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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벽해(辟奚)가 세형제의 죽음으로 괴로워하다 죽으니 시련(視連)이 즉위함

  • 국가
    토욕혼(吐谷渾)
당시 벽해에게는 세 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모두 전횡을 일삼으며 교만하였다. 장사(長史)인 종악지(鍾惡地)가 이들이 나라의 해가 될까 걱정하며 사마(司馬)인 걸숙운(乞宿雲)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 옛날 정장공(鄭莊公) 주 001
각주 001)
鄭莊公(전761~전701):鄭莊公은 鄭武公의 아들이다. 이름은 寤生이며, 그 동생 共叔段의 반란을 평정하고 武公의 뒤를 계승하여 周 平王의 卿이 되어 春秋五覇의 하나로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다. 본문에서 말하는 동생은 바로 共叔段을 말한다. 共叔段은 申侯의 딸인 武姜의 소생으로 鄭莊公과는 친형제간이다. 어머니 武姜이 형인 寤生이 아닌 共叔段이 武公의 뒤를 계승하기를 원하는 바람에 결국 정장공이 즉위한 이후에 반란의 불씨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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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소왕(秦昭王) 주 002
각주 002)
秦昭王(전324~전250):秦昭襄王을 말한다. 秦惠文王의 아들이자 武王의 동생이다. 秦昭王 때 명신 范睢와 명장 白起 등을 중용하여 秦이 천하통일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강력한 왕권을 다지기까지 秦昭王 초중반까지 조정의 대권은 昭王의 생모인 宣太后와 외삼촌 穰侯, 華陽君 그리고 涇陽君과 高陵君이라고 하는 두 명의 동생이 좌지우지하던 상태였다. 본문에서는 동생 하나라고 했지만 이처럼 秦昭王에게도 두 명의 동생이 있었다. 이 두 동생은 宣太后가 義渠王 사이에서 낳은 자식일 가능성이 크다. 『後漢書』 「西羌傳」에 따르면, 宣太后는 秦에 입조하러 온 義渠王을 유혹해서 눌러앉혀 그와의 사이에서 두 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후에 甘泉宮에서 살해하여 의거국을 멸망시켜 그 땅을 진에 완전 복속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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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동생 하나 때문에 종사(宗祀)가 위태로워졌소. 하물며 지금 세 형제가 모두 교만하니, 반드시 사직의 우환이 될 것이오. 나는 공과 함께 원보(元輔)의 책임을 맡고 있소. 만약 머리를 [잘리지 않고] 온전히 보존하여 그대로 늙어 죽는다면, 주 003
각주 003)
이 구절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목숨을 부지해 천수를 다한다는 의미를 이와 같이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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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 계신 선군(先君)께서 물으면 뭐라 대답할 수 있겠소! 내가 이제 그들을 죽이겠소.” 걸숙운벽해에게 먼저 알리자고 하였으나 종악지는, “우리 왕은 우유부단하니 알리지 않는 게 좋겠소”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신하들이 입조하여 벽해를 알현할 때를 노려 마침내 세 형제를 잡아 죽여버렸다.
벽해가 [그 사실을 알고는] 평상에 몸을 던지니 종악지 등이 달려가 부축하였다. 종악지는 말하기를, “신이 어젯밤 꿈속에서 선왕을 뵈었는데 신에게 세 동생이 장차 역모를 일으킬테니 너는 속히 그들을 없애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은 삼가 선왕의 명을 받들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벽해는 평소 형제와 우애가 깊었기에 순식간에 병을 얻어 세자인 시련(視連)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동생들을 죽이고 말았으니 어찌 지하에서 그들을 볼 수 있겠는가! 크고 작은 나랏일을 네가 맡아서 처리하도록 하라. 이제 얼마 안 남은 여생, [이 한몸] 기탁해서 살고자 한다.” 그리고는 마침내 시름에 겨워하다가 죽고 말았다. 재위 25년이었으며 42세였다. 슬하에 6명의 자식을 두었으며 시련(視連)이 그 뒤를 이었다.

  • 각주 001)
    鄭莊公(전761~전701):鄭莊公은 鄭武公의 아들이다. 이름은 寤生이며, 그 동생 共叔段의 반란을 평정하고 武公의 뒤를 계승하여 周 平王의 卿이 되어 春秋五覇의 하나로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다. 본문에서 말하는 동생은 바로 共叔段을 말한다. 共叔段은 申侯의 딸인 武姜의 소생으로 鄭莊公과는 친형제간이다. 어머니 武姜이 형인 寤生이 아닌 共叔段이 武公의 뒤를 계승하기를 원하는 바람에 결국 정장공이 즉위한 이후에 반란의 불씨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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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秦昭王(전324~전250):秦昭襄王을 말한다. 秦惠文王의 아들이자 武王의 동생이다. 秦昭王 때 명신 范睢와 명장 白起 등을 중용하여 秦이 천하통일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강력한 왕권을 다지기까지 秦昭王 초중반까지 조정의 대권은 昭王의 생모인 宣太后와 외삼촌 穰侯, 華陽君 그리고 涇陽君과 高陵君이라고 하는 두 명의 동생이 좌지우지하던 상태였다. 본문에서는 동생 하나라고 했지만 이처럼 秦昭王에게도 두 명의 동생이 있었다. 이 두 동생은 宣太后가 義渠王 사이에서 낳은 자식일 가능성이 크다. 『後漢書』 「西羌傳」에 따르면, 宣太后는 秦에 입조하러 온 義渠王을 유혹해서 눌러앉혀 그와의 사이에서 두 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후에 甘泉宮에서 살해하여 의거국을 멸망시켜 그 땅을 진에 완전 복속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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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이 구절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목숨을 부지해 천수를 다한다는 의미를 이와 같이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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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벽해, 종악지(鍾惡地), 걸숙운(乞宿雲), 정장공(鄭莊公), 진소왕(秦昭王), 걸숙운, 벽해, 종악지, 벽해, 벽해, 종악지, 종악지, 벽해, 시련(視連), 시련(視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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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해(辟奚)가 세형제의 죽음으로 괴로워하다 죽으니 시련(視連)이 즉위함 자료번호 : jo.k_0005_0097_0040_00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