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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국(夫餘國)의 성립과 풍속

부여국주 001
번역주 001)
夫餘國 : 夫餘라고 하지 않고 夫餘國으로 표시한 것은 『후한서』의 體例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부여는 고조선과 더불어 한국고대사의 시원을 이루는 나라이며, 고구려와 백제의 기원이 되는 국가인 동시에 옥저·동예와 함께 예맥족의 국가로서 한국 역사상 의미가 크다(이기동, 2005). 여기서 부여는 北夫餘를 가리키는데, 북부여는 한국사에서 고조선 다음으로 등장하는 국가로 중국 문헌에는 夫餘, 국내 문헌에는 扶餘로 표기되고 있다. 夫餘란 명칭은 ① 평야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로 보는 설(최남선, 1927 ; 1973), ② 사슴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설(白鳥庫吉, 1970) 등이 있다. 현재 그 어원의 정확한 추정은 어려우나 평야를 의미하는 夫里 등과 같은 의미로 보는 설(이병도, 1976)이 지배적이다.
부여는 기원전 3세기 후반경부터 494년까지 북만주 지역에 있었다. 부여는 이미 先秦 시대부터 고조선과 더불어 중국에 알려질 정도의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늦어도 1세기 초의 후한대에는 왕호를 쓰는 연맹왕국으로 성장하였다고 보인다(이기백·이기동, 1982). 晉代의 부여는 고구려와 魏晉 시기에 이르러 크게 성장한 鮮卑 慕容氏의 침입을 받아 영역의 변동이 있었다. 즉 4세기 말 慕容皝의 침입으로 북부여가 멸망하고, 〈모두루묘지〉에 보이는 바와 같이 그 영역은 고구려에 통합된 것으로 보이며, 3세기경 모용씨의 침입을 받아 동쪽으로 이동하였던 부여족의 일파가 건국한 동부여만 고구려의 보호 속에 5세기까지 존속하였다. 그 후 문자왕 때에 이르러 勿吉의 흥기로 인해 그 왕족이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만주 지역의 부여는 소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측 기록인 『논형(論衡)』과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에는 시조 동명이 북에서부터 이주해 와서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주몽의 출신지를 북부여로 본 기록은 5세기대에 쓰인 〈광개토왕릉비〉와 〈모두루묘지〉이다.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부여전에 의하면 [북]부여의 위치는 서로는 오환·선비와 접하고, 동으로는 읍루와 잇닿아 있고, 남으로는 고구려와 이웃하고, 서남으로는 요동의 중국 세력과 연결된 것으로 나온다. 부여의 선주문화는 기원전 7~기원전 3세기로 비정되는 청동기문화인 西團山문화와 관련이 있다. 그들 중 일부 족단이 제2 송화강 중류로 남하하여 길림성을 중심으로 서단산문화를 일군 부여 선주민을 융합하여 부족국가 부여를 세웠는데, 대략 기원전 3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된다. 부여의 중심지인 왕성의 위치는 『자치통감』의 기록에 의거하여 전·후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에 대해 ① 현재 중국 흑룡강성의 農安·長春 지역설(池內宏, 1932 ; 1951 ; 日野開三郞, 1946 ; 李基白·李基東, 1984), ② 阿勒楚喀(阿城) 일대설(池內宏, 1932), ③ 吉林市 지역설(李建才, 1982 ; 武國勛, 1983 ; 李殿福, 1985 ; 노태돈, 1989 ; 송호정, 2015) 등이 있다. 이처럼 전기 부여의 왕성 소재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최근에는 길림시에서 東團山·南城子古城·帽兒山고분군 등이 잇달아 확인되어 이를 고고학적인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에 길림시를 중심으로 한 松嫩평원 일대로 보는 ③설이 지지를 얻고 있다. 현재의 동단산을 鹿山, 남성자고성을 궁성·濊城, 帽兒山고분군을 國南山(『삼국지』 권30, 부여전)으로 비정하는 견해(武國勛, 1983 ; 張立明, 1988 ; 馬德謙, 1995)가 있으나, 동단산이 너무 작고 협소하며 강가에 고립되어 있다는 한계 때문에 남산을 주변 어디에서든지 잘 바라볼 수 있는 동단산으로, 부여의 왕성은 북쪽의 龍潭山 일대로 비정하는 것이 비교적 합리적이다(이종수, 2003). 그 후 346년 부여는 백제로 표현된 세력에 의해 서쪽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자치통감』 기록이 있다. 이때 부여의 왕성에 대하여 ① 현재 農安 부근설(池內宏, 1932 ; 李建才, 1982 ; 노태돈, 1989), ② 西豊縣 城山子山城說(王綿厚, 1990 ; 송호정, 1997) 등이 있다. 그러나 부여가 백제가 아닌 고구려에 의해 쫓겨갔다고 한다면 서풍 부근설(②)은 후보지에서 제외해야 한다. 농안 부근설(①)의 경우 발해 부여부가 후기 부여의 도성지에 설치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가장 설득력이 있는 후보지일 것이다.
사료에 보이는 북부여·부여·동부여에 대해 다양하고 복잡한 견해가 있지만 대략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부여와 북부여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동부여는 별개로 보는 견해(池內宏, 1932 ; 日野開三郞, 1946 ; 田耘, 1987 ; 노태돈, 1989)이다. 둘째, 부여와 북부여를 별개로 보는 견해(張博泉, 1981 ; 干志耿, 1984 ; 김병룡, 1991)이다. 여기에는 동부여를 포함하여 3개의 실체로 보기도 하지만, 동부여를 부여나 북부여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장박천은 4개의 부여를 상정하고 있으며, 이도학은 원부여가 소멸하고 새로 들어선 국가로 본다는 점에서 부여와 북부여를 구분하였다(이도학, 1991). 셋째, 3개의 부여를 모두 동일한 실체로 파악하는 견해(金毓黻, 1940 ; 李建才, 1982)이다. 이는 북부여와 동부여가 기록한 예가 많지 않은 중국 문헌과 이의 존재가 초기부터 등장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사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해석하느냐가 관건이 된다.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건국설화를 분석해볼 때 북부여는 졸본부여를 의식하여 붙여진 것이고, 북부여와 부여는 동일한 실체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송기호, 2005). 동부여에 대해서는 주몽의 북부여출자설과는 달리 『구삼국사』와 『삼국유사』(권1 기이편 북부여)에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동부여는 천제의 아들임을 칭한 解慕漱가 기원전 59년에 해부루를 쫓아내고 동쪽으로 옮겨 세운 나라로 나온다. 그런데 부여가 285년 모용선비의 공격을 받아 타격을 받자 그 지배집단 일부가 북옥저 방면에 피난을 하였다가 3세기 말~4세기 초에 두만강 유역에서 동부여라는 독자적인 국가를 세웠다. 이런 견해와 달리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5년조에 나오는 曷思國을 東扶餘로 보는 설(노중국, 1983)도 있다. 동부여는 고구려를 기준으로 하여 그 동쪽에 위치한 국명이고, 반면 길림 방면의 부여는 북부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광개토왕릉비〉에 의하면 동부여는 추모왕의 屬民이었는데, 중간에 조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광개토왕 20년에 고구려에 의해 정벌되었다고 한다. 