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
에 있는 발해 정효공주의 무덤이다. 정효공주(貞孝公主)는 제3대 문왕(文王)의 넷째 딸로서, 757년에 태어나 792년 6월에 3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묘도는 남쪽에 계단식으로 두 번에 걸쳐 만들었다. 묘문은 벽돌로 쌓아 막았고, 그 뒤에 널길이 있다. 중간에는 판석과 나무로 만든 이중의 문이, 문 뒤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관대의 남쪽 측면에서 사자머리 같은 그림이 확인되었다. 무덤에서 남녀 각 1인의 인골(人骨)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곳에 공주와 남편의 관이 각각 올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네 벽은 벽돌로 쌓았고, 그 위에 벽돌과 장대석을 쌓아 계단식으로 공간을 줄여나갔다. 그 뒤에 몇 개의 판석을 동서 방향으로 덮은 말각조정 천장을 만들었다. 따라서 벽돌로 무덤 벽을 쌓는 당나라 양식과 돌로 공간을 줄여 나가면서 천장을 쌓는 고구려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이 무덤은 일찍이 도굴되어 유물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발굴 과정에서 벽화와 묘비(墓碑)를 비롯해 도용(陶俑) 조각, 도금한 구리 장식품과 구리못, 쇠못, 칠기 조각, 글씨가 새겨진 벽돌 등이 발견되었다.
널방의 동·서·북쪽 벽과 널길의 동·서쪽 벽에 그려진 벽화는 처음으로 발해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두 12명인 인물상은 무사(武士), 시위(侍衛), 내시(內侍), 악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주인공은 그려져 있지 않다. 인물은 대체로 뺨이 둥글고 얼굴이 통통한 당나라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정효공주묘비문은 앞면에만 모두 18행 728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 중 719자가 판독 가능하다. 비문에서는 다양한 중국의 유교 경전과 역사서들을 두루 인용하고 있으며, 변려체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 발해 국왕과 공주의 덕을 칭송하는 구절들에 다양한 유교적인 수사를 사용하고 있어 문왕(文王) 이후 발해사회에 유학(儒學)이 널리 보급·확산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수향 용해촌 서쪽의 용두산묘도는 남쪽에 계단식으로 두 번에 걸쳐 만들었다. 묘문은 벽돌로 쌓아 막았고, 그 뒤에 널길이 있다. 중간에는 판석과 나무로 만든 이중의 문이, 문 뒤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관대의 남쪽 측면에서 사자머리 같은 그림이 확인되었다. 무덤에서 남녀 각 1인의 인골(人骨)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곳에 공주와 남편의 관이 각각 올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네 벽은 벽돌로 쌓았고, 그 위에 벽돌과 장대석을 쌓아 계단식으로 공간을 줄여나갔다. 그 뒤에 몇 개의 판석을 동서 방향으로 덮은 말각조정 천장을 만들었다. 따라서 벽돌로 무덤 벽을 쌓는 당나라 양식과 돌로 공간을 줄여 나가면서 천장을 쌓는 고구려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이 무덤은 일찍이 도굴되어 유물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발굴 과정에서 벽화와 묘비(墓碑)를 비롯해 도용(陶俑) 조각, 도금한 구리 장식품과 구리못, 쇠못, 칠기 조각, 글씨가 새겨진 벽돌 등이 발견되었다.
널방의 동·서·북쪽 벽과 널길의 동·서쪽 벽에 그려진 벽화는 처음으로 발해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두 12명인 인물상은 무사(武士), 시위(侍衛), 내시(內侍), 악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주인공은 그려져 있지 않다. 인물은 대체로 뺨이 둥글고 얼굴이 통통한 당나라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정효공주묘비문은 앞면에만 모두 18행 728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 중 719자가 판독 가능하다. 비문에서는 다양한 중국의 유교 경전과 역사서들을 두루 인용하고 있으며, 변려체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 발해 국왕과 공주의 덕을 칭송하는 구절들에 다양한 유교적인 수사를 사용하고 있어 문왕(文王) 이후 발해사회에 유학(儒學)이 널리 보급·확산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