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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국(加羅國)의 사신과 방물

가라국주 001
번역주 001)
加羅國 : 가라국의 가라는 중국 문헌에는 加羅 또는 加邏로 표기되어 있으며, 한국·일본 측 기록에는 加羅·加良·加耶·伽倻·狗邪·駕洛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가라 또는 가야에 대한 문헌사료 중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차자는 加羅가 47회이고, 그다음으로 加耶가 31회, 伽倻가 28회, 駕洛이 15회, 伽耶가 14회 등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라 또는 가야는 ‘갓나라[邊國]’를 뜻하는 말로 보기도 하며(李丙燾, 1976), 일족·동족을 뜻하는 만주어의 hala, 혹은 퉁구스어의 kala, Xala와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다(崔鶴根, 1968). 사실 가야사는 그 本紀의 入傳이 사서에 따로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를 가리키는 명칭도 사료의 계통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그러므로 그 연구대상을 어느 문헌에 근거하여 논리를 전개해야 하는가 하는 기본적인 문제가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자료로 김태식·이익주 편, 1992가 있으며, 천관우, 1991 ; 김태식, 1993 ; 한국고대사연구회, 1995 ;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00 ;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01 ; 한국상고사학회, 2002 등의 연구성과를 참고할 수 있다. 아울러 가라 또는 가야의 기원과 그 명칭의 분포에 대한 연구성과를 살펴보면, 가야라는 말의 기원에 대해서는 (1) 駕那설 : 끝이 뾰족한 冠幘, (2) 평야설 : 남방 잠어에서 ‘개간한 평야’를 뜻하는 말인 가라(Kala), (3) 간나라설 : ‘신의 나라[神國]’ 또는 ‘큰 나라’의 뜻, (4) 갓나라설 : 가야가 한반도 남단의 해변에 위치함으로써 ‘갓나라[邊國]’로 불린 것, (5) 가람설 : 가야 제국이 여러 갈래로 나뉜 낙동강 지류에 인접해 있었으므로, 가야는 ‘[江]’ 또는 ‘가=갈래[분기]’라는 뜻, (6) 겨레설 : ‘겨레[姓, 一族]’라는 말의 기원이고, 그 근원은 알타이 제어의 ‘사라(Xala)[姓, 一族]’에 있으며, 그것이 가라(Kala) > 가야(Kaya) > 캬레(Kya + re) > 겨레(Kyeore)로 음운 변천, (7) 성읍설 : 가야는 곧 ‘[大, 長의 뜻]’이며, 그 어원은 ‘城邑’의 뜻을 가진 ‘溝婁’라는 학설 등이 있다. 그 가운데 현재로서는 겨레설이 다수설(崔鶴根, 1968 ; 김태식, 2003)이다. 지명·국명으로서의 가라·가야를 가리키는 借字의 용례로는 狗邪·拘邪·加耶·伽耶·伽倻·加羅·伽羅·迦羅·呵囉·柯羅·加良·伽落·駕洛 등 10여 종이 있다(김태식, 2003).