동부여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團結-크로우노프카문화(두만강 하류, 목량하·수분하 유역 및 연해주 남부 등지에 분포한 북옥저문화)를 남긴 두만강 유역의 북옥저 지방이 가장 유력하게 제기되어왔고(노태돈, 1989), 그다음으로 함경남도~강원도 북부 일대(이병도, 1976)가 많이 언급되어 왔다. 전자는 동부여 건국설화에 나오는 도읍지 迦葉原에 주목하거나 또는 〈광개토왕릉비〉에 味仇婁를 북옥저의 置溝婁(『삼국지』 권30, 동옥저전)나 買溝(『삼국지』 권28, 관구검전)로 비정하는 것을 근거를 삼고 있다(李强, 1986 ; 노태돈, 1999 ; 공석구, 1990). 이와 함께 285년 모용외의 침입 때 부여의 유민이 [북]옥저에 피난하여 동부여를 건설한 것으로 추정한다. 전자가 아직까지는 가장 유력한 견해이지만 나름대로의 문제도 있다. 즉 이 사건 이후 옥저에 관한 기록이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은 것도 그 주장의 방증이 된다. 이 경우 북옥저가 멸망하고 동부여가 들어선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으며, 또한 이를 뒷받침해주는 고고학적인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반면 후자의 후보지는 부여에서 파생되어 나오기에는 너무 동떨어진 곳이고, 이 일대가 동예와 남옥저의 본거지로서 일찍부터 고구려에 신속되어 있어서 이곳에 새로운 국가가 들어설 여지가 별로 없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최근에는 부여의 동북쪽에 위치한 읍루 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송기호, 2005)도 제기되었다. 한편 주몽의 북부여출자설이 정립된 시기를 고구려 초기의 왕계 정립과 함께 4세기 후반으로 보고, 반면 동부여출자설은 6세기 중반 이후 양원왕 즉위 과정에서 승리한 집권세력에 의해 제기되어 600년경 『신집(新集)』 편찬 단계에서 공식화된 것으로 보는 견해(노태돈, 1999)가 있다. 이때 주몽의 북부여출자설이 동부여출자설로 변개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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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현도[군]주 002
번역주 002)
玄菟 : 현도군은 전한의 무제가 기원전 107년에 세운 한 군현 중 하나이다. 이때의 현도군은 만주의 撫順 지역에 옮겨진 제3차 현도군을 가리킨다. 『진서』 지리지에 의하면 당시의 현도군은 3개의 현에 3, 200호였다. 현도군은 본래 예맥의 땅으로 기원전 128년에 滄海郡이 설치되었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예맥의 군장인 南閭가 28만 호의 무리를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하였는데, 한나라는 그 지역에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 군을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철폐되었다. 기원전 108년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 기원전 107년에 현도군이 설치되었다. 기원전 82년에 임둔군과 진번군이 폐지되자 임둔군의 소속 현들이 현도군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토착민의 저항이 계속되자 현도군도 기원전 75년에 서북쪽으로 옮겨가면서 현도군의 본래 소속 현들과 옛 임둔군 소속 현들 대부분이 폐지되었다. 渾河 상류의 興京 일대로 치소를 옮긴 현도군은 3개 현을 관할하였는데, 치소는 高句麗縣이었다. 1세기 무렵부터 고구려가 성장하면서 현도군을 압박하였고, 현도군은 다시 撫順 勞動公園古城으로 이치되었다(孫進己·馮永謙, 1989). 이때 요동군에 속한 4개 현을 편입하여 일시적으로 군세를 확장하기도 했다. 이후 공손씨의 지배하에서 고구려의 공격을 받는 한편 서진 말기의 혼란 속에 선비족 모용부의 지배를 받으면서 현도군은 세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5세기 초에 현도군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요동군과 함께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那珂通世, 1894 ; 이병도, 1930 ;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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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북쪽 천여 리 밖에 있는데, 남쪽은 선비주 003
번역주 003)
鮮卑 : 남만주과 몽골 지방에서 거주한 튀르크족과 몽골족의 혼혈 유목민족으로 東胡의 한 갈래이다. 처음에는 鮮卑山 부근에 모여 살아 ‘鮮卑’라고 불렀으나 후에 呼倫池 부근으로 이동하였고, 다시 陰山 일대로 이동하여 다른 종족과 접촉하였다. 흉노족이 세력을 잃은 후 내몽골 지방에서 일어났으며 위진남북조시대에는 남하하여 중국에 北魏 등의 나라를 세웠다. 선비족은 흉노· 돌궐·말갈과는 태생의 기반이 조금 다르고, 같은 선비족이라고 하더라도 부족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전한의 무제가 衛靑을 보내 흉노의 허타오[河套] 지역을 빼앗고(기원전 127년), 이곳에 朔方郡과 五原郡을 설치하였다. 이 시기에 선비족은 내몽골 동부 지역을 점령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는데, 그 북쪽 일파는 東胡이고 남쪽 일파는 烏桓(또는 烏丸)이다. 언어학적으로는 몽골어 계통이라는 설이 강하지만 튀르크계·몽골계·퉁구스계와의 혼혈이라는 설도 있다. 선비족의 흥성은 1세기 흉노족의 몰락과 때를 같이한다. 선비족은 기원전 시기에는 대흥안령산맥 기슭에서 목축·수렵을 생업으로 하는 흉노에 복속했었다. 그 후 흉노가 북과 남으로 분열하자 선비족은 힘을 모아 북흉노를 몽골고원 서쪽으로 내쫓았다. 선비는 2~3세기경 壇石槐와 軻比能이 부족의 통합에 성공하면서 한때 세력이 강대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235년 가비능이 자객에게 살해된 후 선비는 다시 분열되었고, 후에 황하 유역으로 이주하였다. 한나라가 멸망하고 삼국시대가 시작되자, 이때부터 유목민족이 남하하여 한족과 통합되는 과정을 밟았다. 흉노의 지배를 받았던 갈족, 말갈족은 하북성, 산동성 등지로 남하했다. 이를 입증하는 자료로 산동 지역에 있었던 위나라 관구검의 휘하 부대는 말갈족, 갈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관구검은 이들 부대를 이끌고 고구려의 수도를 함락시킨 바 있다. 선비족은 후한이 망하고 西晉의 일부 황족들이 8왕의 난을 일으키자 용병으로 점차 화북 지방에 이주하게 되었다. 5호16국시대에 들어서자 흉노의 劉淵이 서진으로부터 독립하여 前趙를 세우자 선비족도 이를 따라 나라를 세웠다. 이때 선비족 중 여섯 부족이 가장 세력을 떨쳤다. 拓跋部[代, 北魏], 慕容部[前燕, 後燕, 西燕, 南燕], 段部, 宇文部[北周], 乞伏部[西秦], 禿髪部[南涼]의 6개 부족이 각기 나라를 세운 것이다. 6개의 부족 중 선비족의 정체성이 강한 부족은 탁발부·모용부이고, 단부·우문부는 오환족에 가깝다. 걸복부·독발부는 본래 선비족에서 나왔다고 하며, 남량이 망하자 북위에 귀속되었다. 이외에 모용부로부터 나와 서쪽으로 옮겨간 吐谷渾도 선비계인데 현지의 羌人과도 융합되었다. 탁발부가 세운 북위가 439년에 화북을 통일하면서 남북조시대가 되었다. 그 후 隋를 세운 楊堅이나 唐을 세운 李淵이 선비족 출신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는 선비족이 점차 한족과 동화된 사실을 보여준다(이상 『후한서』 권80, 鮮卑傳 ; 『진서』 권108, 載記 慕容廆 ; 『위서』 권1, 序紀 ; 이용범, 1975 ; 內田吟風, 1975 ; 지배선, 1986 참조).
