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무장해제
2. 일본군의 무장해제
패전과 함께 일본제국 군대는 모두 무장해제를 당했다. 일부 일본군육군 장교 가운데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육군본부 지휘부의 반대와 진압에 의해 실패했다. 패전 후 해외의 일본군이 동요할 것을 예상하고 일본정부는 급히 황족을 난징[南京]·만주(滿州)·사이공(Saigon) 등에 파견하여 순순히 항복하고 끝까지 질서를 유지하도록 다독거렸다. 패전 당시 일본군의 규모는 육군이 약 550만 명, 해군이 약 170만 명으로 총 720만 명 가량 되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일본을 떠나 해외에 주둔하고 있었다. 대략 동남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에 81만 명, 만주국을 포함한 중국 대륙에 170만 명, 한반도에 30만 명, 타이완과 남서제도에 17만 명, 쿠릴 열도와 사할린에 9만 명이 주둔하고 있던 중 패전을 맞았다. 이들을 합하면 모두 3백만 명이 넘는다. 이들은 패전과 함께 무장해제를 당하고 대부분 일본으로 귀환하게 된다.
한편 연합군은 9월 2일 도쿄 앞 바다에 정박한 미군 군함에서 항복 의식을 거행했다.주 966이와 함께 일본군 주둔 지역을 미국·영국·중국·소련 등 4개 국가에 의한 관할권으로 나누고 각 지역별로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실시했다. 중국 난징에서는 중국파견군 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대장이 9월 9일 중국 국민당의 육군 총사령관 앞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같은 날 서울에서도 항복 조인식이 거행되어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대장과 조선군 사령관 고쓰키 요시오[上月良夫] 중장이 미군정 청장존 하지(John R. Hodge)에게 통치권을 이양했다. 한편 일본군 남방군 총사령관 데라우치 히사이치[寺內壽一] 원수는 9월 12일 싱가포르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이때 항복을 의미하는 행위로 가문의 전통으로 간직해 오던 칼을 연합국 지휘관에게 바쳤다. 일본군 예하부대 대부분의 지휘관은 이러한 행위를 따라서 했다. 베트남 사이공에서도 일본군 헌병대장이 인도인 영국군장교에게 칼을 바치는 의식을 행하였다.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중국이나 조국 해방의 열기에 휩싸인 한반도와 베트남에서 사회적 혼란이 격화되는 가운데 일본군은 서둘러 일본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9월 19일까지도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는 한편, 무장해제한 일본군을 억류하여 시베리아에 이송시켜 가혹한 조건 아래에서 그들을 노동력으로 활용했다. 패전 당시 일본 육군과 해군이 1만 대가 넘는 작전용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일부가 연합군의 연구 실험용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파괴되었다. 또한 패전 당시 남아있던 함정 대부분은 해외에서 귀환하는 군인과 민간인을 수송하는데 사용되었으며, 그 가운데 전투함 대부분을 소련, 중국, 미국이 배상물로 가져갔다. 타이완에서는 10월 25일 중화민국이 일본군 항복 의식을 거행하고 타이완 총독부를 해체하는 대신 중화민국의 행정기관을 설치했다.
한편 연합군은 9월 2일 도쿄 앞 바다에 정박한 미군 군함에서 항복 의식을 거행했다.주 966이와 함께 일본군 주둔 지역을 미국·영국·중국·소련 등 4개 국가에 의한 관할권으로 나누고 각 지역별로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실시했다. 중국 난징에서는 중국파견군 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대장이 9월 9일 중국 국민당의 육군 총사령관 앞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같은 날 서울에서도 항복 조인식이 거행되어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대장과 조선군 사령관 고쓰키 요시오[上月良夫] 중장이 미군정 청장존 하지(John R. Hodge)에게 통치권을 이양했다. 한편 일본군 남방군 총사령관 데라우치 히사이치[寺內壽一] 원수는 9월 12일 싱가포르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이때 항복을 의미하는 행위로 가문의 전통으로 간직해 오던 칼을 연합국 지휘관에게 바쳤다. 일본군 예하부대 대부분의 지휘관은 이러한 행위를 따라서 했다. 베트남 사이공에서도 일본군 헌병대장이 인도인 영국군장교에게 칼을 바치는 의식을 행하였다.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중국이나 조국 해방의 열기에 휩싸인 한반도와 베트남에서 사회적 혼란이 격화되는 가운데 일본군은 서둘러 일본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9월 19일까지도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는 한편, 무장해제한 일본군을 억류하여 시베리아에 이송시켜 가혹한 조건 아래에서 그들을 노동력으로 활용했다. 패전 당시 일본 육군과 해군이 1만 대가 넘는 작전용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일부가 연합군의 연구 실험용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파괴되었다. 또한 패전 당시 남아있던 함정 대부분은 해외에서 귀환하는 군인과 민간인을 수송하는데 사용되었으며, 그 가운데 전투함 대부분을 소련, 중국, 미국이 배상물로 가져갔다. 타이완에서는 10월 25일 중화민국이 일본군 항복 의식을 거행하고 타이완 총독부를 해체하는 대신 중화민국의 행정기관을 설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