[가라·가야 차자의 출전 및 사용 빈도]
借字(頻度)初見出典最頻出典出典(使用頻度)
狗邪(2)삼국지삼국지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전(1)·왜인(1)
拘邪(1)삼국지삼국지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1)
加耶(31)삼국사기삼국사기삼국사기 신라본기(19)·악지(2)·지리지(3)·열전(4), 고려사 지리지(2), 동국여지승람(1)
伽耶(14)삼국사기삼국유사삼국사기 지리지(1), 삼국유사 왕력(1)·오가야(8)·가락국기(4)
伽倻(28)고려사동국여지승람고려사 지리지(3), 동국여지승람(25)
加羅(47)광개토왕릉비일본서기광개토왕릉비(1), 송서 왜국전(3), 남사 왜국전(3), 남제서 가라국전(2)·왜국전(1), 통전 신라전(1), 일본서기(29), 신찬성씨록(1), 삼국사기 신라본기(2)·악지(2)·열전(2)
伽羅(1)양서양서양서 왜전(1)
迦羅(2)수서수서·북사수서 신라전(1), 북사 신라전(1)
呵囉(1)삼국유사삼국유사삼국유사 어산불영(1)
柯羅(3)일본서기일본서기일본서기(3)
加良(2)삼국사기삼국사기삼국사기 신라본기(1)·강수전(1)
伽落(1)삼국사기삼국사기삼국사기 지리지(1)
駕洛(15)삼국사기삼국유사삼국사기 김유신전(1), 삼국유사 왕력(1)·오가야(1)·제사탈해왕(1)·가락국기(5), 동국여지승람(6)

특히, 중국 정사 중 가야에 대하여 입전하고 있는 것은 『남제서』가 유일한데, 이는 5세기 말 가야의 활발한 해상활동을 반영한 것으로 주목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남제서』 가라전은 국왕 하지가 479년 남제와 교섭하여 책봉을 받았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을 뿐, 가라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서술은 없다. 당시 대가야는 일단 육로로 河東 지역으로 나와 해로로 중국에까지 교통하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 교통로를 보유하기 위해서는 가야 지역 내부의 통솔 관계를 분명히 하고 해로에 대해 백제·고구려가 가하는 제약을 극복해야만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내적·외적 제약을 극복하고, 가라왕 하지가 對中交易을 독자적으로 성공시켜 남제로부터 제3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받았다는 점은 가야 지역에 신라나 백제에 의존치 않는 독립적인 지배 권력의 성장이 있었다는 증거로서 제시될 수 있다(김태식,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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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삼한주 002
번역주 002)
三韓 : 삼한은 馬韓·辰韓·弁韓을 말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제기되어 왔으나, 일반적으로 마한은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역에, 진한과 변한은 경상도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고 있다. 대체로 낙동강을 경계로 동쪽 지역을 진한, 서쪽 지역을 변한이라 하여 지역적으로 구분하기도 하나, 예외도 있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삼한 사회에 대한 사료로 가장 중요하면서 오래된 것은 중국 측 기록인 『三國志』 위서 동이전이며, 그 내용이 『後漢書』·『晉書』 등에 축약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매우 소략하여 전모를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삼국의 역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삼국사기』·『삼국유사』 등 우리 측 문헌기록에는 더욱 단편적인 내용만 실려 있어 삼한의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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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한 종족주 003
번역주 003)
加羅國 三韓種也 : 가라국이 삼한의 한 종족이라는 것은 弁辰을 두고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후한서』·『삼국지』 등의 사료상에는 삼한에 가라국이 포함되지 않았으나, 변진 지역에서 가라국이 뒤에 등장하여 변진 지역과 가라국이 차지한 지역이 대체로 같게 되었기 때문에 가라국이 삼한의 한 종족이라고 말하게 된 것 같다. 『삼국지』 동이전 변진조에 3세기 중엽 낙동강 중·하류지역의 변한 12국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이들 나라 중 狗邪國·彌烏邪馬國·安邪國을 제외하고는 그 위치를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에서는 본가야를 비롯한 대가야·고령가야·성산가야·소가야 등 6가야의 이름이 보이며, 같은 책에 인용된 『本朝史略』에서는 본가야 대신 비화가야의 이름이 보인다. 12국이나 가야 6국은 개별적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되며, 대개 4세기 초를 경계로 하여 변한에서 가야로 그 명칭이 바뀌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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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건원 원년(479)에 국왕 하지주 004
