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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우산2110호묘

禹山2110號墓/JYM2110
  • 저필자
    권순홍(성균관대학교 박물관)
  • 시대
    고구려
  • 위치
  • 원소장처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태왕진 우산촌(吉林省 通化市 集安市 太王鎭 禹山村)
  • 시대
    고구려
  • 유형
    무덤
입지
우산 남쪽 기슭의 중간의 완만한 비탈과 평야가 서로 만나는 곳에 위치한다. 지세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완만한 비탈에 위치해있다.
유적개관
서강남대석릉과 온화보남대총으로 불린 고분으로, 이른 시기에 도굴을 당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고분 꼭대기에 시멘트비석을 세웠다. 장방형의 계단적석총으로, 남북으로 66.5m, 동서 45m 규모이다. 동쪽으로 제단터가 있으며, 산돌과 강돌로 축조하였다.
유물개관
회색 기와(승문 암키와, 수키와), 토기(호, 옹), 방추차, 차할, 철촉, 철못 등
참고문헌
「集安高句麗王陵」, 2004
해설
우산하고분군의 남쪽부분에 위치하는 고구려의 초대형 계단적석총이다. 종래 서강(西崗) 남대석릉(南大石陵) 혹은 온화보(溫和堡) 남대총(南大塚)으로 불렸다. 고분이 입지한 곳은 우산 남쪽의 완만한 산기슭과 평야의 경계지점으로 평지에 가까운 지형이다. 북으로 집안과 통화를 잇는 철로가 280m 거리에 있고, 남으로 작은 도로가 있는데 그 길을 따라 서쪽으로 2km 가면 집안시 중심가에 이른다. 남쪽에 오회분이 동서로 분포하고 멀리 동남쪽으로 태왕릉과 임강총이 바라보인다. 1913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조사되었다. 1966년 길림성박물관과 집안현문물보관소의 합동 조사시에 JYM2110호로 편호되었다. 2003년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만주국시기 일본인들이 묘 꼭대기에 콘크리트 기념비를 건설하였고, 이후에는 거주밀집구역이 조성되어 고분이 많이 훼손되었다. 고분의 평면은 장방형으로 남북 길이 66.5m, 동서 너비 45m이며 잔존 높이는 3.5~5.5m이다. 적석분구는 간단히 가공한 산돌로 계단을 축조하고 내부는 강돌로 채웠는데, 보존 상태가 양호한 동쪽과 서쪽에서 12~13단까지 확인할 수 있다. 북쪽은 4단이 남아 있고, 남쪽 중간 부분은 거의 파괴되었지만 서남모서리는 10단 정도 판별 가능하다. 계단의 너비는 0.3~1.5m로 같지 않고 높이차도 0.2~0.5m 정도이다. 정상부 중앙에 높이 4m, 길이 24.4m인 동서 방향의 격장(隔墻)이 있고, 그 남북 양측에 석곽을 하나씩 축조했으나 발굴하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고분의 서측 지표면에 돌을 한 번 깔았고, 동쪽 약 10~14km 거리에 제대라 불리는 석축 시설이 있다. 수키와·암키와를 비롯하여 인물모양 청동제 수레굴대, 각종 철제 화살촉, 철제 못과 쇠고리 등이 출토되었다. 고분 정상부에는 완형의 수키와가 남북방향으로 놓여 있었는데, 적석총 상부를 마무리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이 고분에서 출토된 두께 3cm 정도의 벽돌식 기와가 산성하 전창36호묘와 임강총 등의 사례와 비슷하다는 점을 근거로 2세기 말로 조성연대를 추정하거나, 나아가서는 고구려 9대 고국천왕의 무덤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반면 이 고분은 계단식 축조방식을 채용했고 입지도 평지로 변모했다는 점에서 3세기 이후로 편년하는 견해도 있다. 다만 4세기 초에 출현한 권운문와당이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3세기 말 이전에 조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체로 3세기 중후반에 조영된 고구려 왕릉으로 비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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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2110호묘 자료번호 : isea.d_0002_0010_0060_0040_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