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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사 수업자료

몽골 제국의 성립과 발전

3-1단원 2차시
  • 저필자
    이윤선(동작고 역사 교사)

몽골 제국의 성립과 발전

몽골 제국의 성립
몽골 제국의 동아시아 정복
원의 성립과 통치
각국의 민족 의식 발달

몽골 제국의 성립과 발전

1. 몽골 제국의 성립
  1. 성립: 테무친의 몽골족 통합(1206) → 쿠릴타이에서 칭기즈칸으로 추대, ‘예케 몽골 울루스’(몽골 제국) 건설
  2. 군사적 기반: 천호·백호제, 친위대(천호장·백호장 자제로 구성)
  3. 성장
    - 비단길 장악: 서하, 금, 호라즘 정복
    - 정복지는 아들, 동생들에게 분봉
몽골 제국의 기원
<集史>에 나오는 몽골족의 기원 설화에 따르면, 그들은 먼 옛날 인근의 투르크족과 싸워 모두 살해당하고 남녀 두 쌍만 남게 되었는데 그들이 협곡을 지나 에르게네 쿤(즉 아르군)으로 피신하여 자리를 잡고 살다가 자손이 번성하자 그곳을 떠나 삼하지원(三河之源: 오논 강, 톨 강, 헤를렌 강의 발원지인 오늘날 몽골 동북방 산악지대)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구당서, 北狄, 室韋傳>에는 대흥안령 산맥 서북부에 실위(室韋)라는 명칭을 가진 여러 집단이 거주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 몽올실위(蒙兀室韋)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몽올’이 바로 ‘몽골’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서에 기록한 사례이며, 그들의 거주지가 아무르강(중국의 흑룡강) 상류인 아르군 강 유역이라는데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이들이 삼하지원(三河之源)으로 이주한 시기는 대략 9세기 중반에서 12세기 중후반에 걸쳐 있는데, 이 중 칭기즈칸의 선조 집단은 제일 마지막 시기에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이 몽골 고원 전체를 통합하고 제국을 세운 후, 이전부터 들어와 있던 타타르 등 몽골계 유목민과 그 이전부터 몽골 고원 지역에서 살아왔던 모든 유목민 집단을 ‘몽골’이라 통칭하게 된 것이다.

천호제
1206년 몽골 제국 수립 직후 칭기즈칸은 몽골 울루스를 구성하는 95개의 천호를 조직하고 천호장을 임명하였다. 각각의 천호는 다시 백호로, 백호는 다시 십호로 나뉘어, 각각 백호장과 십호장도 임명되었다. 95개의 천호는 크게 3개의 만호로 묶여 좌익, 중군, 우익 만호로 편제되었다. 칭기즈칸이 조직한 천호들은 신생 몽골국의 근간이 되는 사회․군사 조직이었으며 장차 정복전의 수행에서도 군사력의 핵심을 담당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칭기즈칸의 천호제는 십진제의 원리로 편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평범한 조직이었다. 그런데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천호장의 임명은 혈연과 무관하게 이루어졌다. 오랜 동안의 전쟁 결과 기존의 씨족․부족 체제가 와해되기도 하였지만, 유목민들 간에는 혈연보다는 다양한 형태의 동맹(연맹) 관계가 더욱 중요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1206년에 만들어진 천호들 가운데 상당수는 혈연집단이 아니었다. 천호장도 칭기즈칸에게 충성을 바쳤던 사람들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이 새로운 조직은 칭기즈칸에게 강력하고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주었다.