번역주 004)
國王 荷知 : 가라의 여러 나라 중에서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본가야는 기원전 1세기경부터 해상교역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중국 군현과 일본에 대한 무역 중계지로서의 기능을 가졌는데, 이러한 활발한 해상활동을 통하여 본가야는 낙동강 하구의 가야 소국은 물론 가야 전체를 대표하는 맹주로 등장한 듯하다. 또한 5세기 중엽 이후 고구려가 평양 천도(427)를 계기로 하여 적극적인 남하정책을 펴기 시작하면서 가라는 백제·신라의 두 나라에 있어서 전략상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본문의 ‘建元元年 國王荷知使來獻’은 이 당시에 가야에서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내어 국제무대에 등장하려고 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가 가야의 여러 나라 가운데서 어느 나라의 왕인지는 확실히 밝혀지고 있지 않으나, 본문에 나오는 ‘本國王’으로 미루어 본가야의 국왕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駕洛國記』의 본가야 世系에는 479년 당시의 왕이 銍知王(451~492)으로 되어 있어 그 이름이 같지 않다. 그런 이유로 하지를 대가야의 왕으로 보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千寬宇, 1991). 또한 『가락국기』의 기년에 상당한 오차를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하지왕을 질지왕 다음의 鉗知王에 比擬하는 견해도 있다(今西龍, 1920). 한편, 가라국을 경북 고령의 대가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김태식, 2014)도 있다. 즉, 가라국왕 하지는 南齊에 조공하고 ‘輔國將軍本國王’이라는 장군호와 작호를 받았다. 보국장군은 남제의 官階로 제3품에 해당되어 표기대장군, 정동대장군, 진동대장군 등 제 2품을 받은 고구려, 백제, 왜의 국왕보다 1등급이 낮다. 그러나 이 당시에 백제나 왜는 실제로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은 것이 아니라 宋代의 조공을 참작하여 남제가 왕조 개창 기념으로 서류상의 승진을 시켜준 것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중국과 직접적으로 교류한 적 없던 대가야가 처음으로 조공하여 제3품의 장군호를 받은 것은 의미가 크다(김태식, 2006)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대가야는 475년 고구려에 의해 백제 漢城이 함락당한 사건을 계기로 하여 독자적인 움직임을 좀 더 강화하였다. 加羅國王 荷知는 479년에 독자적으로 중국 남제와 교역하여 ‘輔國將軍本國王’이라는 작호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 479년에 가라왕 하지가 머나먼 중국 남제에 사신을 보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하지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낸 것은 가라의 발전 도상에 매우 중요한 도약을 시사하고 가라가 초기 고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단서를 보인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라의 중국에 대한 사신 파견이 그 뒤로 계속 이어지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일정한 한계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것만으로 가라가 초기 고대 국가를 이루었다고 단정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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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사신을 보내와 방물을 바쳤다. 이에 조서를 내렸다. “널리 헤아려 비로소 [조정에] 올라오니, 멀리 있는 이(夷)가 두루 덕에 감화됨이라. 가라왕 하지는 먼 동쪽 바다 밖에서 폐백을 받들고 관문을 두드렸으니, 보국장군주 005
번역주 005)
輔國將軍 : 보국장군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자료인 『宋書』 百濟國傳에 의하면, 行冠軍將軍 右賢王 餘紀는 冠軍將軍으로, 行征虜將軍 左賢王 餘昆과 行征虜將軍 餘暈는 모두 征虜將軍으로, 行輔國將軍 餘都와 餘乂는 모두 輔國將軍으로, 行龍驤將軍 沐衿과 餘爵은 모두 龍驤將軍으로, 行寧朔將軍 餘流와 麋貴는 모두 寧朔將軍으로, 行建武將軍 于西와 餘婁는 모두 建武將軍으로 삼아 모두 將軍號를 내려 주고 있다. 남송의 장군 官品에 대해서는 『송서』 百官志의 장군호를 토대로 만든 다음 표를 참고할 수 있다(坂元義種, 1968 ; 1978).
