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만(潳山蠻), 무만(巫蠻), 강하만(江夏蠻)이 반란을 일으켜 토벌함
건무(建武) 23년(47, 後漢
光武帝) 남군 도산만(潳山蠻) 뇌천(雷遷) 등이 처음으로 반란을 일으켜 백성들을 노략질하자, 무위장군(武威將軍)주 001
각주 001)
유상(劉尙)을 파견하여 만여 명을 이끌고 토벌하였는데, 그 종족 7천여 구(口)를 강하군(江夏郡)
주 002안으로 이주시켰으니, 지금의 면중만(沔中蠻)이 이들이다. 화제(和帝)
주 003영원(永元) 13년(101) 무만(巫蠻),주 004
허성(許聖) 등이 군에서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것이 공평하지 못한 것에 원한을 품고 마침내 함께 모여 반란을 일으켰다.주 005이듬해 여름 사자를 보내 형주(荊州) 여러 군의 병사 만여 명을 도독하여 토벌하였다. 허성 등은 깊고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격파하지 못하였다. 여러 부대가 길을 나누어 동시에 진격하였는데, 일부가 파군(巴郡)과 어복(魚復)
주 006에서 여러 길을 통하여 공격하니 만들이 흩어져 도망갔다. 그 거수(渠帥)들을 참수하고 계속해서 추격하여 허성 등을 대파하였다. 허성 등이 항복을 청하자 모두 사면하여 강하군(江夏郡)으로 이주시켰다. 영제(靈帝) 건녕(建寧) 2년(169) 강하만(江夏蠻)이 반란을 일으키자 주군(州郡)에서 토벌하여 평정하였다.주 007광화(光和) 3년(180) 강하만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여강주 008적(廬江賊) 황양(黃穰)과 함께 서로 연합하여 10여만 명이 네 개의 현을 공격하여 장악하니, 노략질의 우환이 수년 계속되었다. 여강 태수 육강(陸康)
주 009武威將軍: 『後漢書志』 권24 「百官」1에 따르면 將軍은 원래 상설직이 아니다. 정벌과 반란의 평정을 담당하는데, 三公에 해당하는 4개의 장군 직위가 있다. 大將軍, 驃騎將軍, 車騎將軍, 衛將軍이 그것이며, 이외에 또한 前, 後, 左, 右의 將軍이 있다. 『後漢書』 李賢注에서 인용한 蔡質의 『漢儀』에 따르면 大將軍과 驃騎將軍은 그 지위가 승상과 같고 車騎와 衛將軍, 前, 後, 左, 右의 將軍은 모두 붉은 끈이 달린 금인을 쓰며 그 지위는 上卿에 해당한다(『後漢書志』 권24, 「百官」1 將軍條). 그러나 군사활동의 증가에 따라 이들 將軍職도 상설화되면서 새로운 칭호의 장군이 나타난다. 後漢代 武威將軍은 劉尙 외에 光武帝시에 郭守, 三國魏시기 公孫度가 있다.
각주 009)
이 토벌하여 격파하니, 나머지는 모두 항복하거나 해산하였다.陸康: 『後漢書』 卷31 「陸康傳」에 따르면 陸康은 吳郡 五縣 사람이다. 어려서 군의 관리로 관직을 시작하였는데, 의로움과 정렬함으로 널리 이름이 났다. 고성현령이 되고 나서 이전부터 존재하던 번다한 폐단을 없애고 은혜와 신의로써 정치를 하여 도적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武陵太守, 桂陽太守 등을 거쳤는데, 임용되는 곳마다 칭송을 받았다. 당시 영제가 동인을 주조하기 위해 민전에서 거두는 세금을 늘리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면직당하여 낙향하였다. 그러나 뒤에 다시 의랑에 임명되었다. 마침 廬江의 도적이 江夏의 蠻夷와 연계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그를 廬江太守에 임명하여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陸康은 상벌을 분명하게 행사하고 적을 쳐부수니 나머지 무리는 모두 항복하였다. 황제가 그 공을 가상하게 여겨 육강의 손자를 낭중에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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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武威將軍: 『後漢書志』 권24 「百官」1에 따르면 將軍은 원래 상설직이 아니다. 정벌과 반란의 평정을 담당하는데, 三公에 해당하는 4개의 장군 직위가 있다. 大將軍, 驃騎將軍, 車騎將軍, 衛將軍이 그것이며, 이외에 또한 前, 後, 左, 右의 將軍이 있다. 『後漢書』 李賢注에서 인용한 蔡質의 『漢儀』에 따르면 大將軍과 驃騎將軍은 그 지위가 승상과 같고 車騎와 衛將軍, 前, 後, 左, 右의 將軍은 모두 붉은 끈이 달린 금인을 쓰며 그 지위는 上卿에 해당한다(『後漢書志』 권24, 「百官」1 將軍條). 그러나 군사활동의 증가에 따라 이들 將軍職도 상설화되면서 새로운 칭호의 장군이 나타난다. 後漢代 武威將軍은 劉尙 외에 光武帝시에 郭守, 三國魏시기 公孫度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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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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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9)
陸康: 『後漢書』 卷31 「陸康傳」에 따르면 陸康은 吳郡 五縣 사람이다. 어려서 군의 관리로 관직을 시작하였는데, 의로움과 정렬함으로 널리 이름이 났다. 고성현령이 되고 나서 이전부터 존재하던 번다한 폐단을 없애고 은혜와 신의로써 정치를 하여 도적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武陵太守, 桂陽太守 등을 거쳤는데, 임용되는 곳마다 칭송을 받았다. 당시 영제가 동인을 주조하기 위해 민전에서 거두는 세금을 늘리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면직당하여 낙향하였다. 그러나 뒤에 다시 의랑에 임명되었다. 마침 廬江의 도적이 江夏의 蠻夷와 연계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그를 廬江太守에 임명하여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陸康은 상벌을 분명하게 행사하고 적을 쳐부수니 나머지 무리는 모두 항복하였다. 황제가 그 공을 가상하게 여겨 육강의 손자를 낭중에 임명하였다.
색인어
- 이름
- 光武帝, 뇌천(雷遷), 유상(劉尙), 화제(和帝), 허성(許聖), 허성, 허성, 허성, 영제(靈帝), 황양(黃穰), 육강(陸康)
- 지명
- 後漢, 남군, 강하군(江夏郡), 형주(荊州), 파군(巴郡), 어복(魚復), 강하군(江夏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