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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한원

칼과 숫돌을 차서 지위의 위엄을 보였고, 금 깃털을 꽂아 귀천을 드러냈다.

칼과 숫돌을 차서 지위의 위엄을 보였고, 금 깃털을 꽂아 귀천을 드러냈다.
위수의 『후위서』 동이전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고[구]려 [사람은] 머리에 절풍주 001
각주 001)
折風은 고구려의 전통적 冠帽로서 이미 3세기대의 기록인 『三國志』 高句麗에서 “大加主簿頭著幘 如幘而無餘 其小加著折風形如弁”이라고 하여 그 기원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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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쓰는데 그 형태가 고깔과 같으며, [고깔] 옆에 새 깃털을 꽂는데주 002
각주 002)
여러 문헌에서 고구려 지배층이 자신들의 관모 양 옆에 새 깃털(鳥羽)을 꽂았음을 전하는데, 「梁元帝職貢圖」를 모사한 「唐閻立本王會圖」에 표현된 고구려 사신의 관모나 「무용총 수렵도」 속 인물이 쓰고 있는 관모에서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이처럼 관모 양 옆에 새 깃털을 꽂는 풍습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나 신라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직공도』에 그려진 백제 사신의 관모나 「장회태자 이현묘 예빈도」에 그려진 신라 사신의 관모도 새 깃털을 꽂은 조우관임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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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천에 따라 차이가 있다. 설 때는 곧 뒷짐을 진다.” 소자현의 『제서』 동이전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고려 습속은 폭이 좁은 바지를 입고 양주 003
각주 003)
冠帽의 앞면에서부터 꼭대기를 지나 뒷면까지 연결되어 붙여진 금색선을 말하며, 조선시대에는 흔히 그 수에 따라 계급이 구분되었다. 때문에 조복이나 제복을 입을 때 머리에 쓰는 金冠을 梁冠이라고도 하였는데, 예를 들면 1품 관리가 쓰는 금관은 梁이 다섯 개인 오량관을 썼다. 고구려 시대의 관모 형태가 꼭 이와 같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冠折風一梁 謂之情”이라 하였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幘은 梁이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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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나인 절풍을 쓰는데, 이를 책이라 이른다. 오경을 읽을 줄 안다. 경사주 004
각주 004)
당시 齊의 수도 建康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의 난징(南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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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던 [고구려] 사신을 중서랑 왕융이 놀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복식의 알맞지 않음은 몸의 재앙이거늘주 005
각주 005)
王融이 고구려 사신의 관모가 독특함을 보고 『春秋左氏傳』 僖公 24년에 보이는 “君子曰 服之不衷 身之灾也”란 구절을 인용하여 놀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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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에 놓인 것은 어떤 물건인가?’ [고구려 사신이]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이것은 바로 옛날 고깔의 남은 모습이오.’ 그 풍속에, 절 할 때는 곧 한쪽 다리를 끌고 명령을 받을 때는 꿇어앉는다. 다닐 때는 반드시 달리듯하여 이를 공경하는 것이라 여긴다주 006
각주 006)
현전 『南齊書』 高句麗에서는 “其俗”부터의 4구절을 볼 수 없다. 지금 전해지는 『南齊書』 高麗의 뒷부분과 이어지는 百濟傳의 앞부분(18行×18字의 1面)은 현재 일실되어 전하지 않는데(앞의 주 208 참조) 아마도 사라진 부분의 내용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湯淺 90쪽). 그런데 본문에서 “其俗拜曳一脚 受令跪 [行]必走 以爲恭[敬]”이라 한 부분과 『南齊書』 東南夷列傳의 逸文이라 여겨지는 『建康實錄』 卷16 東夷高句麗의 “拜則申一脚 坐則跪 行則走 以爲恭敬”이란 구절을 비교해보면, 그 내용에 차이가 보여 『翰苑』의 해당 구절이 『南齊書』에서 인용한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점도 없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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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원제직공도』주 007