한국 고대문화 요소 중 관모, 청동그릇인 동복과 동완 등 금속공예품, 그리고 마구류 등에서 선비계 문화요소가 나타나고 있다. 관모 중 걸으면 흔들리는 산 모양의 步搖冠은 3세기 말부터 4세기 전반에 걸쳐 모용선비 무덤에서 집중 출토되며, 주로 전연·후연· 북연 소위 三燕의 도읍지였던 중국 朝陽 지역에서 발견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 특히 北燕의 황제 馮跋의 동생 馮素弗(415년 사망) 무덤에서는 북조 전통의 보요관과 남조 전통의 매미 모양 金蟬文璫이 결합한 문양이 출토된 바 있다. 이러한 양식은 고구려의 소골관, 석촌동고분 출토 금제보요(4점), 공주 수촌리1, 4호분, 서산 부장리5호분, 고흥 안동 길두리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무령왕과 왕비의 관식, 신라 황남대총 남분의 은관 입식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선비족의 관식이 삼국시대 관식에 영향을 준 사례라 할 수 있다(강현숙, 2003 ; 권오영, 2006 ; 이송란, 2011). 고구려와 백제의 마구문화도 모용선비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구 중 기초장비인 비(轡)가 동래 복천동38호분 및 69호분, 김해 대성동2호분, 천안 두정동5호 토광묘, 오창 송대리유적, 청주 신봉동92-84호분 및 92-19호분 등에서 출토되었는데, 선비-고구려를 잇는 북방 기마문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성정용, 2000 ; 이상률, 2001). 또한 경주 황남동98호분 남분, 대구 달성37호분, 동래 복천동10호분 등에서 출토된 등자는 중국 하남성 안양시 효민둔묘나 요령성 朝陽 원대자벽화묘, 집안 칠성산96호분 등과 관련이 있는데, 이 역시 선비-고구려를 잇는 기마문화의 소산이다(장윤정, 1999). 그 밖에 다소 논란이 있지만 김해 대성동29호 등에서 출토된 청동솥[동복]과 대야[동분], 그리고 둥근그릇[동완] 등은 요령성 조양 원대자벽화묘, 북표 라마동무덤, 안양 효민둔154호분 등에서 나온 것과 거의 같다. 이러한 금속공예품들도 모용선비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선비족 가운데 요서 지역의 민족은 당나라 후기에는 거란국을 세우고 얼마 후 요로 국명을 바꿨다. 이때 그 휘하에 있던 말갈족, 갈족 일부가 동만주로 이동했다. 말갈족·선비족·타타르 혼합 민족인 여진이 거란을 정벌하고, 거란인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그 주위에 여진인을 배치하여 거란, 여진의 민족 통합이 이루어졌다. 요서 선비족에서 거란족을 거쳐 탄생한 여진족은 금나라 멸망 이후 해서여진, 야인여진, 건주여진으로 나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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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주 004
번역주 004)
弱水 : 『사기』 대완전에 의하면 “천하에서 가장 약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곤륜의 약수이며, 기러기의 털조차 띄우지 못할 정도이다.”라고 해서 약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중국에서 약수는 신선사상에 의해 윤색되어 전설로 전해오고 있는데 여러 곳을 지칭하고 있다. 중국인은 東王父가 살고 있다는 扶桑이라는 낙원이 있고, 해가 뜨는 서쪽 끝에는 약수를 건너 西王母가 신선향인 崑崙山 정상에서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① 서왕모가 사는 곤륜산에서 발원하는 강의 이름이라 하였고(『사기』 대완전), ② 감숙성 에티나강에서 타클라마칸까지 흐르는 강의 이름을 지칭하기도 하며(『서경』 禹貢), ③ 만주 지역에서는 송화강 유역의 길림에서부터 본류에 합류하는 混同江을 지칭하는 경우가 있다. ④ 요령성과 내몽골 동부 지역에 흐르는 西拉木倫이나(김유철·하원수, 2009), 하북성 平泉縣 七老圖山脈의 光頭山에서 발원한 老哈河로 보는 견해(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소 편, 『대동문화연구』 13, 1979의 종합토론 참고)가 있다. 분명치는 않으나 부여의 북쪽이라 하였기 때문에 흑룡강(아무르강)보다는 대체로 송화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전해종, 1993 ; 田中俊明,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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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다.주 005
번역주 005)
玄菟北千餘里 … 北有弱水 : 3세기경 부여는 서쪽으로 송화강~요하 분수령 일대에서 선비, 남쪽으로 輝發河 일대에서 고구려, 동쪽으로 長廣才嶺을 경계로 읍루 등과 접하고, 북쪽으로 송화강과 눈강(嫩江) 일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송호정,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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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땅은 사방 2,000리이고, 호수는 8만이다. 성읍과 궁실이 있으며, 토질은 오곡 주 006
번역주 006)
五穀 : 오곡은 5종류의 곡물을 말하지만 지역과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① 麻·黍·稷·麥·豆(『周禮』 天官, 疾医), ② 黍·稷·麻·麥·菽(『大戴禮』 曾子天圓), ③ 稻·稷·麥·豆·麻(『楚辭』 大招), ④ 黍·稷·菽·麥·稻(『周禮』 夏官 職方氏), ⑤ 粳米·小豆·麥·大豆·黃黍(『素問』 藏氣法時論), ⑥ 稻穀·大麥·小麥·菉豆·白芥子(『成就妙法蓮華經』 主瑜伽觀智儀軌), ⑦ 大麥·小麥·稻穀·小豆·胡麻(『建立曼多羅護摩儀軌』)의 여러 견해(井上秀雄 外 譯注, 1977)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쌀·보리· 콩·조·기장을 오곡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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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라기에] 적당하다.
그 나라 사람은 굳세고 용감하며, 회동하거나 읍하고 사양하는 예절주 007
번역주 007)
揖讓 : 손님과 주인이 상견하는 예로 두 손을 마주 잡고 겸손한 뜻을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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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중국과 비슷하다. [그 나라에서] 사신으로 갈 때에는 비단이나 모직물로 만든 옷을 입고, 허리에는 금이나 은으로 [만든 장신구로] 장식한다.
그 나라의 법률에는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그 집 [사람]을 몰수해서 [노비로 삼고], 도둑질을 한 사람은 [도둑질한 물건의] 12배를 갚도록 하였다.주 008
번역주 008)
盜者一責十二 : 절도 시 12배 배상 규정은 『태평어람』에 인용된 『위략』 고구려전 逸文에 보듯이 고구려에서도 시행되었다. 고구려는 『주서』 고려전에 의하면 6세기 중후반 절도죄에 대해 10배의 배상 규정을 시행하여 형량을 조금 낮추었다. 이 시대에는 살인·상해·절도·간음·투기의 다섯 죄목에 대한 금법이 공통적으로 존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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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음란한 짓을 하거나 부인이 질투하면 모두 사형에 처한다.
