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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문궤

전쟁에 대비할 재원을 내주고 병부(兵部) 자문 안의 수목(數目)에 의거하여 조선사신을 대조하게 한다는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의 자문(咨文)

4. 都司因兵禮部將欽賜銀兩貿辦軍火緣由咨會本國
  • 발신자
    요동도지휘사사
  • 발송일
    1593년 12월 30일(음)(만력 21년 12월 30일)
발신: 요동도지휘사사
사유: 전쟁에 대비할 재원을 내주어 방수를 준비할 수 있도록 천조(天朝)의 은혜를 비는 일입니다.
 
[요동도지휘사사] 흠차분수요해동녕도겸이변비둔전산동포정사사우참의 양(호)주 001
각주 001)
양호(楊鎬, ?~1629)이다. 분수산동포정사사는 요양에 있던 산동포정사사의 지부 격으로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밖에 없던 요동의 행정적인 업무를 담당했다. 당시 산동해방첨사(山東海防僉事)였던 양호는 명군의 동정(東征)이 결정된 이후, 영평병비(永平兵備)로서 병력의 선발과 훈련, 둔전(屯田) 및 마정(馬政)을 관할했다. 『神宗實錄』 卷253, 萬曆 20年(1592) 10月 壬辰(6日). 그러다 1년 뒤에는 산동포정사사의 우참의로 승진하였다. 『神宗實錄』 卷266, 萬曆 21年(1593) 11月 辛未(2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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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자문(咨文)을 받았습니다.
[양호] 흠차총독계요보정등처군무겸이양향병부좌시랑겸도찰원우첨도어사 고(양겸)주 002
각주 002)
고양겸(顧養謙, 1537~1604)이다. 고양겸은 명군의 동정이 시작했을 무렵,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에서 좌시랑(左侍郞)으로 승진하여 도찰원(都察院)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로서 계주(薊州)와 요동(遼東), 보정(保定)의 군무를 총괄하는 계요총독(薊遼總督)이 되었다. 『神宗實錄』 卷256, 萬曆 21年(1593) 1月 丁丑(22日). 이전에도 요동순무와 계요총독을 역임한 바 있던 고양겸은 요동 지역의 군정에 밝은 인물이었다. 이 무렵 송응창이 경질되자, 그를 대신하여 경략(經略)의 직함까지 겸대하고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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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안험(案驗)을 받들었습니다.
[고양겸] 병부(兵部)의 자문을 받았습니다.
[병부] 거가청리사(車駕淸吏司)의 안정(案呈)은 다음과 같습니다.
[거가청리사] 본부에서 보낸 문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병부] 예부(禮部)의 자문을 받았습니다.
[예부] 주객청리사(主客淸吏司)의 안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객청리사] 본부가 보낸 문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부] 제독회동관본사주사(提督會同館本司主事) 홍계예(洪啓睿)의 정(呈)을 받았습니다.
[홍계예] 본부가 보낸 문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부] 병부의 자문을 받았습니다. 헤아려 보낸 절선은(折船銀) 2,000냥을 받았다는 본부의 제(題)를 부(部)로 이자했고 (다시) 사(司)로 보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본사의 수본(手本)을 받아 살펴보니, 「제를 올려 공경히 받든 내용의 사리에 의거하여 삼가 준행하여 산출한 은의 수량에 맞추어 구매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홍계예] 저는 이를 받고서 즉시 나와 상인들을 불러 놓고 법도를 세워 관리(官吏)의 삭편(索騙)과 간사한 상인들의 촉탁(囑託)을 엄히 금했습니다. 이어서 배신 허진(許晉)에게 성유(省諭)하여 그들의 통사를 금하여 뇌물을 받는 폐단이 불어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뒤로는 상인 유재(劉才) 등 12명이 각각 물건들이 균등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서 지난달 28일에 출발하여 이달 초9일에 이르러서야 도착했습니다.
 
전후로 거두어들인 각면(角面) 36,000편에 대해 지급한 은(銀) 1,170냥, 염초 23,100근에 대해 지급한 은 415냥 8전, 유황 1,200근에 대해 지급한 은 54냥, 어교(魚膠) 800근에 대해 지급한 은 52냥, 우근(牛筋) 800근에 대해 지급한 은 136냥, 황사(黃絲) 150근에 대해 지급한 은 90냥, 반묘(斑猫) 10근에 대해 지급한 은 17냥, 합용유루대목개(合用油簍帶木盖) 162건에 대해 지급한 은 9냥 7전 2푼, 형광대개(荊筐帶盖) 128건에 대해 지급한 은 8냥 9전 6푼, 조세승(粗細繩) 총 800근에 대해 지급한 은 9냥 6전, 활석(濶席) 70조(條)에 대해 지급한 은 2냥 8전, 홍전(紅氊) 2조에 대해 지급한 은 1냥 6푼, 포대 16건에 대해 지급한 은 6전, 총 13개 항목에 대해 지급한 은의 총량은 1,967냥 5전 4푼.
 
