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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화조신(和朝臣; 야마토노아오미)

#백제(百濟)
화조신(和朝臣; 야마토노아오미)
 백제국(百濟國) 도모왕(都慕王)의 18세손 무령왕(武寧王)으로부터 나왔다.
 
【주석】
1. 화조신(和朝臣)
화(和)의 씨명은 왜(倭), 양덕(養德)이라고도 표기한다. 대화국(大和國) 성하군(城下郡) 대화향(大和鄕)의 지명에서 유래한다. 현재의 천리시(天理市) 좌보장정(佐保莊町) 대화(大和) 일대이다.
화조신의 원래 성(姓)이 사(史)였다는 것은 『속일본기(續日本紀)』 연력(延曆) 2년(783)4월 병인조에 좌경인 외종5위하 화사국수(和史國守) 등 35인에게 조신(朝臣) 성을 사여하였다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화사국수는 『속일본기』 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화사씨이다. 그는 『속일본기』 천응(天應) 원년(781) 4월 계묘조에 정6위상에서 외종5위하로 승진하고, 10월에는 조법화사차관(造法華寺次官)으로 임명되었다. 다음해 연력(延曆) 원년(782) 8월에 원지정(園池正)으로 임명되고, 연력 2년(783)에 화조신을 사성받은 것이다. 화사국수는 연력 3년 정월에는 종5위하로 승진하고 연력 4년 정월에는 하야개(下野介), 연력 6년 2월에는 참하수(參河守), 연력 9년 3월에는 대장소보(大藏少輔)를 역임하고, 연력 10년 정월에 종5위상으로 승진하였다.
화사국수 이외에 『속일본기』 연력 2년 춘정월 무자조에 화사가길(和史家吉)이 있다. 화사가길은 여유(女孺)로서 이날 무위에서 외종5위하의 관위를 받았다. 그녀는 후궁에서 황태후 고야신립(高野新笠)을 모시는 여관(女官)으로 근무하였을 것이다. 화사가길은 『속일본기』 연력 2년 8월 임신조에서 화조신가길이라는 이름으로 종5위하로 승진한 것으로 보아 화사국수가 화조신을 사성받을 때에 함께 화조신을 사성받은 듯하다.
『속일본기』 에서는 화사씨가 8세기 후반에 처음 보이지만, 8세기 전반에 이미 관인으로 활약하고 있었음은 고문서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 천평(天平) 18년(746) 3월 24일「왜사인족해(倭史人足解)」(『大日本古文書』 9-144)에 왜사인족(倭史人足), 천평 20년(748)4월 25일 「사서소해(寫書所解)」(『大日本古文書』3-80)에 왜사진수명(倭史眞首名), 평성궁에서 발굴된 목간(『平城宮發掘調査出土木簡槪報)』 4-12)에도 왜비등광명(倭毗登廣名) 등이 나온다. 왜사(倭史; 야마토노후히토)나 왜비등(倭毗登; 야마토노후히토)은 같은 씨성으로 동족이다.
화사씨(왜사씨) 중에 화조신(和朝臣)의 씨성을 사여한 것은 환무천황(桓武天皇)이었다. 화조신을 사여받은 화사씨는 환무천황의 모후 화신립(和新笠)의 형제자매였다. 『일본후기』 연력(延曆) 23년(804) 하4월 신미조의 화조신가마려(和朝臣家麻呂) 훙전(薨傳)의 “중납언 종3위 화조신가마려가 죽었다. 종2위 대납언을 추증하도록 명하였다. 가마려는 증 정1위 고야조신제사(高野朝臣弟嗣)의 손자다. 그의 조상은 백제인이다”라는 기사에서도 추측할 수 있다. 고야조신제사는 『속일본기』 에 고야조신을계(高野朝臣乙繼)로 표기하고 있는데, 화신립의 아버지이다. 을계의 손자가 화조신이라는 씨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을계의 아들이 화조신이었기 때문이었다. 환무천황에게 화조신 성을 사여받은 화사씨 사람들은 모두 환무천황의 모후인 화신립의 친족으로 환무천황에게 우대받은 사람들이었다.
