羅謀伐百濟. 遣金春秋乞師. 不從.」이라 적혀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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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덕왕 2년조(648)와 동왕 3년(649) 정월조에는 김춘추가 당에 파견되어 태종을 만나 백제 토벌의 원군을 구한 내용과 신라의 관복제 변화에 관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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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은 義行이다. ‘意行’은 ‘心行’과 통한다. 『문선』 王簡棲 「頭陀寺碑文」에서는 「心行之表, 不生不滅者哉.」라고 적고 있고, 李善注에서는 「竺道生曰, 心行, 心所行之行也.」라고 적고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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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내용은 제명천황 5년 7월조 博德書와 연결된 내용이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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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신년 8월은 제명천황 6년(660) 8월에 해당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660) 정월조에서는 백제 의자왕의 항복이 7월 18일이라 적고 있다. 따라서 당에 이 소식이 전해진 것은 적어도 8월 이후이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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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本書紀』 齊明天皇 5년 7월조 분주의 伊吉連博德書에는 東漢直阿利麻라 되어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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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자왕을 가리킨다.바로가기
  • 번역주 025)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4년(644) 정월에 태자가 되었다. 백제가 멸망된 이후 당의 점령 정책에 동조하여 663년에는 백촌강 싸움에 당의 수군과 동행하였다. 665년에는 웅진도독으로 신라의 문무왕과 화의를 맹약했지만, 내부적인 문제로 당으로 돌아간 인물이다. 그의 묘비명이 낙양에서 출토되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6)
    대좌평은 백제의 6좌평 가운데 하나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27)
    沙宅氏, 國氏는 모두 백제 귀족의 성이다. 『日本書紀』 흠명천황 4년 12월조 沙宅己婁, 國雖多 참조. 「唐平百濟碑」에는 沙吒千福과 국변성은 모두 당에 연행된 인물이라 적혀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8)
    아래의 10월조 분주에도 50여 명이라 적혀 있다. 『舊唐書』 백제전에는 「五十八人等送京師.」라고 적혀 있다.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하취문, 건두파사달아, 도현, 춘추지(春秋智), 소정방(蘇定方), 춘추지, 개금(蓋金), 아리마, 소정방, 사택천복(沙宅千福), 국변성(國辨成)
서명
일본세기(日本世記), 이길련박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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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하취문 등이 돌아가고 도화라인들도 돌아가기를 청함(『일본세기와』 『이길련박덕서』에서 전하는 백제의 멸망) 자료번호 : ns.k_0040_0070_004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