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고구려평양성

중성의 문

중성의 문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내성에는 6개의 성문 즉 동쪽에는 장경문위치, 서쪽에는 보통문위치, 남쪽에는 함구문위치, 북쪽에는 칠성문위치, 정동에는 대동문위치, 정남에는 정양문위치이 있다고 하였다. 이 시기의 내성은 평양성의 외성과 북성을 제외한 중성 남벽 이북, 내성 북벽이 고구려 때의 중성과 내성(궁성)을 포괄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성의 성문을 찾기 위해서는 동국여지승람에 남아있는 중성 벽의 문을 찾으면 될 것이다.
위의 6문 가운데 중성 벽에 있던 성문은 정남에 정양문, 동남에 함구문이 있었으며, 서쪽의 보통문은 지금도 그대로 서있다. 그밖에 평양속지에 의하여 중성의 북문으로 보통문 동북쪽에 경창문위치이 더 있었다는 것과 평양성 성곽도에 의해 중성의 동문으로 대동문과 대동교 사이에 육로문위치이라는 성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들 가운데 고구려 시기의 문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중성의 남벽에 달린 정남문인 정양문은 중성에서 외성으로 통하는 중심부에 있었는데 그 위치는 서쪽의 창광산, 동쪽에는 해방산을 낀 평지대로 중성에서 외성으로 통하는 것이 매우 편리한 지점이다. 특히 이 정양문 자리에서는 고구려 때의 주춧돌이 발견되어서 이 곳이 고구려 평양성 당시의 중성 남문 자리임을 확증해준다.
중성의 동남문인 함구문은 해방산과 대동강 사이에 있었다. 이 문 역시 고구려 때의 중성의 동남문이었다는 것은 정양문과 함께 이 함구문으로도 고구려 때 설치한 넓은 대로가 통하였다는 것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다음 고구려 때의 중성의 서문은 보통문으로 인정된다. 그것은 보통문의 주춧돌과 축대의 성돌들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그리고 1962년 보통문을 본래의 위치에서 동남족으로 약 55m 떨어진 지금 위치에 옮겨 지을 때 드러난 홍예석 밑에 가로 높인 기초 장대석들이 칠성문 이북의 성벽기초돌들과 같은 방법으로 다듬은 고구려성돌이었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해준다.
중성의 동문은 육로문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때의 중성 동문의 위치를 밝힐 수 있는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1910년대 초까지 중성의 동벽에는 육로문 자리가 있었는데 그 위치는 현재 대동문과 대동교 사이 중앙도서관 앞 통로가 잇닿은 부근이다. 이는 평양성 성곽도의 육로문의 위치와 일치한다.
그리고 중성의 북문은 경창문으로 추정되는데 그 위치는 만수대 서쪽 언덕에서 성벽이 내려오다 도로로 끊기는 곳이다. 이 문자리에서는 수많은 고구려 기와 편이 발견되었으며, 평양속지에 외성의 다경문과 중성의 정양문, 함구문과 함께 옛 성문이라고 쓰여있다. 일반적으로 평양성의 북문은 칠성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칠성문은 고구려 때 궁성의 북문으로 일반 사람들의 통행은 금지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만큼, 중성에서 북쪽으로 통하는 다른 문이 있었을 것이며, 그런 문이 서 있을 자리는 경창문 자리 밖에 없다.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중성의 문 자료번호 : ispy.d_0002_0030_0010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