화신립(和新笠)에 대해서는 『속일본기』 연력 8년 12월조에 ‘황태후붕(皇太后崩)’이라는 사망 기사가 보이고, 연력 9년 정월 신해조에 중납언(中納言) 정3위 등원조신소흑마려(藤原朝臣小黑麻呂)가 뇌인(誄人)을 데리고 황태후에 대한 추모사를 낭독하였다. 이어 동 연력 9년 정월 신해조에는 그녀의 양력을 기술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장지는 대지산릉(大枝山陵)이고, 황태후의 성은 화씨(和氏), 휘는 신립(新笠)이고, 정1위 을계(乙繼)의 딸이고, 모는 정1위 대지조신진매(大枝朝臣眞妹)라고 한다. 정1위는 추증된 관위이다. 이어 그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純陀太子)로 나온다. 『일본서기』계체기 7년(513)조에도 “백제태자 순타(淳陀)가 훙(薨)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화신립은 광인천황(光仁天皇)과 혼인하여 환무천황(桓武天皇), 조량친왕(早良親王), 능등내친왕(能登內親王)을 낳고, 광인천황 즉위 후인 보귀(寶龜) 연간(700~781)에 고야조신(高野朝臣)으로 개성하였다. 고야조신의 씨성은 화을계(和乙繼)와 화신립(和新笠) 부녀에게만 사성되었고, 일족들에게는 조신의 성이 주어졌다고 보인다. 남편인 천황으로부터 부인에게 사성된 특유의 사례이다. 환무천황의 즉위 후에는 황태부인이 되고, 사망 후에는 황태후로 추증되었다. 그의 시호는 천고지일지자희존(天高知日之子姬尊)으로 정하였다. 그녀의 부친인 화을계는 백제계 도래씨족인 하사씨(和史氏)로서 생전의 관위 관직에 대해서는 불명이다. 모친인 토사숙녜진매(土師宿禰眞妹)는 환무천황 즉위 후인 연력 9년(790)에 대지조신(大枝朝臣)으로 개성하고 연력 8년에 부모의 사망과 함께 정1위로 추증되었다.
화신립의 조상이라고 하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를 비롯한 한국 측 사료에는 보이지 않지만, 『일본서기』 계체기 7년(513) 추8월 무신조에서는 “백제의 태자 순타(淳陀)가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사는 「백제본기(百濟本記)」 에 의거한 것이다. 『일본서기』 무열(武烈) 6년(503) 10월조에는 백제국이 마나군(麻那君)을 보내 공물을 바치자, 무열천황이 백제가 오랫동안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백제가 파견한 마나군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서기』 무열 7년(504) 하4월조에서는 백제왕이 마나군은 골족(骨族)이 아니라면서 골족인 사아군(斯我君)을 파견하였으며, 그에게 법사군(法師君)이라는 아들이 태어났는데 왜군(倭君)의 조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아군이 백제왕의 골족이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왕족이며 무령왕의 왕자일 가능성이 높다. 즉 순타태자와 사아군은 동일 인물로 생각된다. 화조신씨의 일족으로 사(史) 성인 인물로는 왜사인족(倭史人足, 天平 18년 3월 24일자 「倭史人足解」, 『大日本古文書』 9-144), 왜사진수명(倭史眞首名, 天平 20년 4월 25일자 「寫書所解」, 동 3-80), 『속일본기』 연력(延曆) 2년(783) 정월 무자조에 화사가길(和史家吉)이 있다. 평성경 출토 목간(奈良國立文化財硏究所, 1967, 『平城宮發掘調査出土木簡槪報』4)에도 왜비등광명(倭毘等廣名)이 명기되어 있다.