[南宋의 將軍官品]
第一品第二品第三品第四品
大將軍驃騎 將軍四征 將軍寧朔 將軍
車騎 將軍四鎭 將軍五威 將軍
衛 將軍 五武 將軍
四安 將軍
諸大 將軍四平 將軍
征虜 將軍
冠軍 將軍
輔國 將軍
龍驤 將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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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왕의 벼슬을 제수함이 합당하다.”

  • 번역주 001)
    加羅國 : 가라국의 가라는 중국 문헌에는 加羅 또는 加邏로 표기되어 있으며, 한국·일본 측 기록에는 加羅·加良·加耶·伽倻·狗邪·駕洛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가라 또는 가야에 대한 문헌사료 중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차자는 加羅가 47회이고, 그다음으로 加耶가 31회, 伽倻가 28회, 駕洛이 15회, 伽耶가 14회 등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라 또는 가야는 ‘갓나라[邊國]’를 뜻하는 말로 보기도 하며(李丙燾, 1976), 일족·동족을 뜻하는 만주어의 hala, 혹은 퉁구스어의 kala, Xala와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다(崔鶴根, 1968). 사실 가야사는 그 本紀의 入傳이 사서에 따로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를 가리키는 명칭도 사료의 계통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그러므로 그 연구대상을 어느 문헌에 근거하여 논리를 전개해야 하는가 하는 기본적인 문제가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자료로 김태식·이익주 편, 1992가 있으며, 천관우, 1991 ; 김태식, 1993 ; 한국고대사연구회, 1995 ;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00 ;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01 ; 한국상고사학회, 2002 등의 연구성과를 참고할 수 있다. 아울러 가라 또는 가야의 기원과 그 명칭의 분포에 대한 연구성과를 살펴보면, 가야라는 말의 기원에 대해서는 (1) 駕那설 : 끝이 뾰족한 冠幘, (2) 평야설 : 남방 잠어에서 ‘개간한 평야’를 뜻하는 말인 가라(Kala), (3) 간나라설 : ‘신의 나라[神國]’ 또는 ‘큰 나라’의 뜻, (4) 갓나라설 : 가야가 한반도 남단의 해변에 위치함으로써 ‘갓나라[邊國]’로 불린 것, (5) 가람설 : 가야 제국이 여러 갈래로 나뉜 낙동강 지류에 인접해 있었으므로, 가야는 ‘[江]’ 또는 ‘가=갈래[분기]’라는 뜻, (6) 겨레설 : ‘겨레[姓, 一族]’라는 말의 기원이고, 그 근원은 알타이 제어의 ‘사라(Xala)[姓, 一族]’에 있으며, 그것이 가라(Kala) > 가야(Kaya) > 캬레(Kya + re) > 겨레(Kyeore)로 음운 변천, (7) 성읍설 : 가야는 곧 ‘[大, 長의 뜻]’이며, 그 어원은 ‘城邑’의 뜻을 가진 ‘溝婁’라는 학설 등이 있다. 그 가운데 현재로서는 겨레설이 다수설(崔鶴根, 1968 ; 김태식, 2003)이다. 지명·국명으로서의 가라·가야를 가리키는 借字의 용례로는 狗邪·拘邪·加耶·伽耶·伽倻·加羅·伽羅·迦羅·呵囉·柯羅·加良·伽落·駕洛 등 10여 종이 있다(김태식, 2003).
