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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한원

짐승은 무늬 있는 표범을 진귀하게 여겼고, 기물은 좋은 활을 중요하게 여겼다.

짐승은 무늬 있는 표범을 진귀하게 여겼고, 기물은 좋은 활을 중요하게 여겼다.
『고려기』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지금 고려국은 조선, 예맥, 옥저의 땅을 아우른다.” 『후한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고구려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으며 사람들이 [산과 계곡을] 따라 거주한다. 구려는 일명 맥이며 별종이 있어 소수에 의지해 거주하니 이름을 소수맥주 001
각주 001)
小水貊은 말 그대로 지금의 靉河로 비정되는 서안평 북쪽 ‘小水’ 일대에 거주하던 貊族이다(孫進己 主編, 『東北歷史地理』 1, 1988, 368~369쪽). 『三國志』 魏書30 高句麗에서는 “又有小水貊 句麗作國 依大水而居 西安平縣北有小水 南流入海 句麗別種依小水作國 因名之爲小水貊 出好弓 所謂貊弓是也”라고 하고 있어, 당시 고구려가 大水, 즉 압록강에 의지하여 나라를 세웠던 반면 西安平 북쪽에는 大水와 대비되는 小水가 있고 여기에 고구려의 別種 小水貊이 나라를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한편 비슷한 견해이지만 이 小水를 靉河 동편의 浦石河로 비정하고 小水貊의 중심지도 浦石河 부근 寬甸縣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여호규, 「高句麗 初期의 梁貊과 小水貊」 『한국고대사연구』 25, 2002, 100~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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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부른다. [소수맥에서는] 좋은 활이 나는데 이른바 맥궁이 그것이다. 동옥저는 땅이 기름지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고 있다. 오곡이 자라기 알맞고 밭작물을 재배하기에도 좋다. 예에서는 단궁이 나며, 또 문표가 많고, 과하마주 002
각주 002)
果下馬에 대해서는 『後漢書』의 기록 외에도 『三國志』 魏書30 濊에 “文豹又出果下馬 漢桓時獻之”란 기록이 보이고, 여기에 “臣松之按 果下馬高三尺 乘之可于果樹下行 故謂之果下 見博物志魏都賦”라는 裵松之의 注가 전하고 있다. 또 晉代의 문장가 左思가 지은 「魏都賦」에 劉逵가 注하기를 “漢廐 舊有樂浪所獻果下馬 高三尺 以駕輦車”라 적고 있다. 즉 果下馬는 높이가 3척으로 일반 말보다 체구가 작고 과수 아래를 지나다닐 수 있어 果下馬라 불렸으며, 이것이 漢代에는 樂浪을 거쳐 漢 조정에 바쳐졌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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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다.” 또 말이 있는데, [체구가] 몹시 작아 산에 오름에 험한 곳을 밟아도 지치지 않으며, 조와 쌀을 물에 타서 말에게 먹임으로써 쉽게 일정을 맞출 수 있다주 003
각주 003)
“又有馬” 이하의 구절은 『後漢書』 卷85 東夷에 보이지 않는 구절로서 『三國志』 卷30 東夷를 비롯해 현전하는 여타 문헌기록에서도 일치하는 구절을 찾을 수 없다. 그 서술 내용도 “果下馬” 뒤에 이어지는 “又有馬” 세 글자로 인해 果下馬와 관계없는 다른 말의 종에 대한 설명처럼 덧붙여져 있다. 그러나 ‘체구가 작다’거나 ‘산을 오를 때 험준한 곳을 밟아도 지치지 않는다’는 등의 서술은 여타 다른 문헌에 전하는 果下馬 관련 기록의 細注 내용과 통하는 점이 있어 역시 果下馬와 관련된 서술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를 衍文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지만(湯淺 89쪽), 일단 풀이는 원문 그대로 따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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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後漢書』 卷85 高句驪 高句驪 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地方二千里 多大山深谷 人隨而爲居 少田業 力作不足以自資 故其俗節於飮食 而好修宮室 … 句驪一名貊 有別種 依小水爲居 因名曰小水貊 出好弓 所謂貊弓是也
『後漢書』 卷85 東沃沮 東沃沮在高句驪 蓋馬大山之東 東濱大海 北與挹婁夫餘 南與濊貊接 其地東西夾 南北長 可折方千里 土肥美 背山向海 宜五穀 善田種
『後漢書』 卷85 濊 濊北與高句驪·沃沮 南與辰韓接 東窮大海 西至樂浪 濊及沃沮·句驪 本皆朝鮮之地也 … 能步戰 作矛長三丈 或數人共持之 樂浪檀弓出其地 又多文豹 有果下馬
〈高三尺 乘之可於果樹下行 惠棟曰 劉逵魏都賦注云 漢廐舊有樂浪所獻果下馬 高三尺 以駕輦車〉
海出班魚 使來皆獻之
『三國志』 魏書30 濊 作矛長三丈 或數人共持之 能步戰 樂浪檀弓出其地 其海出班魚皮 土地饒 文豹又出果下馬 漢桓時獻之
〈臣松之按 果下馬高三尺 乘之可于果樹下行 故謂之果下 見博物志魏都賦〉
〈惠棟曰 博物志云 海出斑魚皮 陸出文豹 管子揆度篇云 發朝鮮之文皮 又輕重甲篇云 發朝鮮不朝 請文皮服 而以爲幤乎 一豹之皮 容金而金也 然後八千里之發朝鮮 可得而朝也 爾雅太府云 東北之美者 有斥山之文皮焉 郭璞云 虎豹之屬 皮有褥綵者 是文皮 卽文豹之皮也 劉逵魏都賦注云 漢廐 舊有樂浪所獻果下馬 高三尺 以駕輦車 明 黃洪憲 朝鮮國紀云 產果下馬·長尾雞·貂豽·海豹皮 姜西溟曰 定張車·果下馬 皆宮內所用〉
〈臣松之按 果下馬高三尺 乘之可于果樹下行 故謂之果下 見博物志魏都賦〉
〈惠棟曰 博物志云 海出斑魚皮 陸出文豹 管子揆度篇云 發朝鮮之文皮 又輕重甲篇云 發朝鮮不朝 請文皮𣮇服 而以爲幤乎 一豹之皮 容金而金也 然後八千里之發朝鮮 可得而朝也 爾雅太府云 東北之美者 有斥山之文皮焉 郭璞云 虎豹之屬 皮有褥綵者 是文皮 卽文豹之皮也 劉逵魏都賦注云 漢廐 舊有樂浪所獻果下馬 高三尺 以駕輦車 明 黃洪憲 朝鮮國紀云 產果下馬·長尾雞·貂豽·海豹皮 姜西溟曰 定張車·果下馬 皆宮內所用〉

