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리유적
永興所羅里遺蹟
규모
높이: 약 220cm, 너비: 약 70cm
입지
1956년에 발굴조사.
유적개관
목곽묘에 대한 보고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성 내부 포함층에서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 되었으나 유구의 성격은 분명히 밝히지 못한 상태. 토광묘계통의 무덤 가능성 추정.
출토유물
* 동촉 14점, 단조철모 1점, 철검 1점, 청동제 검파두식 1점, 창고달 3점
참고문헌
「조선유적유물도감」2
해설
함경남도 영흥군 순녕면 소사리에 있는 초기철기시대 유적으로 토성, 목곽묘, 유물산포지 등이 확인되었다. 영흥읍에서 동남 약 6km, 용흥강 하류에 위치하며, 유적은 강변에 접한 작은 언덕을 중심으로 위치한다.
1956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토성 내부 포함층에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유구의 정확한 성격은 보고되지 않았다. 출토된 유물은 청동 화살촉(銅鏃) 14점과 함께 검자루(劍把), 각종 수레부속구(車輿具)와 철제창, 단검편, 송곳, 제초기(除草器) 등의 무기, 농기구, 마구류가 있으며, 토기로는 민무늬토기(無文土器), 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가 출토되었고 그 외 기와편도 발굴되었다. 토성이 있는 언덕 위는 유물산포지로 알려져 있었으나 추후 발굴에 의해 집자리로 판명되었다. 8호 집자리는 3×5.6m의 크기를 보이며, 교란이 심하여 층위 관계가 불분명하다.
이 유적은 세형동검을 중심으로 한 한국식 청동기문화에 중국의 한대 문화가 복합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양상은 주변의 무덤과 함께 중국 군현의 지배방식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이래로 소라리의 토성이 사서에 기록된 영동7현(嶺東七縣)의 하나인 화려현(華麗縣)의 치소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1956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토성 내부 포함층에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유구의 정확한 성격은 보고되지 않았다. 출토된 유물은 청동 화살촉(銅鏃) 14점과 함께 검자루(劍把), 각종 수레부속구(車輿具)와 철제창, 단검편, 송곳, 제초기(除草器) 등의 무기, 농기구, 마구류가 있으며, 토기로는 민무늬토기(無文土器), 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가 출토되었고 그 외 기와편도 발굴되었다. 토성이 있는 언덕 위는 유물산포지로 알려져 있었으나 추후 발굴에 의해 집자리로 판명되었다. 8호 집자리는 3×5.6m의 크기를 보이며, 교란이 심하여 층위 관계가 불분명하다.
이 유적은 세형동검을 중심으로 한 한국식 청동기문화에 중국의 한대 문화가 복합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양상은 주변의 무덤과 함께 중국 군현의 지배방식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이래로 소라리의 토성이 사서에 기록된 영동7현(嶺東七縣)의 하나인 화려현(華麗縣)의 치소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