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는 흉노와의 전투에서 성과를 얻지 못했고 이광리가 흉노에 투항함
그 후 2년이 지나서 다시 이사장군 [이광리]를 시켜 6만의 기병과 보병 7만주 001을 거느리고 삭방에서 나아가게 했다. 강노도위 노박덕이 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사[장군 이광리]와 만났다. 유격장군 [한]열
주 002은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오원[군](五原郡)
주 003에서 나갔다. 인우장군 [공손]오는 만 명의 기병과 보병 삼만 명을 거느리고 안문[군]에서 나갔다. 흉노가 [이 정보를] 듣고 짐이 될 수 있는 처자와 재산[累重]주 004을 모두 여오수(余吾水)
주 005의 북쪽으로 대피시킨 다음 선우가 10만 기를 이끌고 [여오]수 남쪽에서 기다렸다가 이사[장군 이광리]와 전투를 벌였다. 이사[장군 이광리]는 공격을 풀고 되돌아오다가 선우와 연이어 10여 일을 싸웠다. 유격[대장 한열]도 전과가 없었다. 인우[장군 공손오]도 좌현왕과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자 철수해 돌아왔다.주 006
각주 006)
여기까지 『史記』와 『漢書』의 내용이 겹치는 부분인데, 『史記』에서는 “이해에 漢나라 군사로 출정해 匈奴와 싸운 사람 중에서 軍功을 따질 만한 여지조차 없어 論功할 만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 [한편] 조칙을 내려 太醫令 隨但을 체포했는데, [이는] 그가 貳師將軍 [李廣利의] 가족이 몰살되었다고 말해 李廣利를 匈奴에 투항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是歲漢兵之出擊匈奴者不得言功多少, 功不得御. 有詔捕太醫令隨但, 言貳師將軍家室族滅, 使廣利得降匈奴 : 2918).”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전97년까지 『史記』의 기록이 마무리되고 『漢書』에는 그 이후의 부분이 이어진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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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6)
여기까지 『史記』와 『漢書』의 내용이 겹치는 부분인데, 『史記』에서는 “이해에 漢나라 군사로 출정해 匈奴와 싸운 사람 중에서 軍功을 따질 만한 여지조차 없어 論功할 만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 [한편] 조칙을 내려 太醫令 隨但을 체포했는데, [이는] 그가 貳師將軍 [李廣利의] 가족이 몰살되었다고 말해 李廣利를 匈奴에 투항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是歲漢兵之出擊匈奴者不得言功多少, 功不得御. 有詔捕太醫令隨但, 言貳師將軍家室族滅, 使廣利得降匈奴 : 2918).”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전97년까지 『史記』의 기록이 마무리되고 『漢書』에는 그 이후의 부분이 이어진다.
색인어
- 이름
- 이광리, 노박덕, 이광리, [한]열, [공손]오, 이광리, 이광리, 한열, 공손오
- 지명
- 삭방, 오원[군](五原郡), 안문[군], 여오수(余吾水), [여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