이상의 물건[物料]들을 제가 항목별로 갖추어 변험(辨驗)하고 그들의 통사 신응주(申應㴻)와 군관 원수의(元守義) 등을 독려하면서 함께 다방면으로 가려 뽑아서 쓰임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데 힘쓰고 가치가 공평하게 되도록 널리 물어서 날짜를 헤아려 차례대로 내주니 그 나라 사람들이 뛸 뜻이 기뻐했습니다. 지난번 파격적으로 줄인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써야 할 광주리 같은 물건을 제가 수효에 의거하여 규격에 맞는 꾸러미[包囊]로 마련했는데, 그래도 은 32냥 4전 6푼이 남았습니다. 배신(陪臣)이 “요양(遼陽)에서 강에 이르기까지는 원래 수레[車輛]가 없으니 단지 입구 어귀[頭口]에 보따리와 광주리를 많이 두어서 가벼운 차림으로 그 힘을 절약하게 해야겠으나 방법이 없어 마련해 낼 수 없으니 남은 은을 재원으로 지급하여 앞으로 책응하게 하고자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들어 보니) 말한 정황이 과연 그렇기는 하지만 무기(戰器)와 전량(錢糧)이라서 감히 함부로 편의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였더니, 정(呈)을 올려 병부에 자문을 보내어 결정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거가사(車駕司)의 관원 1원(員)을 관(館)으로 보내어 조사해서 속히 수레를 내주게 하고 요동의 순무에게 행문(行文)하여 전항의 물건들이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수목(數目)이 과연 서로 맞는지를 대조해서 조사하게 한 뒤, 국왕에게도 보고를 전보(轉報)하여 은택을 알게 해서 더욱 충성과 용맹을 떨치게 한다면 아마도 간악함을 깨끗이 없앨 수 있을 것이고 속국(屬國)의 군신(君臣)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정에서 내린 재조(再造)를 입게 될 것입니다.
[예부] 부(예부)에 정문(呈文)한 것을 사(주객청리사)로 보냈습니다. (사의) 안정이 부에 이르렀습니다.
[주객청리사] 헤아려 보건대 바로 시행함이 마땅하겠습니다.
[예부] 이에 마땅히 귀부(貴部)에 자문을 보내오니, 번거롭더라도 요동순무(遼東巡撫)에게 전달하여 살피도록 해 주십시오.
[병부] 부(병부)에 도착한 것을 사(거가청리사)로 보냈습니다. 이달 초5일에 받은 조선국의 배신 허진의 정문을 조사해 보니, 「기계(器械)‧화약(火藥)을 실어 나를 수레[車輛]와 군부(軍夫), 말‧노새를 내어 달라고 이미 자문을 보내어 알렸습니다.」라고 한 것 외에도, 지금 위의 자문을 받았고 (이에 관한) 안정이 부에 이르렀습니다.
[거가청리사] 헤아려 보건대 바로 시행함이 마땅하겠습니다.
[병부] 이에 마땅히 자문을 보내오니 번거롭더라도 각 병비도(兵備道)에 전(轉)하여 만약 기계와 물건 들을 운반해서 그쪽으로 오는 조선국의 사신을 만나거든 자문 안의 수목에 의거하여 일일이 들어맞는지 대조한 뒤 속히 내주십시오. 이어서 먼저 앞의 기계와 물건의 수목을 모두 보내어 조선국왕에게도 알려 주십시오.
[고양겸] 이를 받고 헤아려 보건대 바로 시행함이 마땅하겠습니다. 이에 안험을 해도(該道)에 내리니, 안험을 살펴서 갖추어 보내온 문서의 사리를 즉시 도(道)에 속한 군위유사(軍衛有司)에 전해 주어 역체(驛遆) 아문의 관리가 만약 기계와 물건 들을 운반해서 그쪽으로 오는 조선국의 사신을 만나거든 병부 자문 안의 수목에 의거하여 일일이 들어맞는지 대조한 뒤 속히 내주십시오. 이어서 요동도사(遼東都司)에 보내어 앞서 전항의 기계 수목을 모두 보내어 조선국왕에게 알려 주십시오.
[양호] 이를 받고 헤아려 보건대 바로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이에 마땅히 자문을 보내니, 번거롭더라도 조선국왕에게 전하여 알려 주십시오. 아울러 바라건대 사유에 대해서 회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요동도지휘사사] 이를 받고 헤아려 보건대 바로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이에 마땅히 자문을 귀국에 보내오니, 번거롭더라도 알려 주십시오. 자문이 잘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이 자문을 조선국왕에게 보냅니다.
 
만력 21년 12월 30일.

  • 각주 001)
    양호(楊鎬, ?~1629)이다. 분수산동포정사사는 요양에 있던 산동포정사사의 지부 격으로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밖에 없던 요동의 행정적인 업무를 담당했다. 당시 산동해방첨사(山東海防僉事)였던 양호는 명군의 동정(東征)이 결정된 이후, 영평병비(永平兵備)로서 병력의 선발과 훈련, 둔전(屯田) 및 마정(馬政)을 관할했다. 『神宗實錄』 卷253, 萬曆 20年(1592) 10月 壬辰(6日). 그러다 1년 뒤에는 산동포정사사의 우참의로 승진하였다. 『神宗實錄』 卷266, 萬曆 21年(1593) 11月 辛未(21日). 바로가기
  • 각주 002)
    고양겸(顧養謙, 1537~1604)이다. 고양겸은 명군의 동정이 시작했을 무렵,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에서 좌시랑(左侍郞)으로 승진하여 도찰원(都察院)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로서 계주(薊州)와 요동(遼東), 보정(保定)의 군무를 총괄하는 계요총독(薊遼總督)이 되었다. 『神宗實錄』 卷256, 萬曆 21年(1593) 1月 丁丑(22日). 이전에도 요동순무와 계요총독을 역임한 바 있던 고양겸은 요동 지역의 군정에 밝은 인물이었다. 이 무렵 송응창이 경질되자, 그를 대신하여 경략(經略)의 직함까지 겸대하고 활동하였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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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대비할 재원을 내주고 병부(兵部) 자문 안의 수목(數目)에 의거하여 조선사신을 대조하게 한다는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의 자문(咨文) 자료번호 : sdmg.k_0002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