혹 전쟁이 있게 되면 소를 잡아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주 009
번역주 009)
殺牛祭天 : 소를 잡아 제사지내는 殺牛 신앙은 ① 가뭄 때 비오기를 기도하는[祈雨] 경우, ② 전쟁이 일어날 경우 길흉을 점칠 때, ③ 독기를 예방하기 위해 흰소·흰돼지·양 등을 잡아 제사를 지내는 경우(『북사』 권95 진랍), ④ 〈영일냉수리신라비〉와 〈울진봉평신라비〉에 보이는 것처럼 귀족회의에서 결정사항을 집행하면서 소를 죽여 제의를 지내는 경우에 각각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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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의] 발굽으로 길흉을 점친다. [소의] 발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합해지면 길하다고 여겼다.주 010
번역주 010)
以其蹄占吉凶 … 合者爲吉 : 이러한 점복을 牛蹄占卜이라고 한다. 우리 고대사회에서는 국가적 중대사를 앞두고 점을 쳐서 길흉을 판단하는 점복문화가 성행하였다. 특히 국가 간에 맹약을 맺는 회맹의식과 전쟁에 출전하는 것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사였다. 이를 결정할 때 동물의 희생례로써 이러한 중대사를 치러 신에게 誓願하는 의식을 가졌던 것이다(송화섭, 2006). 이러한 점복 행위는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부여·예·왜전 등에 나오는 북방민족의 전통민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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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으면 산 사람을 [죽은 자와 함께] 순장을 하며, [그 묘에는] 곽주 011
번역주 011)
‘椁’은 ‘槨’과 같은 자이다. 부여인은 죽은 이를 위해 관은 쓰되 곽이 없는 무덤을 쓴다고 하였다. 이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전의 경우 판본에 따라 ‘有棺無椁’(「集解校補」·『通志』 등)으로 되어 있고, 반면 송본에는 ‘有椁無棺’으로 기록된 것도 있다. 단지 기록상의 착오인지 아니면 시대에 따라 장법이 변화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진서』 부여국전의 기록대로라면 부여에서 토광목관(곽)묘가 널리 유행하였음을 보여준다. 부여는 길림성 楡樹 老河深유적에서 목곽의 존재가 인정되기 때문에 ‘有椁無棺’이란 기사와 일부 부합된다(권오영, 2013). 피장자의 족속문제에 대해 다소 논란은 있지만 帽兒山과 學古東山유적에서도 부여 시기의 토광목곽묘가 발굴 조사된 바 있다(吉林市博物館, 1988 ; 中國考古學會 編, 2000 ; 尹玉山, 1985 ; 박양진, 1998). 모아산유적에서 조사된 무덤은 대부분 ㅍ자형의 목곽을 사용한 단곽, 쌍곽, 혹은 三槨의 수혈식 토광목곽묘이다(박양진, 2005). 그러나 부여의 주묘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목곽 내부에 목관이 존재한 것(한국고고학회, 2007)도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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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있으나 관은 쓰지 않았다.주 012
번역주 012)
戶八萬 … 有椁無棺 : 이 기사는 대체로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부여전의 기사를 축약·전재한 것으로 『후한서』 권85, 동이전 부여전과 마찬가지로 축약과정에서 기록상의 차이가 보인다. 즉, 城柵을 城邑으로, 金銀飾帽를 金銀飾腰로, 有棺無槨을 有椁無棺으로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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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치르는 동안은 남녀가 모두 흰 옷을 입는데, 부인은 베로 만든 면의(面衣)주 013
번역주 013)
面衣 : 멀리 외출할 때 쓰던 얼굴 가리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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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착용하며, 옥으로 만든 패물은 [몸에] 차지 않는다.주 014
번역주 014)
其居喪 … 去玉珮 : 이 기사는 『삼국지』 권30, 위서 부여전에 인용된 『위략』 기사를 전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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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에서는] 좋은 말과 담비[貂]주 015
번역주 015)
貂 : 담비과 혹은 족제비과에 속하는 동물이다. 모양은 족제비와 비슷하고, 털빛은 황갈색이다. 가죽이 귀하여 옛날에 그 꼬리를 侍中 등이 쓰는 冠에 달아 장식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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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괭이[豽]주 016
번역주 016)
豽 : 살쾡이과 혹은 원숭이과에 속하는 동물이다. 개와 비슷하지만 피부의 무늬는 표범과 같고 뿔이 있으며 앞발이 없고 뒤 두 다리만 있다고 전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楊孚가 지은 『이물지(異物志)』에 의하면 이것을 조선의 특산물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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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좋은 구슬이 산출되는데, 그 구슬의 크기는 대추만 하다.주 017
번역주 017)
出善馬 … 珠大如酸棗 : 『삼국지』 권30, 동이전 부여전 기사를 전재한 것이나, 『삼국지』의 名馬를 善馬로, 『삼국지』의 貂狖는 『후한서』와 같이 貂豽로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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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는 부강하고 영화로워 선대로부터 [지금까지 전쟁으로 인해] 파괴당한 일이 없다.주 018
번역주 018)
其國殷富 … 未嘗被破 : 이 기사는 『삼국지』 권30, 위서 부여전에 인용된 『위략』 기사를 전재한 것인데, 『위략』의 破壞를 被破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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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의 인장에는 ‘예왕지인(穢王之印)’주 019
번역주 019)
穢王之印 : 濊·穢[薉와 같은 자]의 글자는 사서에 따라 달리 표현되어 있다. 『삼국지』 권30, 동이 부여·고구려조에는 ‘濊’인 데 비해 『진서』 권69, 사이 부여국, 『양서』 열전48 고구려, 『한원』 번이부 고려전에 인용된 『위략』·『태평어람』 권783, 사이부 고구려전에 인용된 『위략』에는 모두 ‘穢’로 되어 있다. 『진서』와 『양서』 등은 『삼국지』 동이전보다는 『위략』을 직접 참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南解次次雄 16年 2월조에는 “北溟人이 밭을 갈고 있을 때 穢王의 印을 얻어 이것을 헌상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또 경북 영일군에서는 “晉率善穢佰長”이라 음각되어 있는 晉代의 銅印이 출토된 바 있다. 蒼海郡의 설치와 관련하여 기원전 128년 28만 호의 백성을 거느리고 요동군에 망명한 南閭에게 내린 인장으로 보는 견해(栗原朋信, 1960)가 있으나, 창해군의 위치가 부여의 중심과는 어긋날 뿐 아니라 부여의 영토에서 貊族이 濊와 뒤섞여 살았던 자취가 발견됨으로써 이 견해는 수긍하기가 어렵다. 또한 맥족인 부여왕이 ‘濊王之印’을 그대로 사용했을 리가 없다는 점에서 夫餘王之印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는 견해(리지린, 1964)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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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나라에서는 옛 예성(穢城)이 있는데, [그것은] 본래 예맥(穢貊)주 020
번역주 020)
穢貊 : 예맥은 濊[穢·薉] 또는 貊[貉]으로도 불렸는데, 서쪽으로는 東胡, 동쪽으로는 肅愼과 접해 있었다. 예맥은 한국 민족 형성의 근간이 되며, 특히 한국사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뿐 아니라 부여, 고구려의 주된 종족 구성원이란 점에서 일찍부터 주목되어왔다. 예맥은 한자 자체의 뜻만을 보면 더럽다는 뜻의 ‘예’와 짐승을 의미하는 ‘맥’이 결합된 개념으로서 중국인이 화이관에 입각하여 자신들의 동북방에 있던 이민족을 멸시적으로 부른 데서 비롯된 것이다. 사료에서는 ‘예’와 ‘맥’을 구분하여 각각 단칭으로 쓰기도 하고 ‘예맥’의 연칭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예맥의 실체에 대해서는 크게 예와 맥의 계통 자체를 달리 보는 예·맥 이종족설과 예·맥을 같은 족속인 동일 계통으로 보는 동종설로 대별된다(여호규, 1996 ; 조영광, 2015). 이종족설은 三上次男·이옥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三上次男은 예족을 신석기시대 유문토기[빗살무늬토기]와 관련시켜 고아시아 계통으로, 맥족은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를 남긴 퉁구스족으로 보고 예맥족을 시대적 선후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三上次男, 1951). 반면 동종설은 조선 후기 정약용을 비롯하여(『아방강역고』 권2, 예맥고) 三品彰英·윤무병·김정배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예컨대 김정배는 예와 맥은 동일계 족속으로 그 분포지역에 따라 각각 구분된 것으로 보았다(김정배, 1968). 그렇지만 예와 맥을 동일 계통으로 보면서도 일찍부터 분화했다고 보는 예·맥 분화설, 중국 북방의 맥족이 동방으로 이주했다는 맥족이동설, 그리고 맥족이 중국 대륙 서북에서 동방에 걸쳐 넓게 분포했다는 맥족분포설 등 여러 견해(김정배, 1968 ; 노태돈, 1986 ; 박경철, 2003 ; 여호규, 2011 참조)가 있다. 이처럼 예맥의 실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예맥이 예와 맥으로 구분되고 서로 다른 계통이 아닌 하나의 계통이며, 다만 세부적으로 갈라진 갈래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예와 맥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서로 구분이 되지만 종족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우리 학계에서는 동북아시아 민족 이동의 관점에서 고아시아족과 알타이어족의 이동을 염두에 두고, 청동기문화의 주역으로서 예맥족이 신석기문화의 고아시아족을 흡수· 통합하는 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형성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김상기, 1948 ; 1954·1955 ; 김정학, 1964 ; 윤무병, 1966 ; 三上次男, 1966 ; 김정배, 1973 ; 김원룡, 1986 참조). 예맥은 기원전 2~3세기경부터 송화강·압록강 유역과 동해안 일대에 걸쳐 정착하며 활동했던 종족으로 추측된다. 고고학상으로 비파형동검문화의 연대 및 분포지역과 일치하므로 이들 예맥족이 고조선을 구성한 중심세력인 것으로 파악된다. 부여·고구려·옥저·동예 등으로 부르는 여러 족속들은 모두 예맥에 포괄되며, 여기에 부여의 한 갈래로 한강 유역에 자리잡고 성장한 백제 역시 예맥족의 나라이다. 그런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부여와 동예를 예족으로 기술한 반면 고구려에 대해서는 맥족으로 달리 구별하고 있다. 그렇지만 두 나라의 언어가 같다는 기사와 고구려를 ‘부여 別種’이라 하여 고구려가 부여에서 갈라진 支派로 본 점에서는 양자가 동일한 족속 계통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처럼 고조선이나 부여, 고구려는 본래 같은 예[예맥]족이었고, 그로부터 분화하여 ‘구려’라는 주민집단을 형성하였고, 기원을 전후로 하여 한인들에 의해 ‘맥’으로 불렸던 것으로 이해된다(여호규,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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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성이다.

