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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구의동보루

九宜洞堡壘
  • 저필자
    최재도(한성백제박물관 백제학연구소)
  • 시대
    고구려
  • 위치
  • 관련자료
  • 원소장처
    서울시 광진구 자양2동 695
  • 시대
    고구려
  • 유형
규모
둘레: 0.05km
입지
아차산 능선이 남서쪽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한강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돌출된 작은 구릉에 있다. 한강변으로 구릉이 높지 않으나 한강 남쪽이 잘 관측된다.
유적개관
1977년에 서울대학교 조사단을 중심으로 발굴조사 되었다. 현재 멸실되었는데, 화재로 전소되었다. 유적 외곽에는 목책 시설이 확인되었다. 직경 14.8m의 원형 석축 성벽(둘레 46m)이 확인되었으며, 내부에서는 온돌 1, 배수로 1, 저수시설 1이 확인되었다. 전소된 유적인 만큼 많은 완형 유물이 발견되었다.
출토유물
* 토기, 철기, 전돌
참고문헌
「한강유역의 고구려 요새」, 1997
해설
서울시 광진구 자양2동 695번지에 있던 고구려 보루이다. 아차산 능선이 남서쪽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한강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돌출된 해발고도 53m의 작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어 높지 않으나 주변이 낮은 탓에 한강 남쪽이 잘 관측된다.
이 유적은 화양지구택지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77년에 서울대학교 조사단을 중심으로 발굴조사 되었으며 지금은 파괴되어 남아있지 않다. 발굴 당시에는 무너진 돌들로 인해 백제고분으로 추정되기도 하였으나 1988년 몽촌토성의 발굴 과정에서 구의동유적과 매우 유사한 고구려 토기가 다량 출토됨에 따라 재검토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고구려 보루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이 유적과 연결선상에 있는 아차산 일대의 보루 유적도 구의동 유적과 같은 성격의 유적임이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구의동 유적과 아차산 일대의 유적은 같은 시기로 추정되며, 고구려 제20대 장수왕 이후 고구려 남진정책의 일환으로 한강 이남을 공략하기 위한 군사 전초기지로 사용되다가, 551년 신라·백제 연합군이 한강 유역으로 북상할 무렵에는 방어기지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구의동보루는 평면 구조가 원형에 가깝고, 전체 둘레 46m, 내부 면적 171.9㎡으로 한강 유역의 고구려 보루 중 규모가 가장 작은 편에 속한다. 직경 14.8m의 원형 석축 성벽과 그 내부의 직경 7.6m의 원형 구덩이[수혈(豎穴]로 이루어져 있다. 석축은 깬돌[할석(割石)]을 7-8단 쌓고 그 위에 강돌[천석(川石)]을 6-8단 쌓은 것이 보통인데, 안으로 기울여 쌓아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높이는 1m 내외이고, 가장 높은 곳은 1.85m에 달한다. 원형의 석축 성벽 중 네 군데가 치성(雉城)이며, 외곽에는 나무 울타리[목책(木柵)] 시설을 하여 방어하였다.
내부는 직경 7.6m의 원형 구덩이 형태로 남쪽에 출입 시설로 만들었다. 구덩이 깊이는 60-70㎝이며, 벽체는 나무판을 돌려세우고 짚 따위를 섞은 흙으로 미장하였다. 벽체를 따라 22개의 기둥구멍[주공(柱孔)]이 확인되었는데, 간격은 70-80㎝로 대체로 일정하다. 내부 시설로는 배수시설과 온돌이 있는데, 온돌은 깬돌을 40㎝ 높이로 세우고 판돌을 덮은 후 짚과 흙을 섞어 틈을 메운 구조를 하고 있었다. 불을 때는 입구에는 쇠솥[철부(鐵釜)]과 쇠항아리[철호(鐵壺)]가 걸려 있었고, 온돌 바닥에는 불탄 흙덩어리[소토(燒土)]가 깔려 있어서 실제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배수시설은 구덩이의 동북에서 시작하여 서남으로 구덩이 벽선을 따라 둥글게 휘어져 외부로 배출된다. 구덩이의 내부 중심부에는 폭 1.5m, 깊이 2.3m 가량의 공간이 있어 물을 저장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400여 점에 달하는 토기류와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토기류는 모두 19개 기종인데, 최소 369점에 달한다. 철기는 1,300여 점에 달하는 쇠화살촉[철촉(鐵鏃)]을 제외하고도 15종 50여 점이 출토되었다. 철기류는 칼·창·도끼·화살촉 등의 무기류, 보습·가래·살포·쇠스랑 등의 농구류, 끌·솥·항아리 등의 그릇류와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철기 가운데 무기류가 많은 점에서 구의동 유적의 군사적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유적의 위치나 출토 유물의 성격 등을 볼 때 백제와 대치하고 있던 고구려의 군사요새로서, 대체로 10여 명의 군사가 주둔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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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의동보루 자료번호 : isea.d_0002_0030_0050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