울루스의 의미
칭기즈칸은 정복을 통해 얻은 영토와 백성들을 여러 아들과 동생들에게 나누어 주어 다스리게 하였다. 따라서 몽골 제국 전체는 대칸이 다스렸지만 그 안에는 작게 쪼개진 여러 개의 울루스가 존재하였다. 울루스는 ‘나라, 국가’라는 의미인데 ‘백성, 사람’이라는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몽골 제국 내에서 칭기즈칸의 아들인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톨루이의 후예들과 동생들의 후예들이 독자적인 울루스를 가지고 있었다. 이중 주치의 후예가 세운 남러시아 초원의 주치 울루스(킵차크 한국), 차가타이의 후예가 세운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 울루스(차가타이 한국), 톨루이의 차남 훌레구가 이란과 서아시아에 세운 훌레구 울루스(일 한국) 등은 독자적인 영토와 세력을 지닌 국가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 여러 울루스는 몽골 제국을 구성하는 일부이면서 동시에 독자적인 하나의 세력이기도 하여 서로 경쟁하거나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특히 쿠빌라이 집권 이후에는 서방 울루스들의 정치․ 경제적인 자립도가 증가하면서 친족으로서의 연대의식이 점차 약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느슨한 형태의 연합 국가인 몽골 제국 내에서 여전히 상호 교류와 유대를 유지했다.
 
주 129
각주 129) 천호·백호제
<몽골 제국의 성장 요인-천호제>
칭기즈칸은 1206년 대칸에 즉위한 이후 95개의 천호를 조직하고 ‘울루스를 함께 세운 자들’을 천호장으로 임명하였다. 천호들은 몽골의 근간이 되는 사회, 군사 조직이었으며 군사력의 핵심을 담당하였다. 칭기즈칸은 종래의 부족적 전통을 떠나 자신에게 충성을 바친 사람들을 천호로 임명하였기 때문에 강력하고 중앙 집권적인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
<몽골 제국의 성장 요인-천호제>
<몽골 제국의 성장 요인-천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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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30
각주 130) 서하, 금, 호라즘 정복
<몽골 제국의 성장 요인-전투력>
  • 무기: 나무, 짐승의 뿔과 힘줄 등을 이용해 만든 가볍고 짧은 활. 최대 사거리 1㎞, 유효 사거리 300m의 강력한 무기임.
  • 기동력: 군사 1인이 2필 이상의 말을 끌고 다녀 말을 바꾸어 타며 장거리 행군 가능.
  • 비상 식량: 소나 양 1마리를 잡아 말린 후 두드리면 부피가 소 방광 2개 정도의 크기로 줄어듬. 전투 중에 이것을 투구에 넣고 끓여 먹으면 별도의 보급이 필요없음.
  • 정보력: 안정된 교역망을 기대하는 이슬람 상인들의 협조로 광범위한 정보 수집 가능.
<몽골 제국의 성장 요인-전투력>
<몽골 제국의 성장 요인-전투력>
무기:
기동력:
비상 식량:
정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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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31
각주 131) 아들, 동생들에게 분봉
<'울루스'의 의미>
  • 울루스는 '나라,국가'라는 의미인데 '백성,사람'이라는 뜻이 강하게내포되어 있다. 울루스는몽골 제국을 구성하는 일부이면서 동시에 독자적인 하나의 세력이기도 하여 상호 교류를 하면서도서로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울루스'의 의미>
<'울루스'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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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의 성립과 발전

2. 몽골 제국의 동아시아 정복
  1. 서하, 금 멸망(1234년)→유목민 세계를 통합
  2. 고려: 몽골 사신 피살 사건을 빌미로 전쟁 시작→고려 항복(1258년)
  3. 대리: 멸망(1254년)
  4. 대월: 3차에 걸친 침입→쩐 흥 다오의 활약으로 막아냄
  5. 일본: 2차에 걸친 침입→태풍으로 실패
  6. 남송: 멸망(1276년)
몽골의 베트남 침략
1252년 쿠빌라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윈난 성의 대리국을 정복하자 몽골과 대월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몽골은 1257년 대월에 사절을 보내, 남쪽에서 송을 공격할 수 있도록 길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다. 쩐 왕조는 이 요청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사신을 투옥시키고 몽골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그러자 몽골군은 대월을 침략하였고, 쩐 왕조는 이듬해 몽골에 사신을 보내어 화약을 맺고 3년에 한번 입공할 것을 약속했다.
쿠빌라이가 즉위하면서 나라 이름을 원으로 고친 몽골군은 1284년 2차로 대월을 침략하였다. 쩐 흥 다오가 이끄는 대월군은 수도 탕롱을 점령한 몽골군을 사방에서 공격하여 원군을 격파하고 탕롱을 탈환했다. 몽골의 두 번째 침입도 실패로 끝났다. 쿠빌라이는 당시 계획하고 있던 일본 원정도 포기하고 1287년 대월에 대한 3차 침략을 단행하였다. 이때의 싸움 역시 2차 때의 전쟁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쩐 흥 다오의 군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원과 더 이상의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쩐 왕조는 사절을 보내 조공을 바치는 한편, 전쟁 중에 포로가 된 원의 장수들을 송환했다.