  • 번역주 001)
    夫餘國 : 夫餘라고 하지 않고 夫餘國으로 표시한 것은 『후한서』의 體例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부여는 고조선과 더불어 한국고대사의 시원을 이루는 나라이며, 고구려와 백제의 기원이 되는 국가인 동시에 옥저·동예와 함께 예맥족의 국가로서 한국 역사상 의미가 크다(이기동, 2005). 여기서 부여는 北夫餘를 가리키는데, 북부여는 한국사에서 고조선 다음으로 등장하는 국가로 중국 문헌에는 夫餘, 국내 문헌에는 扶餘로 표기되고 있다. 夫餘란 명칭은 ① 평야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로 보는 설(최남선, 1927 ; 1973), ② 사슴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설(白鳥庫吉, 1970) 등이 있다. 현재 그 어원의 정확한 추정은 어려우나 평야를 의미하는 夫里 등과 같은 의미로 보는 설(이병도, 1976)이 지배적이다.
    부여는 기원전 3세기 후반경부터 494년까지 북만주 지역에 있었다. 부여는 이미 先秦 시대부터 고조선과 더불어 중국에 알려질 정도의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늦어도 1세기 초의 후한대에는 왕호를 쓰는 연맹왕국으로 성장하였다고 보인다(이기백·이기동, 1982). 晉代의 부여는 고구려와 魏晉 시기에 이르러 크게 성장한 鮮卑 慕容氏의 침입을 받아 영역의 변동이 있었다. 즉 4세기 말 慕容皝의 침입으로 북부여가 멸망하고, 〈모두루묘지〉에 보이는 바와 같이 그 영역은 고구려에 통합된 것으로 보이며, 3세기경 모용씨의 침입을 받아 동쪽으로 이동하였던 부여족의 일파가 건국한 동부여만 고구려의 보호 속에 5세기까지 존속하였다. 그 후 문자왕 때에 이르러 勿吉의 흥기로 인해 그 왕족이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만주 지역의 부여는 소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측 기록인 『논형(論衡)』과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에는 시조 동명이 북에서부터 이주해 와서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주몽의 출신지를 북부여로 본 기록은 5세기대에 쓰인 〈광개토왕릉비〉와 〈모두루묘지〉이다.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부여전에 의하면 [북]부여의 위치는 서로는 오환·선비와 접하고, 동으로는 읍루와 잇닿아 있고, 남으로는 고구려와 이웃하고, 서남으로는 요동의 중국 세력과 연결된 것으로 나온다. 부여의 선주문화는 기원전 7~기원전 3세기로 비정되는 청동기문화인 西團山문화와 관련이 있다. 그들 중 일부 족단이 제2 송화강 중류로 남하하여 길림성을 중심으로 서단산문화를 일군 부여 선주민을 융합하여 부족국가 부여를 세웠는데, 대략 기원전 3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된다. 부여의 중심지인 왕성의 위치는 『자치통감』의 기록에 의거하여 전·후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에 대해 ① 현재 중국 흑룡강성의 農安·長春 지역설(池內宏, 1932 ; 1951 ; 日野開三郞, 1946 ; 李基白·李基東, 1984), ② 阿勒楚喀(阿城) 일대설(池內宏, 1932), ③ 吉林市 지역설(李建才, 1982 ; 武國勛, 1983 ; 李殿福, 1985 ; 노태돈, 1989 ; 송호정, 2015) 등이 있다. 이처럼 전기 부여의 왕성 소재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최근에는 길림시에서 東團山·南城子古城·帽兒山고분군 등이 잇달아 확인되어 이를 고고학적인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에 길림시를 중심으로 한 松嫩평원 일대로 보는 ③설이 지지를 얻고 있다. 현재의 동단산을 鹿山, 남성자고성을 궁성·濊城, 帽兒山고분군을 國南山(『삼국지』 권30, 부여전)으로 비정하는 견해(武國勛, 1983 ; 張立明, 1988 ; 馬德謙, 1995)가 있으나, 동단산이 너무 작고 협소하며 강가에 고립되어 있다는 한계 때문에 남산을 주변 어디에서든지 잘 바라볼 수 있는 동단산으로, 부여의 왕성은 북쪽의 龍潭山 일대로 비정하는 것이 비교적 합리적이다(이종수, 2003). 그 후 346년 부여는 백제로 표현된 세력에 의해 서쪽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자치통감』 기록이 있다. 이때 부여의 왕성에 대하여 ① 현재 農安 부근설(池內宏, 1932 ; 李建才, 1982 ; 노태돈, 1989), ② 西豊縣 城山子山城說(王綿厚, 1990 ; 송호정, 1997) 등이 있다. 그러나 부여가 백제가 아닌 고구려에 의해 쫓겨갔다고 한다면 서풍 부근설(②)은 후보지에서 제외해야 한다. 농안 부근설(①)의 경우 발해 부여부가 후기 부여의 도성지에 설치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가장 설득력이 있는 후보지일 것이다.