  • 각주 001)
    小水貊은 말 그대로 지금의 靉河로 비정되는 서안평 북쪽 ‘小水’ 일대에 거주하던 貊族이다(孫進己 主編, 『東北歷史地理』 1, 1988, 368~369쪽). 『三國志』 魏書30 高句麗에서는 “又有小水貊 句麗作國 依大水而居 西安平縣北有小水 南流入海 句麗別種依小水作國 因名之爲小水貊 出好弓 所謂貊弓是也”라고 하고 있어, 당시 고구려가 大水, 즉 압록강에 의지하여 나라를 세웠던 반면 西安平 북쪽에는 大水와 대비되는 小水가 있고 여기에 고구려의 別種 小水貊이 나라를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한편 비슷한 견해이지만 이 小水를 靉河 동편의 浦石河로 비정하고 小水貊의 중심지도 浦石河 부근 寬甸縣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여호규, 「高句麗 初期의 梁貊과 小水貊」 『한국고대사연구』 25, 2002, 100~101쪽). 바로가기
  • 각주 002)
    果下馬에 대해서는 『後漢書』의 기록 외에도 『三國志』 魏書30 濊에 “文豹又出果下馬 漢桓時獻之”란 기록이 보이고, 여기에 “臣松之按 果下馬高三尺 乘之可于果樹下行 故謂之果下 見博物志魏都賦”라는 裵松之의 注가 전하고 있다. 또 晉代의 문장가 左思가 지은 「魏都賦」에 劉逵가 注하기를 “漢廐 舊有樂浪所獻果下馬 高三尺 以駕輦車”라 적고 있다. 즉 果下馬는 높이가 3척으로 일반 말보다 체구가 작고 과수 아래를 지나다닐 수 있어 果下馬라 불렸으며, 이것이 漢代에는 樂浪을 거쳐 漢 조정에 바쳐졌음을 알 수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又有馬” 이하의 구절은 『後漢書』 卷85 東夷에 보이지 않는 구절로서 『三國志』 卷30 東夷를 비롯해 현전하는 여타 문헌기록에서도 일치하는 구절을 찾을 수 없다. 그 서술 내용도 “果下馬” 뒤에 이어지는 “又有馬” 세 글자로 인해 果下馬와 관계없는 다른 말의 종에 대한 설명처럼 덧붙여져 있다. 그러나 ‘체구가 작다’거나 ‘산을 오를 때 험준한 곳을 밟아도 지치지 않는다’는 등의 서술은 여타 다른 문헌에 전하는 果下馬 관련 기록의 細注 내용과 통하는 점이 있어 역시 果下馬와 관련된 서술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를 衍文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지만(湯淺 89쪽), 일단 풀이는 원문 그대로 따르도록 한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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