몽골의 일본 침략
고려를 굴복시킨 몽골은 먼저 사신을 보내 일본에게 조공을 요구하였으나,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거부하고 결사 항전을 천명하였다. 이어 규슈 일대에 방비 태세를 갖추었다. 쿠빌라이칸은 1274년 여섯 번째의 사신이 일본에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자 마침내 대규모 정벌단을 편성하였다. 정벌군의 규모는 몽골인 및 한인 군대 2만5천명과 고려에서 징발한 김방경 휘하의 군대 8천명, 그리고 수군 6700명과 전함 900척으로 편성되었다.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은 규슈에 상륙하였으나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리하여 낮에는 공격에 나섰다가 밤에는 육지에 주둔하지 않고 함대로 철수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다 대폭풍우를 만나 선박 200여 척이 침몰하고 1만 3500명의 병사가 몰살되었다.
1차 원정이 실패한 후, 쿠빌라이칸은 다시 사신을 보내어 일본에게 항복을 요구하였다. 막부가 사신을 참수하자 분노한 쿠빌라이칸은 1281년 다시 원정군을 조직하였다. 이때는 남송 멸망 이후라서 몽골군 및 한인 군대 3만명, 고려 군대 1만명, 수군 1만5천명 이외에 강남 지방으로부터 무려 10만 명을 동원하였다. 이렇게 하여 도합 15만의 군대가 4400여 척의 전선을 타고 일본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이 두 번째의 원정군은 일본군의 강력한 방비 때문에 상륙도 하지 못한 채 해안을 오가다 다시 태풍을 만나 궤멸되었다. 일본에서는 이 두 차례의 태풍을 가미카제(神風)라 부른다.
 
주 132
각주 132) 고려 항복
<몽골과 고려와의 관계>
  • 쿠빌라이는 고려의 태자가 강화하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고려는 만리나 떨어진 먼 나라이고, 당 태종이 친히 정벌하였는데도 이를 능히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지금 그 세자가 스스로 와서 우리에게 귀의하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고려사>
  • 의관은 고려의 풍속에 따르고, 모두 바꿀 필요가 없다.
  • 개경으로 환도하는 일은 국력을 회복한 다음 실행해도 좋다.
  • 고려에 주둔하고 있는 몽골군은 가을까지 철수한다.
  • 다루가치는 철수시킨다.
    <원종 즉위 후 쿠빌라이가 보내온 조서의 내용>
<몽골과 고려와의 관계>
<몽골과 고려와의 관계>
<고려사>
<원종 즉위 후 쿠빌라이가 보내온 조서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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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33
각주 133) 쩐 흥 다오
<대월의 영웅 쩐 흥 다오>
세 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적이 강할 때는 수도까지도 포기하고 게릴라 전법으로 적과 맞서다가 상황이 유리해지면 전면적인 공격을 하는 전법으로 강대국 몽골의 침략을 막아내었다.
하지만 그 후, 대월은 더 이상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조공 사절을 보내고 포로가 된 몽골의 장수들도 돌려보냈다.
<대월의 영웅 쩐 흥 다오>
<대월의 영웅 쩐 흥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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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34
각주 134) 태풍으로 실패
<몽골의 일본 침략>
쿠빌라이 칸은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공격했으나 태풍을 만나 큰 피해를 입고 실패하였다. 일본에서는 이 태풍을 가미카제(神風)라 부른다.
<몽골의 일본 침략>
<몽골의 일본 침략>몽골의 일본 침략몽골의 일본 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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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의 성립과 발전