    사료에 보이는 북부여·부여·동부여에 대해 다양하고 복잡한 견해가 있지만 대략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부여와 북부여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동부여는 별개로 보는 견해(池內宏, 1932 ; 日野開三郞, 1946 ; 田耘, 1987 ; 노태돈, 1989)이다. 둘째, 부여와 북부여를 별개로 보는 견해(張博泉, 1981 ; 干志耿, 1984 ; 김병룡, 1991)이다. 여기에는 동부여를 포함하여 3개의 실체로 보기도 하지만, 동부여를 부여나 북부여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장박천은 4개의 부여를 상정하고 있으며, 이도학은 원부여가 소멸하고 새로 들어선 국가로 본다는 점에서 부여와 북부여를 구분하였다(이도학, 1991). 셋째, 3개의 부여를 모두 동일한 실체로 파악하는 견해(金毓黻, 1940 ; 李建才, 1982)이다. 이는 북부여와 동부여가 기록한 예가 많지 않은 중국 문헌과 이의 존재가 초기부터 등장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사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해석하느냐가 관건이 된다.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건국설화를 분석해볼 때 북부여는 졸본부여를 의식하여 붙여진 것이고, 북부여와 부여는 동일한 실체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송기호, 2005). 동부여에 대해서는 주몽의 북부여출자설과는 달리 『구삼국사』와 『삼국유사』(권1 기이편 북부여)에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동부여는 천제의 아들임을 칭한 解慕漱가 기원전 59년에 해부루를 쫓아내고 동쪽으로 옮겨 세운 나라로 나온다. 그런데 부여가 285년 모용선비의 공격을 받아 타격을 받자 그 지배집단 일부가 북옥저 방면에 피난을 하였다가 3세기 말~4세기 초에 두만강 유역에서 동부여라는 독자적인 국가를 세웠다. 이런 견해와 달리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5년조에 나오는 曷思國을 東扶餘로 보는 설(노중국, 1983)도 있다. 동부여는 고구려를 기준으로 하여 그 동쪽에 위치한 국명이고, 반면 길림 방면의 부여는 북부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광개토왕릉비〉에 의하면 동부여는 추모왕의 屬民이었는데, 중간에 조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광개토왕 20년에 고구려에 의해 정벌되었다고 한다. 동부여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團結-크로우노프카문화(두만강 하류, 목량하·수분하 유역 및 연해주 남부 등지에 분포한 북옥저문화)를 남긴 두만강 유역의 북옥저 지방이 가장 유력하게 제기되어왔고(노태돈, 1989), 그다음으로 함경남도~강원도 북부 일대(이병도, 1976)가 많이 언급되어 왔다. 전자는 동부여 건국설화에 나오는 도읍지 迦葉原에 주목하거나 또는 〈광개토왕릉비〉에 味仇婁를 북옥저의 置溝婁(『삼국지』 권30, 동옥저전)나 買溝(『삼국지』 권28, 관구검전)로 비정하는 것을 근거를 삼고 있다(李强, 1986 ; 노태돈, 1999 ; 공석구, 1990). 이와 함께 285년 모용외의 침입 때 부여의 유민이 [북]옥저에 피난하여 동부여를 건설한 것으로 추정한다. 전자가 아직까지는 가장 유력한 견해이지만 나름대로의 문제도 있다. 즉 이 사건 이후 옥저에 관한 기록이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은 것도 그 주장의 방증이 된다. 이 경우 북옥저가 멸망하고 동부여가 들어선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으며, 또한 이를 뒷받침해주는 고고학적인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반면 후자의 후보지는 부여에서 파생되어 나오기에는 너무 동떨어진 곳이고, 이 일대가 동예와 남옥저의 본거지로서 일찍부터 고구려에 신속되어 있어서 이곳에 새로운 국가가 들어설 여지가 별로 없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최근에는 부여의 동북쪽에 위치한 읍루 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송기호, 2005)도 제기되었다. 한편 주몽의 북부여출자설이 정립된 시기를 고구려 초기의 왕계 정립과 함께 4세기 후반으로 보고, 반면 동부여출자설은 6세기 중반 이후 양원왕 즉위 과정에서 승리한 집권세력에 의해 제기되어 600년경 『신집(新集)』 편찬 단계에서 공식화된 것으로 보는 견해(노태돈, 1999)가 있다. 이때 주몽의 북부여출자설이 동부여출자설로 변개되었다고 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玄菟 : 현도군은 전한의 무제가 기원전 107년에 세운 한 군현 중 하나이다. 이때의 현도군은 만주의 撫順 지역에 옮겨진 제3차 현도군을 가리킨다. 『진서』 지리지에 의하면 당시의 현도군은 3개의 현에 3, 200호였다. 현도군은 본래 예맥의 땅으로 기원전 128년에 滄海郡이 설치되었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예맥의 군장인 南閭가 28만 호의 무리를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하였는데, 한나라는 그 지역에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 군을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철폐되었다. 기원전 108년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 기원전 107년에 현도군이 설치되었다. 기원전 82년에 임둔군과 진번군이 폐지되자 임둔군의 소속 현들이 현도군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토착민의 저항이 계속되자 현도군도 기원전 75년에 서북쪽으로 옮겨가면서 현도군의 본래 소속 현들과 옛 임둔군 소속 현들 대부분이 폐지되었다. 渾河 상류의 興京 일대로 치소를 옮긴 현도군은 3개 현을 관할하였는데, 치소는 高句麗縣이었다. 1세기 무렵부터 고구려가 성장하면서 현도군을 압박하였고, 현도군은 다시 撫順 勞動公園古城으로 이치되었다(孫進己·馮永謙, 1989). 이때 요동군에 속한 4개 현을 편입하여 일시적으로 군세를 확장하기도 했다. 이후 공손씨의 지배하에서 고구려의 공격을 받는 한편 서진 말기의 혼란 속에 선비족 모용부의 지배를 받으면서 현도군은 세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5세기 초에 현도군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요동군과 함께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那珂通世, 1894 ; 이병도, 1930 ; 1976).바로가기
  • 번역주 003)
    鮮卑 : 남만주과 몽골 지방에서 거주한 튀르크족과 몽골족의 혼혈 유목민족으로 東胡의 한 갈래이다. 처음에는 鮮卑山 부근에 모여 살아 ‘鮮卑’라고 불렀으나 후에 呼倫池 부근으로 이동하였고, 다시 陰山 일대로 이동하여 다른 종족과 접촉하였다. 흉노족이 세력을 잃은 후 내몽골 지방에서 일어났으며 위진남북조시대에는 남하하여 중국에 北魏 등의 나라를 세웠다. 선비족은 흉노· 돌궐·말갈과는 태생의 기반이 조금 다르고, 같은 선비족이라고 하더라도 부족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전한의 무제가 衛靑을 보내 흉노의 허타오[河套] 지역을 빼앗고(기원전 127년), 이곳에 朔方郡과 五原郡을 설치하였다. 이 시기에 선비족은 내몽골 동부 지역을 점령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는데, 그 북쪽 일파는 東胡이고 남쪽 일파는 烏桓(또는 烏丸)이다. 언어학적으로는 몽골어 계통이라는 설이 강하지만 튀르크계·몽골계·퉁구스계와의 혼혈이라는 설도 있다. 선비족의 흥성은 1세기 흉노족의 몰락과 때를 같이한다. 선비족은 기원전 시기에는 대흥안령산맥 기슭에서 목축·수렵을 생업으로 하는 흉노에 복속했었다. 그 후 흉노가 북과 남으로 분열하자 선비족은 힘을 모아 북흉노를 몽골고원 서쪽으로 내쫓았다. 선비는 2~3세기경 壇石槐와 軻比能이 부족의 통합에 성공하면서 한때 세력이 강대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235년 가비능이 자객에게 살해된 후 선비는 다시 분열되었고, 후에 황하 유역으로 이주하였다. 한나라가 멸망하고 삼국시대가 시작되자, 이때부터 유목민족이 남하하여 한족과 통합되는 과정을 밟았다. 흉노의 지배를 받았던 갈족, 말갈족은 하북성, 산동성 등지로 남하했다. 이를 입증하는 자료로 산동 지역에 있었던 위나라 관구검의 휘하 부대는 말갈족, 갈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관구검은 이들 부대를 이끌고 고구려의 수도를 함락시킨 바 있다. 선비족은 후한이 망하고 西晉의 일부 황족들이 8왕의 난을 일으키자 용병으로 점차 화북 지방에 이주하게 되었다. 5호16국시대에 들어서자 흉노의 劉淵이 서진으로부터 독립하여 前趙를 세우자 선비족도 이를 따라 나라를 세웠다. 이때 선비족 중 여섯 부족이 가장 세력을 떨쳤다. 拓跋部[代, 北魏], 慕容部[前燕, 後燕, 西燕, 南燕], 段部, 宇文部[北周], 乞伏部[西秦], 禿髪部[南涼]의 6개 부족이 각기 나라를 세운 것이다. 6개의 부족 중 선비족의 정체성이 강한 부족은 탁발부·모용부이고, 단부·우문부는 오환족에 가깝다. 걸복부·독발부는 본래 선비족에서 나왔다고 하며, 남량이 망하자 북위에 귀속되었다. 이외에 모용부로부터 나와 서쪽으로 옮겨간 吐谷渾도 선비계인데 현지의 羌人과도 융합되었다. 탁발부가 세운 북위가 439년에 화북을 통일하면서 남북조시대가 되었다. 그 후 隋를 세운 楊堅이나 唐을 세운 李淵이 선비족 출신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는 선비족이 점차 한족과 동화된 사실을 보여준다(이상 『후한서』 권80, 鮮卑傳 ; 『진서』 권108, 載記 慕容廆 ; 『위서』 권1, 序紀 ; 이용범, 1975 ; 內田吟風, 1975 ; 지배선, 1986 참조).