    [가라·가야 차자의 출전 및 사용 빈도]
    借字(頻度)初見出典最頻出典出典(使用頻度)
    狗邪(2)삼국지삼국지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전(1)·왜인(1)
    拘邪(1)삼국지삼국지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1)
    加耶(31)삼국사기삼국사기삼국사기 신라본기(19)·악지(2)·지리지(3)·열전(4), 고려사 지리지(2), 동국여지승람(1)
    伽耶(14)삼국사기삼국유사삼국사기 지리지(1), 삼국유사 왕력(1)·오가야(8)·가락국기(4)
    伽倻(28)고려사동국여지승람고려사 지리지(3), 동국여지승람(25)
    加羅(47)광개토왕릉비일본서기광개토왕릉비(1), 송서 왜국전(3), 남사 왜국전(3), 남제서 가라국전(2)·왜국전(1), 통전 신라전(1), 일본서기(29), 신찬성씨록(1), 삼국사기 신라본기(2)·악지(2)·열전(2)
    伽羅(1)양서양서양서 왜전(1)
    迦羅(2)수서수서·북사수서 신라전(1), 북사 신라전(1)
    呵囉(1)삼국유사삼국유사삼국유사 어산불영(1)
    柯羅(3)일본서기일본서기일본서기(3)
    加良(2)삼국사기삼국사기삼국사기 신라본기(1)·강수전(1)
    伽落(1)삼국사기삼국사기삼국사기 지리지(1)
    駕洛(15)삼국사기삼국유사삼국사기 김유신전(1), 삼국유사 왕력(1)·오가야(1)·제사탈해왕(1)·가락국기(5), 동국여지승람(6)

    특히, 중국 정사 중 가야에 대하여 입전하고 있는 것은 『남제서』가 유일한데, 이는 5세기 말 가야의 활발한 해상활동을 반영한 것으로 주목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남제서』 가라전은 국왕 하지가 479년 남제와 교섭하여 책봉을 받았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을 뿐, 가라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서술은 없다. 당시 대가야는 일단 육로로 河東 지역으로 나와 해로로 중국에까지 교통하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 교통로를 보유하기 위해서는 가야 지역 내부의 통솔 관계를 분명히 하고 해로에 대해 백제·고구려가 가하는 제약을 극복해야만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내적·외적 제약을 극복하고, 가라왕 하지가 對中交易을 독자적으로 성공시켜 남제로부터 제3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받았다는 점은 가야 지역에 신라나 백제에 의존치 않는 독립적인 지배 권력의 성장이 있었다는 증거로서 제시될 수 있다(김태식, 2003). 바로가기
  • 번역주 002)
    三韓 : 삼한은 馬韓·辰韓·弁韓을 말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제기되어 왔으나, 일반적으로 마한은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역에, 진한과 변한은 경상도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고 있다. 대체로 낙동강을 경계로 동쪽 지역을 진한, 서쪽 지역을 변한이라 하여 지역적으로 구분하기도 하나, 예외도 있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삼한 사회에 대한 사료로 가장 중요하면서 오래된 것은 중국 측 기록인 『三國志』 위서 동이전이며, 그 내용이 『後漢書』·『晉書』 등에 축약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매우 소략하여 전모를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삼국의 역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삼국사기』·『삼국유사』 등 우리 측 문헌기록에는 더욱 단편적인 내용만 실려 있어 삼한의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加羅國 三韓種也 : 가라국이 삼한의 한 종족이라는 것은 弁辰을 두고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후한서』·『삼국지』 등의 사료상에는 삼한에 가라국이 포함되지 않았으나, 변진 지역에서 가라국이 뒤에 등장하여 변진 지역과 가라국이 차지한 지역이 대체로 같게 되었기 때문에 가라국이 삼한의 한 종족이라고 말하게 된 것 같다. 『삼국지』 동이전 변진조에 3세기 중엽 낙동강 중·하류지역의 변한 12국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이들 나라 중 狗邪國·彌烏邪馬國·安邪國을 제외하고는 그 위치를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에서는 본가야를 비롯한 대가야·고령가야·성산가야·소가야 등 6가야의 이름이 보이며, 같은 책에 인용된 『本朝史略』에서는 본가야 대신 비화가야의 이름이 보인다. 12국이나 가야 6국은 개별적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되며, 대개 4세기 초를 경계로 하여 변한에서 가야로 그 명칭이 바뀌는 것으로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國王 荷知 : 가라의 여러 나라 중에서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본가야는 기원전 1세기경부터 해상교역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중국 군현과 일본에 대한 무역 중계지로서의 기능을 가졌는데, 이러한 활발한 해상활동을 통하여 본가야는 낙동강 하구의 가야 소국은 물론 가야 전체를 대표하는 맹주로 등장한 듯하다. 