3. 원의 성립과 통치
1. 쿠빌라이칸
  • 대도(베이징)로 천도, 국호를 ‘원’으로 바꿈
  • '원'의 영역: 쿠빌라이의 울루스 혹은 예케 몽골 울루스 전체
  • 남송 멸망→유목 민족 국가 최초로 중국 전 지역 지배

대도(베이징)위치
주 135
각주 135) 예케 몽골 울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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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의 성립과 발전

3. 원의 성립과 통치
2. 통치 기구: 지방에 행성 설치, 다루가치 파견
3. 민족별 신분 제도와 몽골 지상주의
  • 지배층
    • 몽골인-군사
    • 색목인-재정
  • 피지배층
    • 한인
    • 남인

주 136
각주 136) 민족별 신분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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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의 성립과 발전

4. 각국의 민족 의식 발달
  1. 몽골 침입을 막아내는 동안 동아시아 각국에서 민족 의식 발달
  2. 고려: 단군을 시조로 보는 역사 의식→ <삼국유사>, <제왕운기> 편찬
  3. 대월: 쯔놈 문학 유행, <대월사기> 편찬
  4. 일본: 신국 의식 나타남
삼국유사삼국유사
쯔놈문학
몽골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베트남의 민족의식이 강화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쯔놈으로 쓰인 國語詩도 유행하였는데 예전에는 한문보다 천시되던 것이 민족의식 발흥이라는 시대적 분위기를 타고 문학언어로 쓰이게 된 것이다. 쯔놈으로 쓰여진 <국어시집>이 간행되었고, 조정의 공식 문자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주 137
각주 137) 쯔놈 문학 유행
<베트남의 민족문학 등장>
몽골의 침략을 막아내며 민족의식이 강화되자 종래 한문에 밀려 천시되었던 國語詩가 발달하게 되었다. 국어시는 쯔놈으로 쓰여진 문학이다. 이 시기 쯔놈은 조정의 공식 문자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다음은 당시 대표적인 국어시인 응우옌 투엔의 작품 ‘악어를 쫓는 시’의 일부이다. 갑자기 나타난 악어를 쫓기 위해 왕이 이 시를 지어 물에 던지게 하였더니 악어가 사라졌다고 한다.

저 악어야! 네놈은 어디서 왔느냐?
넓디넓은 동쪽 바다가 네놈이 놀 곳이다
여기 푸 르엉 강은 성역(聖域)인데
어디서 길을 잃고 여기까지 왔느나?.......
<베트남의 민족문학 등장>
<베트남의 민족문학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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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의 성립과 발전

몽골 제국 성립
원의 지배
민족의식 발달
  1. 칭기즈칸, 몽골 제국 세움(1206)
  2.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대제국으로 성장
  1. 쿠빌라이칸: 베이징 천도, '원'으로 국호 변경
  2. 원의 통치: 민족별 신분제도, 몽골 지상주의
  1. 고려: 단군을 시조로 보는 역사의식 형성, <삼국유사>
  2. 대월: 쯔놈 문학 발달
  3. 일본: 신국의식 나타남