각주 007)
『梁職貢圖』는 蕭繹(후에 梁 元帝, 508~554)이 荊州刺史 재임(526~539) 시절에 주변국 使臣의 용모를 자필로 묘사한 것을 梁 武帝(502~549)의 재위 40년을 기념하여 결집한 두루마리 그림(畵卷)이다. 현재 그 원본은 남아 있지 않으며 모사본 4종이 전해진다. 즉 北京 中國國家博物館 소장 「北宋代 摹本」, 臺北 故宮博物院 소장 「南唐顧德謙摹梁元帝蕃客入朝圖」와 「唐閻立本王會圖」, 張庚(1685~1760)이 연대 미상의 白描 職貢圖를 1739년에 모사한 것을 淸末 葛嗣浵(1867~1935)이 재록한 「淸張庚諸番職貢圖」(「張庚摹本」)가 그것이다. 「양직공도」 모본 4종 중에 사신도와 해당 국가의 題記가 남아 있는 것은 「北宋代摹本」뿐이며, 臺北 故宮博物院 소장의 2점은 사신도만 남아 있고, 「張庚摹本」은 제기만 전하고 있다. 또 각각의 모사본은 사신의 수효 및 채색 여부, 題記의 분량 등에서 차이가 있으며, 현존 4종의 摹本과 蕭繹이 그린 「梁職貢圖」 원본 양자 사이에도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즉 현존 4종의 「梁職貢圖」 摹本은 梁代 작성된 原文을 충실하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수요자의 요구에 따라 변개되고, 변형된 摹本 사이의 膠着도 예상된다고 한다(윤용구, 「『梁職貢圖』의 流通과 摹本」 『목간과 문자』 9, 20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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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고려의 부녀자는 백의를 입고, 남자는 붉은 비단주 008
각주 008)
「梁職貢圖」 張庚摹本에서는 이를 “袺錦”으로 쓰고 있고, 「梁職貢圖」 北宋代 摹本에서는 “紅錦”으로 쓰고 있는데, 紅錦으로 풀이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현전 「梁職貢圖」 摹本 중 하나인 「唐閻立本王會圖」에 표현된 고구려 사신의 복장을 보면 붉은색 비단옷을 입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현재 전하는 「唐閻立本王會圖」가 원본의 회화를 얼마만큼 충실하게 반영하였는지 확단하기 어려운 점은 있다. 「양직공도」 원본 자체가 粉本인지 白描本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고 한다(윤용구, 앞의 논문, 20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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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옷을 입으며 금은으로 치장한다. [신분이] 귀한 자는 책을 쓰는데, 뒤쪽에 금은을 사슴의 귀처럼 만들어 책 위에 더하며, [신분이] 천한 자는 절풍을 쓴다. 귀를 뚫고 금고리를 한다. 위에는 백삼을 입고 아래는 백색의 긴 바지를 입으며 허리에 은대를 한다. [허리띠] 왼쪽에는 숯돌을 차고 오른쪽에는 오자도를 찬다. 발에는 두예탑을 신는다주 009
각주 009)
현전하는 「양직공도」 장경모본나 「양직공도」 북송대모본에서는 볼 수 없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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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기』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 사람들은 또한 비단을 짜는데, 자색 바탕에 힐로 무늬를 놓은 것을 으뜸으로 치고, 다음으로 오색금이 있고, 그 다음으로 운포금이 있다. 또 백첩포와 청포를 짓는데 더욱 아름답다. 또 햇빛가리개도 짓는데, 중국말로 접리라 하며 그 털은 말갈에서 나는 돼지의 털이다.”
 
• 참고
『魏書』 卷100 高句麗 其官名有謁奢太奢大兄小兄之號 頭著折風 其形如弁 旁揷鳥羽 貴賤有差 立則反拱 跪拜曳一脚 行步如走 常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其公會 衣服皆錦繡 金銀以爲飾
『南齊書』 卷58 高句驪 高麗俗服窮袴 冠折風一梁 謂之幘 知讀五經 使人在京師 中書郎王融戱之曰 服之不衷 身之災也 頭上定是何物 答曰 此卽古弁之遺像也
『建康實錄』 卷16 高句麗 拜則申一脚 坐則跪 行則走 以爲恭敬 國有銀山 採爲貨 並人參貂皮 重中國綵纈 丈夫衣之 亦重虎皮
『隋書』 卷81 高麗 俗好蹲踞 潔淨自喜 以趨走爲敬 拜則曳一脚 立各反拱 行必搖手
『太平寰宇記』 卷173 高勾麗國 其俗 節於飮食 而好脩宮室 始以爲夫餘別種 而言語法則多同之 跪拜伸一足行步皆如走 略
「梁職貢圖」 張庚摹本 婦人衣白 男子衣袺錦 飾以金銀 貴者冠幘 而無[復→後]以金銀爲鹿耳 羽加之幘上 賤者冠折風 其形如古之弁 穿耳以金環 上衣曰[表→衫] 下衣曰長袴 腰有銀帶
「梁職貢圖」 北宋代 摹本 婦人衣白 男子衣紅錦 飾以金銀 貴者冠幘 而[無]後以金銀爲鹿耳 加之幘上 賤者冠折風 其形如古之弁 穿耳以金鐶 上衣曰衫 下曰長袴 腰有銀帶

  • 각주 001)
