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 23년 회회(回回) 아리(阿里)가 형 납덕(納德)을 찾고자 경사에 이르러 호소하였는데 성화제가 간첩이라고 질책하여 내쫓은 일 등의 내용
성화 23년(1487)에 그 나라 안의 회회(回回)
아력(阿力)
주 001이, [그의] 형 납적(納的)이 중원을 유력(遊歷)한 지 40여 년이 되었기에 운남(雲南)에 가서 찾고자 하였다. 이에 많은 보물을 가지고 만랄가에 이르러 행인(行人)주 002
각주 002)
좌보(左輔)의 배를 타고, 장차 경사로 들어와 진공하고자 하였다. 광동에 이르러 시박(市舶) 중관 위권(韋眷)에게 착취당하였다. 아력이 원한을 품고 경사에 이르러 호소하였다. 예부의 관원이 그 공물의 값을 헤아려 그에게 보상해주고, 운남에 가서 형을 찾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다. 당시 위권은 치죄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먼저 궁내[의 권귀(權貴)]에게 사적으로 부탁하였다. 성화제는 이에, 아력이 간첩이 되어 진공을 핑계로 악행을 일삼는다고 질책하고, 광동 수신으로 하여금 [그를] 내쫓아 돌려보내도록 하니, 아력은 이에 큰 소리로 울면서 떠나갔다.주 003 홍치 3년(1490)에 그 왕 속단(速檀)주 004
아흑마(阿黑麻)
주 005가 사신을 보내어 살마아한·토로번과 함께 말·낙타·옥석을 바쳤다.주 006
行人: 조공 관련 외교 업무를 담당하던 관직명으로 行人司行人의 약칭이다. 周代에는 秋官에 속해 大行人과 小行人 2官이 있었고, 멀리서 天子를 알현코자 온 賓客의 접대를 맡았다. 漢代에는 大鴻臚의 屬官으로 行人令이 있었지만 府內 郎官들에 대한 관리를 담당했다. 『明史』 「職官志」에 따르면, 明代 行人司에 장관인 司正(正七品)과 부관인 左右司副(從七品)를 보좌하는 行人 37명(正八品)을 두어 捧節과 出使 등의 임무를 맡겼다. 하지만 洪武 13년(1380)에 처음으로 行人司가 설치될 때 行人은 正九品이었으나, 洪武 27년(1394)에 品秩을 승격시키고 孝廉科 출신의 인재를 등용하였다. 建文帝는 行人司를 없애고 鴻臚寺에 예속시켰으나 永樂帝가 다시 복귀시켰다.
- 각주 001)
-
각주 002)
行人: 조공 관련 외교 업무를 담당하던 관직명으로 行人司行人의 약칭이다. 周代에는 秋官에 속해 大行人과 小行人 2官이 있었고, 멀리서 天子를 알현코자 온 賓客의 접대를 맡았다. 漢代에는 大鴻臚의 屬官으로 行人令이 있었지만 府內 郎官들에 대한 관리를 담당했다. 『明史』 「職官志」에 따르면, 明代 行人司에 장관인 司正(正七品)과 부관인 左右司副(從七品)를 보좌하는 行人 37명(正八品)을 두어 捧節과 出使 등의 임무를 맡겼다. 하지만 洪武 13년(1380)에 처음으로 行人司가 설치될 때 行人은 正九品이었으나, 洪武 27년(1394)에 品秩을 승격시키고 孝廉科 출신의 인재를 등용하였다. 建文帝는 行人司를 없애고 鴻臚寺에 예속시켰으나 永樂帝가 다시 복귀시켰다.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색인어
- 이름
- 아력(阿力), 납적(納的), 좌보(左輔), 위권(韋眷), 아력, 위권, 권귀(權貴), 성화제, 아력, 아력, 아흑마(阿黑麻)
- 지명
- 회회(回回), 운남(雲南), 만랄가, 광동, 운남, 살마아한, 토로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