  • 각주 129)
    천호·백호제<몽골 제국의 성장 요인-천호제>
    칭기즈칸은 1206년 대칸에 즉위한 이후 95개의 천호를 조직하고 ‘울루스를 함께 세운 자들’을 천호장으로 임명하였다. 천호들은 몽골의 근간이 되는 사회, 군사 조직이었으며 군사력의 핵심을 담당하였다. 칭기즈칸은 종래의 부족적 전통을 떠나 자신에게 충성을 바친 사람들을 천호로 임명하였기 때문에 강력하고 중앙 집권적인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
    <몽골 제국의 성장 요인-천호제>
    <몽골 제국의 성장 요인-천호제> 바로가기
  • 각주 130)
    서하, 금, 호라즘 정복<몽골 제국의 성장 요인-전투력>
    • 무기: 나무, 짐승의 뿔과 힘줄 등을 이용해 만든 가볍고 짧은 활. 최대 사거리 1㎞, 유효 사거리 300m의 강력한 무기임.
    • 기동력: 군사 1인이 2필 이상의 말을 끌고 다녀 말을 바꾸어 타며 장거리 행군 가능.
    • 비상 식량: 소나 양 1마리를 잡아 말린 후 두드리면 부피가 소 방광 2개 정도의 크기로 줄어듬. 전투 중에 이것을 투구에 넣고 끓여 먹으면 별도의 보급이 필요없음.
    • 정보력: 안정된 교역망을 기대하는 이슬람 상인들의 협조로 광범위한 정보 수집 가능.
    <몽골 제국의 성장 요인-전투력>
    <몽골 제국의 성장 요인-전투력>
    무기:
    기동력:
    비상 식량:
    정보력: 바로가기
  • 각주 131)
    아들, 동생들에게 분봉<'울루스'의 의미>
    • 울루스는 '나라,국가'라는 의미인데 '백성,사람'이라는 뜻이 강하게내포되어 있다. 울루스는몽골 제국을 구성하는 일부이면서 동시에 독자적인 하나의 세력이기도 하여 상호 교류를 하면서도서로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울루스'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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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32)
    고려 항복<몽골과 고려와의 관계>
    • 쿠빌라이는 고려의 태자가 강화하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고려는 만리나 떨어진 먼 나라이고, 당 태종이 친히 정벌하였는데도 이를 능히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지금 그 세자가 스스로 와서 우리에게 귀의하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고려사>
    • 의관은 고려의 풍속에 따르고, 모두 바꿀 필요가 없다.
    • 개경으로 환도하는 일은 국력을 회복한 다음 실행해도 좋다.
    • 고려에 주둔하고 있는 몽골군은 가을까지 철수한다.
    • 다루가치는 철수시킨다.
      <원종 즉위 후 쿠빌라이가 보내온 조서의 내용>
    <몽골과 고려와의 관계>
    <몽골과 고려와의 관계>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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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33)
    쩐 흥 다오<대월의 영웅 쩐 흥 다오>
    세 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적이 강할 때는 수도까지도 포기하고 게릴라 전법으로 적과 맞서다가 상황이 유리해지면 전면적인 공격을 하는 전법으로 강대국 몽골의 침략을 막아내었다.
    하지만 그 후, 대월은 더 이상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조공 사절을 보내고 포로가 된 몽골의 장수들도 돌려보냈다.
    <대월의 영웅 쩐 흥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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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34)
    태풍으로 실패<몽골의 일본 침략>
    쿠빌라이 칸은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공격했으나 태풍을 만나 큰 피해를 입고 실패하였다. 일본에서는 이 태풍을 가미카제(神風)라 부른다.
    <몽골의 일본 침략>
    <몽골의 일본 침략>몽골의 일본 침략몽골의 일본 침략 바로가기
  • 각주 135)
    예케 몽골 울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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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36)
    민족별 신분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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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37)
    쯔놈 문학 유행<베트남의 민족문학 등장>
    몽골의 침략을 막아내며 민족의식이 강화되자 종래 한문에 밀려 천시되었던 國語詩가 발달하게 되었다. 국어시는 쯔놈으로 쓰여진 문학이다. 이 시기 쯔놈은 조정의 공식 문자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다음은 당시 대표적인 국어시인 응우옌 투엔의 작품 ‘악어를 쫓는 시’의 일부이다. 갑자기 나타난 악어를 쫓기 위해 왕이 이 시를 지어 물에 던지게 하였더니 악어가 사라졌다고 한다.

    저 악어야! 네놈은 어디서 왔느냐?
    넓디넓은 동쪽 바다가 네놈이 놀 곳이다
    여기 푸 르엉 강은 성역(聖域)인데
    어디서 길을 잃고 여기까지 왔느나?.......
    <베트남의 민족문학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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