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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자야숙녜(滋野宿禰; 시게노노스쿠네)

자야숙녜(滋野宿禰; 시게노노스쿠네)
 기직(紀直; 기노아타헤)과 조상이 같다. 신혼명(神魂命; 가미무수비노미코토)의 5세손인 천도근명(天道根命; 아메노미치네노미코토)의 후손이다.
 
【주석】
1. 자야숙녜(滋野宿禰)
자야(滋野; 시게노)라는 씨명은 『만엽집』(6-926)에 ‘무야(茂野; 시게노)’처럼 풀이 무성한 들이라는 뜻으로 자손이 번성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자야숙녜의 원래 성은 유원조(楢原造)였고, 다시 근신(勤臣, 伊蘇志臣; 이소시노오미)으로 바뀌었다. 『속일본기』 천평승보(天平勝寶) 2년(750) 3월 무술조에 유원조동인(楢原造東人) 등이 황금을 얻어 바치므로 근신이라는 성을 주었다고 하였다.
유원조라는 씨성을 가진 사람으로는 유원조동인(楢原造東人, 『속일본기』 天平 17년 정월 을축조), 유원조총마려(楢原造總麻呂, 『평성궁목간(平城宮木簡)』1-82), 유원내만려(楢原內万呂, 「경사상일장(經師上日帳)」 3-298)가 있다.
자야숙녜(滋野宿禰)라는 씨성을 가진 사람으로는 원래 이소지신가역(伊蘇志臣家譯)이었던 자야숙녜가역(滋野宿禰家譯, 『일본후기』 弘仁 3년 정월 병인조 등), 자야숙녜선백(滋野宿禰船白, 『일본후기』 延曆 18년 4월 기축조 등), 자야숙녜정도(滋野宿禰貞道, 『類聚國史』 99 敍位, 弘仁 8년 정월 정묘조), 자야숙녜정주(滋野宿禰貞主, 『유취국사』 99 서위,홍인 11년 정월 경진조 등)가 있다.
자야숙녜정주는 홍인 14년(823) 정월에 조신이라는 성을 받았으며(『일본삼대실록』 정관 원년 12월 22일 계묘조), 『일본문덕천황실록』 인수(仁壽) 2년 2월 을사조에 그의 졸전(卒傳)이 실려 있다. 자야숙녜정주는 우경인(右京人)이며, 증조부는 대학두(大學頭) 겸 박사 유원동인(楢原東人)이고 아버지는 가역(家譯)이며, 그의 딸 승자(繩子)가 인명천황(仁明天皇)의 총애를 받아 유언친왕(惟彦親王), 농자내친왕(濃子內親王), 승자내친왕(勝子內親王)을 낳았다고 하였다. 『경국집(經國集)』 이라는 한시집의 편찬에도 관계하였다.
자야조신(滋野朝臣)이라는 씨성을 가진 사람으로는, 자야조신정주 이외에 자야조신승자(滋野朝臣繩子, 『속일본후기』승화 3년 4월 무술조 등), 자야조신정웅(滋野朝臣貞雄, 『속일본후기』승화 5년 11월 계미조 등), 자야조신선음(滋野朝臣善蔭, 『속일본후기』승화 13년 정월 기유조 등), 자야조신오자(滋野朝臣奥子, 『일본문덕천황실록』 仁壽 2년 2월 을사조), 자야조신안성(滋野朝臣安成, 『일본문덕천황실록』 인수 3년 3월 정유조), 자야조신선근(滋野朝臣善根, 『일본문덕천황실록』 齊衡 원년 정월 임진조 등), 자야조신잠자(滋野朝臣岑子, 『일본삼대실록』 貞觀 원년 11월 21일 계묘조 등), 자야조신항음(滋野朝臣恒蔭, 『일본삼대실록』 정관 10년 정월 7일 임인조 등), 자야조신안성(滋野朝臣安城, 『일본삼대실록』 정관 10년 6월 11일 계유조 등), 자야조신양간(滋野朝臣良幹, 『일본삼대실록』 정관 10년 6월 11일계유조 등)이 있다.
2. 기직(紀直)
기직에 대해서는 하내국(河內國) 신별(神別) 「기직(紀直)」 조(639) 참조.
3. 신혼명(神魂命)
신혼명에 대해서는 좌경 신별(중) 「현견양숙녜(縣犬養宿禰)」 조(380) 신혼명 참조.
4. 천도근명(天道根命)
『신찬성씨록』 의 「대가수(大家首)」 조(473)에서는 천도근내명(天道尼乃命; 아메노미치네노미코토)이라고도 표기하였다. 『선대구사본기(先代舊事本紀)』 천신본기(天神本紀)에서는 신황산령존(神皇産靈尊)의 아들인 천어식지명(天御食持命)의 후손으로 천뢰조(川瀬造)등의 조상이라고 하였고, 같은 책 국조본기(國造本紀)에서는 천도근명을 기이국조(紀伊國造)로 삼았는데, 기하뢰직(紀河瀬直)의 조상이라고 하였다. 또한 기이국조(紀伊國造)조에서는 신무천황(神武天皇) 때 신황산령명(神皇産靈命)의 5세손인 천도근명을 국조로 정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찬성씨록』 에서는 신혼명(神魂命, 神皇産靈命)의 5세손으로, 자야숙녜를 비롯하여 대판직(大坂直), 기직(紀直), 대촌직(大村直), 대가수(大家首), 전련(田連), 천뢰조(川瀨造) 등의 시조라고 하였다.
〈기이국조계도(紀伊國造系圖)〉에서는 경경저존(瓊瓊杵尊)이 천손 강림 때 가지고 내려온 일상경(日像鏡)과 일모(日矛, ‘신성한 창’을 뜻함)를 잘 받들었고, 신무천황(神武天皇)이 동정(東征)에 나섰을 때 역시 정벌이 잘 이루어지도록 기도를 바친 공로를 인정받아 기이국(紀伊國)의 국조가 된 과정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기이국조는 기이국(紀伊國) 명초군(名草郡)을 거점으로 하는 고대의 씨족으로, 한반도와 활발하게 교섭하였다. 율령제하에서는 명초군 대령을 맡았고, 일전국현신사(日前國懸神社)의 신직도 담당하였다. 이 씨족의 가계를 기록한 것이 〈기이국조계도〉로 현재 『속군서유종(續群書類從)』 에 수록되어 있다. 70대인 기창장(紀昌長)까지 기록한 것으로 1680년에 필사된 것이다. 국조차제(國造次第)와 함께 기이국조 가문을 연구하는 데 기초적인 사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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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야숙녜(滋野宿禰; 시게노노스쿠네) 자료번호 : ss.k_0002_0010_0030_0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