    한국 고대문화 요소 중 관모, 청동그릇인 동복과 동완 등 금속공예품, 그리고 마구류 등에서 선비계 문화요소가 나타나고 있다. 관모 중 걸으면 흔들리는 산 모양의 步搖冠은 3세기 말부터 4세기 전반에 걸쳐 모용선비 무덤에서 집중 출토되며, 주로 전연·후연· 북연 소위 三燕의 도읍지였던 중국 朝陽 지역에서 발견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 특히 北燕의 황제 馮跋의 동생 馮素弗(415년 사망) 무덤에서는 북조 전통의 보요관과 남조 전통의 매미 모양 金蟬文璫이 결합한 문양이 출토된 바 있다. 이러한 양식은 고구려의 소골관, 석촌동고분 출토 금제보요(4점), 공주 수촌리1, 4호분, 서산 부장리5호분, 고흥 안동 길두리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무령왕과 왕비의 관식, 신라 황남대총 남분의 은관 입식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선비족의 관식이 삼국시대 관식에 영향을 준 사례라 할 수 있다(강현숙, 2003 ; 권오영, 2006 ; 이송란, 2011). 고구려와 백제의 마구문화도 모용선비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구 중 기초장비인 비(轡)가 동래 복천동38호분 및 69호분, 김해 대성동2호분, 천안 두정동5호 토광묘, 오창 송대리유적, 청주 신봉동92-84호분 및 92-19호분 등에서 출토되었는데, 선비-고구려를 잇는 북방 기마문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성정용, 2000 ; 이상률, 2001). 또한 경주 황남동98호분 남분, 대구 달성37호분, 동래 복천동10호분 등에서 출토된 등자는 중국 하남성 안양시 효민둔묘나 요령성 朝陽 원대자벽화묘, 집안 칠성산96호분 등과 관련이 있는데, 이 역시 선비-고구려를 잇는 기마문화의 소산이다(장윤정, 1999). 그 밖에 다소 논란이 있지만 김해 대성동29호 등에서 출토된 청동솥[동복]과 대야[동분], 그리고 둥근그릇[동완] 등은 요령성 조양 원대자벽화묘, 북표 라마동무덤, 안양 효민둔154호분 등에서 나온 것과 거의 같다. 이러한 금속공예품들도 모용선비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선비족 가운데 요서 지역의 민족은 당나라 후기에는 거란국을 세우고 얼마 후 요로 국명을 바꿨다. 이때 그 휘하에 있던 말갈족, 갈족 일부가 동만주로 이동했다. 말갈족·선비족·타타르 혼합 민족인 여진이 거란을 정벌하고, 거란인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그 주위에 여진인을 배치하여 거란, 여진의 민족 통합이 이루어졌다. 요서 선비족에서 거란족을 거쳐 탄생한 여진족은 금나라 멸망 이후 해서여진, 야인여진, 건주여진으로 나뉘어졌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弱水 : 『사기』 대완전에 의하면 “천하에서 가장 약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곤륜의 약수이며, 기러기의 털조차 띄우지 못할 정도이다.”라고 해서 약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중국에서 약수는 신선사상에 의해 윤색되어 전설로 전해오고 있는데 여러 곳을 지칭하고 있다. 중국인은 東王父가 살고 있다는 扶桑이라는 낙원이 있고, 해가 뜨는 서쪽 끝에는 약수를 건너 西王母가 신선향인 崑崙山 정상에서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① 서왕모가 사는 곤륜산에서 발원하는 강의 이름이라 하였고(『사기』 대완전), ② 감숙성 에티나강에서 타클라마칸까지 흐르는 강의 이름을 지칭하기도 하며(『서경』 禹貢), ③ 만주 지역에서는 송화강 유역의 길림에서부터 본류에 합류하는 混同江을 지칭하는 경우가 있다. ④ 요령성과 내몽골 동부 지역에 흐르는 西拉木倫이나(김유철·하원수, 2009), 하북성 平泉縣 七老圖山脈의 光頭山에서 발원한 老哈河로 보는 견해(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소 편, 『대동문화연구』 13, 1979의 종합토론 참고)가 있다. 분명치는 않으나 부여의 북쪽이라 하였기 때문에 흑룡강(아무르강)보다는 대체로 송화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전해종, 1993 ; 田中俊明, 2006).바로가기
  • 번역주 005)
    玄菟北千餘里 … 北有弱水 : 3세기경 부여는 서쪽으로 송화강~요하 분수령 일대에서 선비, 남쪽으로 輝發河 일대에서 고구려, 동쪽으로 長廣才嶺을 경계로 읍루 등과 접하고, 북쪽으로 송화강과 눈강(嫩江) 일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송호정, 1997). 바로가기
  • 번역주 006)
    五穀 : 오곡은 5종류의 곡물을 말하지만 지역과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① 麻·黍·稷·麥·豆(『周禮』 天官, 疾医), ② 黍·稷·麻·麥·菽(『大戴禮』 曾子天圓), ③ 稻·稷·麥·豆·麻(『楚辭』 大招), ④ 黍·稷·菽·麥·稻(『周禮』 夏官 職方氏), ⑤ 粳米·小豆·麥·大豆·黃黍(『素問』 藏氣法時論), ⑥ 稻穀·大麥·小麥·菉豆·白芥子(『成就妙法蓮華經』 主瑜伽觀智儀軌), ⑦ 大麥·小麥·稻穀·小豆·胡麻(『建立曼多羅護摩儀軌』)의 여러 견해(井上秀雄 外 譯注, 1977)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쌀·보리· 콩·조·기장을 오곡이라 부른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揖讓 : 손님과 주인이 상견하는 예로 두 손을 마주 잡고 겸손한 뜻을 표시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盜者一責十二 : 절도 시 12배 배상 규정은 『태평어람』에 인용된 『위략』 고구려전 逸文에 보듯이 고구려에서도 시행되었다. 고구려는 『주서』 고려전에 의하면 6세기 중후반 절도죄에 대해 10배의 배상 규정을 시행하여 형량을 조금 낮추었다. 이 시대에는 살인·상해·절도·간음·투기의 다섯 죄목에 대한 금법이 공통적으로 존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9)
    殺牛祭天 : 소를 잡아 제사지내는 殺牛 신앙은 ① 가뭄 때 비오기를 기도하는[祈雨] 경우, ② 전쟁이 일어날 경우 길흉을 점칠 때, ③ 독기를 예방하기 위해 흰소·흰돼지·양 등을 잡아 제사를 지내는 경우(『북사』 권95 진랍), ④ 〈영일냉수리신라비〉와 〈울진봉평신라비〉에 보이는 것처럼 귀족회의에서 결정사항을 집행하면서 소를 죽여 제의를 지내는 경우에 각각 나타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0)
    以其蹄占吉凶 … 合者爲吉 : 이러한 점복을 牛蹄占卜이라고 한다. 우리 고대사회에서는 국가적 중대사를 앞두고 점을 쳐서 길흉을 판단하는 점복문화가 성행하였다. 특히 국가 간에 맹약을 맺는 회맹의식과 전쟁에 출전하는 것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사였다. 이를 결정할 때 동물의 희생례로써 이러한 중대사를 치러 신에게 誓願하는 의식을 가졌던 것이다(송화섭, 2006). 이러한 점복 행위는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부여·예·왜전 등에 나오는 북방민족의 전통민속이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1)
    ‘椁’은 ‘槨’과 같은 자이다. 부여인은 죽은 이를 위해 관은 쓰되 곽이 없는 무덤을 쓴다고 하였다. 이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전의 경우 판본에 따라 ‘有棺無椁’(「集解校補」·『通志』 등)으로 되어 있고, 반면 송본에는 ‘有椁無棺’으로 기록된 것도 있다. 단지 기록상의 착오인지 아니면 시대에 따라 장법이 변화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진서』 부여국전의 기록대로라면 부여에서 토광목관(곽)묘가 널리 유행하였음을 보여준다. 부여는 길림성 楡樹 老河深유적에서 목곽의 존재가 인정되기 때문에 ‘有椁無棺’이란 기사와 일부 부합된다(권오영, 2013). 피장자의 족속문제에 대해 다소 논란은 있지만 帽兒山과 學古東山유적에서도 부여 시기의 토광목곽묘가 발굴 조사된 바 있다(吉林市博物館, 1988 ; 中國考古學會 編, 2000 ; 尹玉山, 1985 ; 박양진, 1998). 모아산유적에서 조사된 무덤은 대부분 ㅍ자형의 목곽을 사용한 단곽, 쌍곽, 혹은 三槨의 수혈식 토광목곽묘이다(박양진, 2005). 그러나 부여의 주묘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목곽 내부에 목관이 존재한 것(한국고고학회, 2007)도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12)