또한 5세기 중엽 이후 고구려가 평양 천도(427)를 계기로 하여 적극적인 남하정책을 펴기 시작하면서 가라는 백제·신라의 두 나라에 있어서 전략상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본문의 ‘建元元年 國王荷知使來獻’은 이 당시에 가야에서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내어 국제무대에 등장하려고 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가 가야의 여러 나라 가운데서 어느 나라의 왕인지는 확실히 밝혀지고 있지 않으나, 본문에 나오는 ‘本國王’으로 미루어 본가야의 국왕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駕洛國記』의 본가야 世系에는 479년 당시의 왕이 銍知王(451~492)으로 되어 있어 그 이름이 같지 않다. 그런 이유로 하지를 대가야의 왕으로 보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千寬宇, 1991). 또한 『가락국기』의 기년에 상당한 오차를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하지왕을 질지왕 다음의 鉗知王에 比擬하는 견해도 있다(今西龍, 1920). 한편, 가라국을 경북 고령의 대가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김태식, 2014)도 있다. 즉, 가라국왕 하지는 南齊에 조공하고 ‘輔國將軍本國王’이라는 장군호와 작호를 받았다. 보국장군은 남제의 官階로 제3품에 해당되어 표기대장군, 정동대장군, 진동대장군 등 제 2품을 받은 고구려, 백제, 왜의 국왕보다 1등급이 낮다. 그러나 이 당시에 백제나 왜는 실제로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은 것이 아니라 宋代의 조공을 참작하여 남제가 왕조 개창 기념으로 서류상의 승진을 시켜준 것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중국과 직접적으로 교류한 적 없던 대가야가 처음으로 조공하여 제3품의 장군호를 받은 것은 의미가 크다(김태식, 2006)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대가야는 475년 고구려에 의해 백제 漢城이 함락당한 사건을 계기로 하여 독자적인 움직임을 좀 더 강화하였다. 加羅國王 荷知는 479년에 독자적으로 중국 남제와 교역하여 ‘輔國將軍本國王’이라는 작호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 479년에 가라왕 하지가 머나먼 중국 남제에 사신을 보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하지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낸 것은 가라의 발전 도상에 매우 중요한 도약을 시사하고 가라가 초기 고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단서를 보인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라의 중국에 대한 사신 파견이 그 뒤로 계속 이어지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일정한 한계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것만으로 가라가 초기 고대 국가를 이루었다고 단정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輔國將軍 : 보국장군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자료인 『宋書』 百濟國傳에 의하면, 行冠軍將軍 右賢王 餘紀는 冠軍將軍으로, 行征虜將軍 左賢王 餘昆과 行征虜將軍 餘暈는 모두 征虜將軍으로, 行輔國將軍 餘都와 餘乂는 모두 輔國將軍으로, 行龍驤將軍 沐衿과 餘爵은 모두 龍驤將軍으로, 行寧朔將軍 餘流와 麋貴는 모두 寧朔將軍으로, 行建武將軍 于西와 餘婁는 모두 建武將軍으로 삼아 모두 將軍號를 내려 주고 있다. 남송의 장군 官品에 대해서는 『송서』 百官志의 장군호를 토대로 만든 다음 표를 참고할 수 있다(坂元義種, 1968 ; 1978).
    [南宋의 將軍官品]
    第一品第二品第三品第四品
    大將軍驃騎 將軍四征 將軍寧朔 將軍
    車騎 將軍四鎭 將軍五威 將軍
    衛 將軍 五武 將軍
    四安 將軍
    諸大 將軍四平 將軍
    征虜 將軍
    冠軍 將軍
    輔國 將軍
    龍驤 將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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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국(加羅國)의 사신과 방물 자료번호 : jd.k_0007_0058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