    折風은 고구려의 전통적 冠帽로서 이미 3세기대의 기록인 『三國志』 高句麗에서 “大加主簿頭著幘 如幘而無餘 其小加著折風形如弁”이라고 하여 그 기원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여러 문헌에서 고구려 지배층이 자신들의 관모 양 옆에 새 깃털(鳥羽)을 꽂았음을 전하는데, 「梁元帝職貢圖」를 모사한 「唐閻立本王會圖」에 표현된 고구려 사신의 관모나 「무용총 수렵도」 속 인물이 쓰고 있는 관모에서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이처럼 관모 양 옆에 새 깃털을 꽂는 풍습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나 신라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직공도』에 그려진 백제 사신의 관모나 「장회태자 이현묘 예빈도」에 그려진 신라 사신의 관모도 새 깃털을 꽂은 조우관임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冠帽의 앞면에서부터 꼭대기를 지나 뒷면까지 연결되어 붙여진 금색선을 말하며, 조선시대에는 흔히 그 수에 따라 계급이 구분되었다. 때문에 조복이나 제복을 입을 때 머리에 쓰는 金冠을 梁冠이라고도 하였는데, 예를 들면 1품 관리가 쓰는 금관은 梁이 다섯 개인 오량관을 썼다. 고구려 시대의 관모 형태가 꼭 이와 같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冠折風一梁 謂之情”이라 하였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幘은 梁이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04)
    당시 齊의 수도 建康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의 난징(南京)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5)
    王融이 고구려 사신의 관모가 독특함을 보고 『春秋左氏傳』 僖公 24년에 보이는 “君子曰 服之不衷 身之灾也”란 구절을 인용하여 놀렸던 것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6)
    현전 『南齊書』 高句麗에서는 “其俗”부터의 4구절을 볼 수 없다. 지금 전해지는 『南齊書』 高麗의 뒷부분과 이어지는 百濟傳의 앞부분(18行×18字의 1面)은 현재 일실되어 전하지 않는데(앞의 주 208 참조) 아마도 사라진 부분의 내용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湯淺 90쪽). 그런데 본문에서 “其俗拜曳一脚 受令跪 [行]必走 以爲恭[敬]”이라 한 부분과 『南齊書』 東南夷列傳의 逸文이라 여겨지는 『建康實錄』 卷16 東夷高句麗의 “拜則申一脚 坐則跪 行則走 以爲恭敬”이란 구절을 비교해보면, 그 내용에 차이가 보여 『翰苑』의 해당 구절이 『南齊書』에서 인용한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점도 없진 않다. 바로가기
  • 각주 007)
    『梁職貢圖』는 蕭繹(후에 梁 元帝, 508~554)이 荊州刺史 재임(526~539) 시절에 주변국 使臣의 용모를 자필로 묘사한 것을 梁 武帝(502~549)의 재위 40년을 기념하여 결집한 두루마리 그림(畵卷)이다. 현재 그 원본은 남아 있지 않으며 모사본 4종이 전해진다. 즉 北京 中國國家博物館 소장 「北宋代 摹本」, 臺北 故宮博物院 소장 「南唐顧德謙摹梁元帝蕃客入朝圖」와 「唐閻立本王會圖」, 張庚(1685~1760)이 연대 미상의 白描 職貢圖를 1739년에 모사한 것을 淸末 葛嗣浵(1867~1935)이 재록한 「淸張庚諸番職貢圖」(「張庚摹本」)가 그것이다. 「양직공도」 모본 4종 중에 사신도와 해당 국가의 題記가 남아 있는 것은 「北宋代摹本」뿐이며, 臺北 故宮博物院 소장의 2점은 사신도만 남아 있고, 「張庚摹本」은 제기만 전하고 있다. 또 각각의 모사본은 사신의 수효 및 채색 여부, 題記의 분량 등에서 차이가 있으며, 현존 4종의 摹本과 蕭繹이 그린 「梁職貢圖」 원본 양자 사이에도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즉 현존 4종의 「梁職貢圖」 摹本은 梁代 작성된 原文을 충실하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수요자의 요구에 따라 변개되고, 변형된 摹本 사이의 膠着도 예상된다고 한다(윤용구, 「『梁職貢圖』의 流通과 摹本」 『목간과 문자』 9, 2012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8)
    「梁職貢圖」 張庚摹本에서는 이를 “袺錦”으로 쓰고 있고, 「梁職貢圖」 北宋代 摹本에서는 “紅錦”으로 쓰고 있는데, 紅錦으로 풀이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현전 「梁職貢圖」 摹本 중 하나인 「唐閻立本王會圖」에 표현된 고구려 사신의 복장을 보면 붉은색 비단옷을 입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현재 전하는 「唐閻立本王會圖」가 원본의 회화를 얼마만큼 충실하게 반영하였는지 확단하기 어려운 점은 있다. 「양직공도」 원본 자체가 粉本인지 白描本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고 한다(윤용구, 앞의 논문, 2012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9)
    현전하는 「양직공도」 장경모본나 「양직공도」 북송대모본에서는 볼 수 없는 구절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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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숫돌을 차서 지위의 위엄을 보였고, 금 깃털을 꽂아 귀천을 드러냈다. 자료번호 : hw.k_0002_0060_0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