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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한원

구태의 제사를 받들고, 부여의 혈통을 이었다.

구태의 제사를 받들고,주 001
각주 001)
백제 건국 시조로 仇台가 기록된 것은 『周書』와 『隋書』가 최초이며, 이후 『通典』, 『翰苑』, 『唐會要』, 『冊府元龜』 등에 보이고 있다. 구태에 대해서는 고이왕설, 온조설, 위구태설, 구수왕설, 비류왕설, 근초고왕설, 우태설, 주몽설 등 다양한 주장이 제시되었다(김경화, 「백제의 국가제사 연구」, 인하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6, 154~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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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혈통을 이었다.
『후위서』주 002
각주 002)
唐代에 『魏書』를 대신하여 張太素, 元澹 등이 편찬한 것으로, 총 100권이라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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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백제국은 그 선조가 부여로부터 나왔다.” 또 백제왕이 [북]위에 표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과 고[구]려는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주 003
각주 003)
『魏書』 卷100 百濟에 백제 개로왕이 472년 北魏 孝文帝에게 보낸 상표문에서 “臣與高句麗源出夫餘”라는 구절이 있다. 따라서 『後魏書』를 인용한 부분은 여기까지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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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동]진 의희 12년(416), 백제왕 여전주 004
각주 004)
『宋書』 卷97 百濟에서는 餘映으로 되어 있으나 「梁職貢圖」에는 睓으로, 『通典』에는 腆으로 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腆支王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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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장군으로 삼았다. 고조가 즉위하여, 진동대장군으로 진호하였다. 원가 7년(430), 여전의 작호를, 백제왕 여비주 005
각주 005)
毗는 연대상으로 보아 毗有王으로 보인다. 그런데 비유왕의 前代는 久爾辛王이며, 腆支王은 419년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비유왕이 전지왕의 號를 이었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三國史記』 百濟本紀에서는 “毗有王久爾辛王之長子 [或云腆支王庶子, 未知孰是]”라고 하여 그 출자에 대해 불분명한 점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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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주었으며, 비가 죽은 뒤 아들 경주 006
각주 006)
蓋鹵王을 말한다. 『三國史記』 百濟本紀에는 慶司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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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위를 계승하였다.” 『괄지지』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백제는 [왕]성에 그 조상 구태의 묘를 세우고, 사시(四時)로 제사지낸다.”
 
• 참고
『周書』 卷49 百濟 其王以四仲之月 祭天及五帝之神 又每歲四祠其始祖仇台之廟
『隋書』 卷81 百濟 東明之後 有仇台者 篤於仁信 始立其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漸以昌盛 爲東夷强國
『宋書』 卷97 百濟 元嘉二年 太祖詔之曰 皇帝問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累葉忠順 越海効誠 遠王纂戎 聿修先業 慕義旣彰 厥懷赤款 浮桴驪水 獻賝執贄 故嗣位方任 以藩東服 勉勗所莅 無墜前蹤 今遣兼謁者 閭丘恩子兼副謁者丁敬子等宣旨慰勞稱朕意 其後每歲遣使奉表 獻方物 七年 百濟王 餘毗復修貢職以映爵號授之 二十七年 毗上書獻方物 私假臺使馮野夫 西河太守 表求易林式占腰弩 太祖並與之 毗死 子慶代立

  • 각주 001)
    백제 건국 시조로 仇台가 기록된 것은 『周書』와 『隋書』가 최초이며, 이후 『通典』, 『翰苑』, 『唐會要』, 『冊府元龜』 등에 보이고 있다. 구태에 대해서는 고이왕설, 온조설, 위구태설, 구수왕설, 비류왕설, 근초고왕설, 우태설, 주몽설 등 다양한 주장이 제시되었다(김경화, 「백제의 국가제사 연구」, 인하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6, 154~157쪽). 바로가기
  • 각주 002)
    唐代에 『魏書』를 대신하여 張太素, 元澹 등이 편찬한 것으로, 총 100권이라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바로가기
  • 각주 003)
    『魏書』 卷100 百濟에 백제 개로왕이 472년 北魏 孝文帝에게 보낸 상표문에서 “臣與高句麗源出夫餘”라는 구절이 있다. 따라서 『後魏書』를 인용한 부분은 여기까지일 가능성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宋書』 卷97 百濟에서는 餘映으로 되어 있으나 「梁職貢圖」에는 睓으로, 『通典』에는 腆으로 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腆支王으로 추정된다. 바로가기
  • 각주 005)
    毗는 연대상으로 보아 毗有王으로 보인다. 그런데 비유왕의 前代는 久爾辛王이며, 腆支王은 419년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비유왕이 전지왕의 號를 이었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三國史記』 百濟本紀에서는 “毗有王久爾辛王之長子 [或云腆支王庶子, 未知孰是]”라고 하여 그 출자에 대해 불분명한 점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蓋鹵王을 말한다. 『三國史記』 百濟本紀에는 慶司로 되어 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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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의 제사를 받들고, 부여의 혈통을 이었다. 자료번호 : hw.k_0002_008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