조신(朝臣)의 성으로는 화조신국수(和朝臣國守, 『속일본기』 연력 2년 정월 무자조) 화조신가길(和朝臣家吉, 『속일본기』 연력 2년 8월 무신조), 화조신삼구족(和朝臣三具足, 『속일본기』 연력 3년 정월 기묘조), 화조신가마려(和朝臣家麻呂, 『속일본기』 연력 5년 정월 무술조), 화조신입록마려(和朝臣入鹿麻呂)(『일본후기』 연력23년정월 경자조), 화조신건남(和朝臣建男, 『일본후기』 연력 16년 정월 무오조), 화조신제장(和朝臣弟長, 『속일본기』 연력 2년정월 무자조), 화조신씨계(和朝臣氏繼, 『일본후기』 연력 23년 정월 경자조), 화조신남성(和朝臣男成, 『일본후기』 大同 원년 2월 경술조), 화조신승계(和朝臣繩繼, 『일본후기』 弘仁 3년 정월 병인조), 화조신가주(和朝臣家主, 『類聚國史』 99, 敍位, 弘仁 7년 정월 계유조), 화조신택계(和朝臣宅繼, 『類聚國史』 108, 諸寺, 天長 6년 3월 을미조), 화조신풍영(和朝臣豐永, 『속일본후기』 永和 4년 3월 병자조), 화조신안자(和朝臣安子, 『日本文德天皇實錄』 天安 원년 정월 정미조), 화조신의자(和朝臣宜子, 『日本三代實錄』 貞觀 9년정월기유조), 화조신호도(和朝臣好道, 『日本三代實錄』 仁和 3년 정월 신사조) 등이 있다.
화을계(和乙繼)의 손자이자 고야신립(高野新笠)의 조카인 화조신가마려(和朝臣家麻呂)는 특별한 관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연력 5년(786)에 종7위상으로부터 일거에 7단계 상승하여 종5위하에 오르고, 연력 7년(788)에는 조주정(造酒正)이 되면서 내주조(內廐助), 치부대보(治部大輔)와 경관(京官)을 역임하였다. 연력 11년(792)에는 종5위상으로, 연력 12년(793)에 정5위하, 종4위하로 연속 승진하였고, 연력 15년(796)에는 정4위하 참의로 서임되었다. 그리고 연력 17년(798)에 종3위 중납언이 되었고, 우대신(右大臣), 신왕(神王), 대납언(大納言), 일지농왕(壹志濃王)을 거쳐 중무경(中務卿), 궁내경(宮內卿)을 겸직하는 등 태정관에서도 고위 서열에 자리하였다. 『일본후기』 연력 23년(804) 4월조의 훙전(薨傳)에서 그는 종2위로 추증되었고, 선조는 백제국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인물 평가는 낮았는데, 말이 없는 성격으로 재학(才學)이 결여되었으며 천황의 외척이기 때문에 발탁되어 승진하였고 외국인(蕃人)으로서 공경에 오른 것은 처음이며 천성적으로 자질이 부족했다고 평하였다.
화조신택계(和朝臣宅繼)에 대해서는, 『유취국사』 권180(諸寺, 天長 6년 3월 을미조)에 화조신택계가 약협국(若狹國) 비고신(比古神)을 신주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의 증조부 화조신적마(和朝臣赤麿)는 양로(養老) 연간(717~723)에 도장을 세워 불상을 만들고 이를 신원사(神願寺)라고 명명하였으며 대신(大神)을 위해 수행하니 곡물이 풍년이 들고 요절하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하는 설화가 전한다.
2. 도모왕(都慕王)
도모왕에 대해서는 일본 측 기록에만 보이는 용어로서 발음상의 유사성을 고려하여 고구려의 시조 추모(鄒牟), 주몽(朱蒙)와 동일 인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구려 시조 신화인 동명 신화는 부여의 동명 신화를 차용해서 만든 신화이다. 고구려가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같은 부여족이라는 점 때문에 후대에 가서는 동명과 추모를 동일 인물로 인식하고, 백제 역시 부여족이 남하하여 세운 국이기 때문에 부여의 조신(祖神)인 동명을 백제의 원조(遠祖)로 보기도 하는 것이다.