    戶八萬 … 有椁無棺 : 이 기사는 대체로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부여전의 기사를 축약·전재한 것으로 『후한서』 권85, 동이전 부여전과 마찬가지로 축약과정에서 기록상의 차이가 보인다. 즉, 城柵을 城邑으로, 金銀飾帽를 金銀飾腰로, 有棺無槨을 有椁無棺으로 표기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3)
    面衣 : 멀리 외출할 때 쓰던 얼굴 가리개를 말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4)
    其居喪 … 去玉珮 : 이 기사는 『삼국지』 권30, 위서 부여전에 인용된 『위략』 기사를 전재한 것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15)
    貂 : 담비과 혹은 족제비과에 속하는 동물이다. 모양은 족제비와 비슷하고, 털빛은 황갈색이다. 가죽이 귀하여 옛날에 그 꼬리를 侍中 등이 쓰는 冠에 달아 장식으로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6)
    豽 : 살쾡이과 혹은 원숭이과에 속하는 동물이다. 개와 비슷하지만 피부의 무늬는 표범과 같고 뿔이 있으며 앞발이 없고 뒤 두 다리만 있다고 전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楊孚가 지은 『이물지(異物志)』에 의하면 이것을 조선의 특산물이라 하였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7)
    出善馬 … 珠大如酸棗 : 『삼국지』 권30, 동이전 부여전 기사를 전재한 것이나, 『삼국지』의 名馬를 善馬로, 『삼국지』의 貂狖는 『후한서』와 같이 貂豽로 표기하였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8)
    其國殷富 … 未嘗被破 : 이 기사는 『삼국지』 권30, 위서 부여전에 인용된 『위략』 기사를 전재한 것인데, 『위략』의 破壞를 被破로 고쳤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9)
    穢王之印 : 濊·穢[薉와 같은 자]의 글자는 사서에 따라 달리 표현되어 있다. 『삼국지』 권30, 동이 부여·고구려조에는 ‘濊’인 데 비해 『진서』 권69, 사이 부여국, 『양서』 열전48 고구려, 『한원』 번이부 고려전에 인용된 『위략』·『태평어람』 권783, 사이부 고구려전에 인용된 『위략』에는 모두 ‘穢’로 되어 있다. 『진서』와 『양서』 등은 『삼국지』 동이전보다는 『위략』을 직접 참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南解次次雄 16年 2월조에는 “北溟人이 밭을 갈고 있을 때 穢王의 印을 얻어 이것을 헌상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또 경북 영일군에서는 “晉率善穢佰長”이라 음각되어 있는 晉代의 銅印이 출토된 바 있다. 蒼海郡의 설치와 관련하여 기원전 128년 28만 호의 백성을 거느리고 요동군에 망명한 南閭에게 내린 인장으로 보는 견해(栗原朋信, 1960)가 있으나, 창해군의 위치가 부여의 중심과는 어긋날 뿐 아니라 부여의 영토에서 貊族이 濊와 뒤섞여 살았던 자취가 발견됨으로써 이 견해는 수긍하기가 어렵다. 또한 맥족인 부여왕이 ‘濊王之印’을 그대로 사용했을 리가 없다는 점에서 夫餘王之印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는 견해(리지린, 1964)도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20)
    穢貊 : 예맥은 濊[穢·薉] 또는 貊[貉]으로도 불렸는데, 서쪽으로는 東胡, 동쪽으로는 肅愼과 접해 있었다. 예맥은 한국 민족 형성의 근간이 되며, 특히 한국사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뿐 아니라 부여, 고구려의 주된 종족 구성원이란 점에서 일찍부터 주목되어왔다. 예맥은 한자 자체의 뜻만을 보면 더럽다는 뜻의 ‘예’와 짐승을 의미하는 ‘맥’이 결합된 개념으로서 중국인이 화이관에 입각하여 자신들의 동북방에 있던 이민족을 멸시적으로 부른 데서 비롯된 것이다. 사료에서는 ‘예’와 ‘맥’을 구분하여 각각 단칭으로 쓰기도 하고 ‘예맥’의 연칭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예맥의 실체에 대해서는 크게 예와 맥의 계통 자체를 달리 보는 예·맥 이종족설과 예·맥을 같은 족속인 동일 계통으로 보는 동종설로 대별된다(여호규, 1996 ; 조영광, 2015). 이종족설은 三上次男·이옥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三上次男은 예족을 신석기시대 유문토기[빗살무늬토기]와 관련시켜 고아시아 계통으로, 맥족은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를 남긴 퉁구스족으로 보고 예맥족을 시대적 선후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三上次男, 1951). 반면 동종설은 조선 후기 정약용을 비롯하여(『아방강역고』 권2, 예맥고) 三品彰英·윤무병·김정배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예컨대 김정배는 예와 맥은 동일계 족속으로 그 분포지역에 따라 각각 구분된 것으로 보았다(김정배, 1968). 그렇지만 예와 맥을 동일 계통으로 보면서도 일찍부터 분화했다고 보는 예·맥 분화설, 중국 북방의 맥족이 동방으로 이주했다는 맥족이동설, 그리고 맥족이 중국 대륙 서북에서 동방에 걸쳐 넓게 분포했다는 맥족분포설 등 여러 견해(김정배, 1968 ; 노태돈, 1986 ; 박경철, 2003 ; 여호규, 2011 참조)가 있다. 이처럼 예맥의 실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예맥이 예와 맥으로 구분되고 서로 다른 계통이 아닌 하나의 계통이며, 다만 세부적으로 갈라진 갈래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예와 맥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서로 구분이 되지만 종족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우리 학계에서는 동북아시아 민족 이동의 관점에서 고아시아족과 알타이어족의 이동을 염두에 두고, 청동기문화의 주역으로서 예맥족이 신석기문화의 고아시아족을 흡수· 통합하는 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형성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김상기, 1948 ; 1954·1955 ; 김정학, 1964 ; 윤무병, 1966 ; 三上次男, 1966 ; 김정배, 1973 ; 김원룡, 1986 참조). 예맥은 기원전 2~3세기경부터 송화강·압록강 유역과 동해안 일대에 걸쳐 정착하며 활동했던 종족으로 추측된다. 고고학상으로 비파형동검문화의 연대 및 분포지역과 일치하므로 이들 예맥족이 고조선을 구성한 중심세력인 것으로 파악된다. 부여·고구려·옥저·동예 등으로 부르는 여러 족속들은 모두 예맥에 포괄되며, 여기에 부여의 한 갈래로 한강 유역에 자리잡고 성장한 백제 역시 예맥족의 나라이다. 그런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부여와 동예를 예족으로 기술한 반면 고구려에 대해서는 맥족으로 달리 구별하고 있다. 그렇지만 두 나라의 언어가 같다는 기사와 고구려를 ‘부여 別種’이라 하여 고구려가 부여에서 갈라진 支派로 본 점에서는 양자가 동일한 족속 계통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처럼 고조선이나 부여, 고구려는 본래 같은 예[예맥]족이었고, 그로부터 분화하여 ‘구려’라는 주민집단을 형성하였고, 기원을 전후로 하여 한인들에 의해 ‘맥’으로 불렸던 것으로 이해된다(여호규, 2013).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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