『속일본기』 연력 9년(790) 정월 임자조(연력 8년 12월부)에 “백제의 원조(遠祖) 도모왕은 하백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되어 출생하였고, 황태후는 그 후손이다”라고 하고, 연력 9년(790) 7월 신사조에도 “무릇 백제 태조 도모대왕은 일신(日神)이 영(靈)을 내려보내 부여에 나라를 열고, 천제가 지배권을 부여하니 한의 제 지역을 지배하여 왕이라고 칭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두 기사 모두 도모왕, 도모대왕이 백제의 원조 혹은 시조로 나온다. 도모를 고구려의 시조인 추모라고 보는 ‘도모추모설’은 『신찬성씨록』을 주석한 좌백유청(佐伯有淸)을 비롯하여 국내 연구자의 연구에서도 대세를 이루었다. 근년에는 부여의 시조인 동명으로 보는 설도 적지 않다.
한편 일본 측 소전에 고구려의 시조는 추모(鄒牟)로 표기되어 있고, 『일본서기』 천지 7년 동10월조에서는 중모왕(仲牟王)으로 나오고 있다. 백제 멸망 후 웅진도독으로 부임한 부여융의 묘지명(682)에는 “하백의 자손으로서 상서로움을 드러냈고……”라고 하여 백제의 왕족이 고구려 하백신의 자손으로 기록되어 있듯이 멸망 직후의 백제인들은 고구려와 시조를 공유하는 동류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위서』 「백제전」 에 나오는 개로왕의 북위에 대한 상표문인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나왔다”라고 하는 출자의식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 측 문헌에 백제의 시조는 도모라고 표기하고 고구려 시조는 추모라고 주장하고 있는 점에서, 백제의 시조 전승은 고구려 추모와는 차별화된 인식이 존재했다고 보인다. 또 도모를 부여의 동명으로 보는 설에 있어서도 백제계 씨족들이 동명을 백제의 시조 신화로 인식하고 계승했다고 한다면 왜 동명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도모라는 용어를 선택했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속일본기』 편자인 진련진도(津連眞道)는 자신의 조상의 출자를 백제왕씨에 부회하는 과정에서 동명 신화를 계승하면서도 고구려 추모왕 신화와 차별화된 백제계 씨족의 변형된 독자적 인식을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3. 무령왕(武寧王)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조에서는 무령왕(501~523년 재위)에 대해서 모대왕(牟大王), 즉 동성왕의 둘째아들로, 휘(諱)는 사마(斯摩) 또는 융(隆)이라고 불렀으며, 시호는 무령(武寧)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일본서기』 웅략기(雄略紀) 5년(461)조에서는 개로왕이 동생 군군(軍君)을 왜국에 파견하면서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부인을 함께 딸려 보냈는데, 그 부인이 축자의 각라도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아이가 섬에서 태어났으므로 도군(島君)이라고 이름짓고, 배 한 척을 마련하여 백제로 돌려보냈는데, 그 도군이 곧 무령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의 ‘사마(斯摩)’와 『일본서기』 의 ‘도(島)’의 일본음은 모두 ‘시마’이다. 무령왕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에서 동성왕의 아들로 나오고, 『일본서기』 에서는 개로왕의 아들로 나오지만 『일본서기』 에 인용된 「백제신찬(百濟新撰)」 에서 말하는 곤지의 아들이다.
무령왕의 탄생 연도는 1971년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릉 묘지석(墓誌石)의 명문을 통해 확인되었다. 즉 이 묘지석에는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 계묘년(523)에 62세로 사망하였다고 새겨져 있어, 그가 462년에 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묘지석 덕분에 무령왕의 출생 연도가 확인되었는데, 1년 차이는 있지만 『일본서기』의 무령왕 탄생 기록이 정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령왕은 백제 왕 중에서 출생 연도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왕이다.
무령왕의 즉위에 대해 『삼국사기』 에서는 동성왕이 위사좌평 백가(苩加)가 파견한 자객에게 시해된 후 즉위하여 백가를 공격해 죽였다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서기』에는 무열(武烈) 4년(501) 시세조에서 「백제신찬」 을 인용하여 백제의 말다왕(末多王)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학하였으므로 국인(國人)이 그를 제거하고 도왕(島王)을 옹립하였는데 그가 바로 무령왕(武寧王)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모두 정변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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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조신(和朝臣; 야마토노아오미) 자료번호 : ss.k_0002_0020_0020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