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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한원

파도는 짙푸른 물결로 솟아올라, 천험을 질주하니 조각배를 띄웠고,

파도는 짙푸른 물결주 001
각주 001)
사전을 찾아보면 ‘짙푸른 물결(湛藍的水波)’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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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솟아올라, 천험을 질주하니 조각배를 띄웠고,
『한서』 지리지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현도군 서개마현주 002
각주 002)
『漢書』 地理志에 전하는 현도군 屬縣 3縣 중 하나이다. 이때 『漢書』 地理志의 해당 기록은 기원전 1세기 말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즉 여기서의 西盖馬縣 관련 기록도 제2현도군 시기(기원전 82~75 이후부터 2세기 초반까지)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일단 西蓋馬라는 이름으로 보아 縣이 『三國志』 高句麗傳의 蓋馬大山 서쪽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오늘날 집안시 집안현성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孫進己 主編, 『東北歷史地理』 1, 1988, 328쪽), 제1현도군 당시 강계 부근에서 신빈현 목기진 부근 목기토성으로 옮겨졌다는 견해(田中俊明, 「玄菟郡と高句麗の興起」 『朝鮮文化硏究』 1, 東京大, 1994, 36쪽), 부이강변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玄菟郡考」 『韓國古代史硏究(修訂版)』, 博英社, 1985, 185쪽), 자강도 위원-초산 부근으로 비정하는 견해(윤용구, 「현도군의 군현 지배와 고구려」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 122~123쪽) 등이 제기된 바 있는데, 실상 정설이 없다 할 정도로 가지각색의 견해가 난립해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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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마자수는 서북쪽으로는 염난수에 들어가며, 서남쪽으로는 서안평주 003
각주 003)
압록강 하류에 위치해 있던 遼東郡의 속현으로 漢·魏·晉代에 걸쳐 존속하였다가, 미천왕 12년(311) 고구려의 공격으로 함락되어 고구려의 영역에 편입된다. 현재 신의주의 북쪽 대안인 中國 丹東市 振安區 九連城鎭 부근 靉河尖古城에서 “安平樂未央”이라 새겨진 명문 와당이 발견됨으로써 이곳에 비정되고 있다. 한편 『新唐書』 卷220 高麗에서는 같은 부분에서 ‘西安平’을 ‘安市’라 적고 있으며, 『通典』 卷186 高句麗와 『太平寰宇記』 卷173 高勾麗에서는 ‘安平城’으로 적고 있다. 이로 보아 『新唐書』에서 ‘安市’라 적고 있는 것은 ‘安平’의 오기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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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주 004
각주 004)
『漢書』 地理志의 이 구절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翰苑』에 인용된 『高麗記』 逸文을 비롯하여 『新唐書』와 『通典』 등 후대 사서에서는 마자수를 압록강이라 하고 있어, 일찍부터 마자수를 압록강으로 염난수를 渾江(佟佳江)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받아들여져 왔다(池內宏, 「遼東の玄菟郡と其の屬縣」 『朝鮮地理歷史硏究報告』, 1912; 「遼東の玄菟郡と其の屬縣」 『滿鮮史硏究』 上世第一冊, 吉川弘文館, 1951, 71~73쪽). 그러나 白鳥庫吉이 ‘압록강은 佟佳江과 합류하기 전까지는 항상 西南流하여 조금도 西北流하는 일이 없다’고 하여 마자수를 渾江(佟佳江)으로, 염난수를 압록강으로 본 이래(白鳥庫吉, 「丸都城及國內城考」 『史學雜誌』 25編 4·5號, 1914; 「丸都城及國內城考」 『白鳥庫吉全集』 3, 1970) 李丙燾 또한 이 견해를 지지함으로써 현재는 염난수를 압록강으로, 마자수를 渾江(佟佳江)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李丙燾, 「玄菟郡考」 『韓國古代史硏究(修訂版)』, 博英社, 1985, 184쪽; 노태돈, 「고구려의 기원과 국내성 천도」 『한반도와 중국 동북 3성의 역사 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323쪽; 윤용구, 「현도군의 군현 지배와 고구려」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 118쪽). 이에 따르면 본 구절은 “馬訾水는 西北으로 흘러 鹽難水로 들어가고, (鹽難水는) 西南으로 흘러 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풀이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문장 중간에 주어를 인위적으로 바꾸어야 하는 부담이 있을 뿐더러 『翰苑』에 인용된 『高麗記』 逸文을 비롯하여 『新唐書』와 『通典』 등 후대 사서에서는 모두 馬訾水를 압록강이라 하며 이 강이 白山(백두산)에서 발원하여 국내성 남쪽을 지나 서류한다는 서술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이로 보아 역시 전통적인 견해에 따라 馬訾水를 압록강으로, 鹽難水를 혼강으로 비정함이 타당하다 생각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馬訾水는 서북쪽으로는 鹽難水에 들어가며, 서남쪽으로는 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해석하도록 한다. 즉 『漢書』의 이 구절은 압록강(마자수)의 물길이 중간에 혼강과 합류하는 것을 마치 물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것처럼 이해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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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군주 005
각주 005)
위에서 본 것처럼 馬訾水는 곧 압록강을 말하며, 당시 玄菟郡 西蓋馬縣과 遼東郡의 西安平縣을 지나 서해바다로 나간 것이니 여기서의 2郡은 玄菟郡과 遼東郡을 말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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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나며 2천 100리를 흐른다.” 응소의 [주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마자수는 서쪽으로 흘러 염택으로 들어간다.”주 006
각주 006)
여기에 인용된 “馬訾水가 서쪽으로 흘러 鹽澤으로 들어간다”는 應劭의 注는 현전하는 『漢書』의 注에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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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기』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마자수는 고려에서 일명 엄수주 007
각주 007)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東明聖王 즉위조에 보이는 ‘淹㴲水’, 「廣開土王陵碑文」의 ‘奄利大水’ 등과 통하는 강 이름이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의 淹㴲水 관련 기록 분주에서는 “일명 蓋斯水이니 지금의 鴨綠 東北에 있다”라고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송화강 혹은 그 어느 지류로 추정한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개정판)』 상, 을유문화사, 1996, 329쪽, 주 13). 후대 고구려인이 압록강을 淹水라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를 통해 평양 천도 이후 주몽신화에 일부 변개가 발생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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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도 하는데, 지금 이름은 압록수이다. 그 나라에 서로 전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강물은 동북쪽의 말갈국 백산주 008
각주 008)
백두산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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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부터 나온다. 물의 색이 오리 머리와 비슷하다. 그러므로 속명을 압록수라 한다.’ 요동[성]에서 500리 떨어져 있으며, 국내성 남쪽을 지난다. 또한 서쪽에서 한 물줄기와 합쳐지는데 바로 염난[수]이다. 두 물줄기가 흐름이 합쳐져 서남쪽으로 흘러 안평성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 안에서 이 강이 가장 크고 물결이 맑으며 [강물이] 지나는 나루터에는 모두 큰 배를 모아두었다. 그 나라는 이 강에 의지하여 천연의 요새지로 삼는다. 지금 살펴보니주 009
각주 009)
‘今案’ 이하 2구는 『通典』에도 보이기 때문에 『高麗記』의 저자 저술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판단된다(湯淺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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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강물의 넓이는 300보이며, 평양성 서북쪽 450리에 있다.” 도는 작은 배이다. 『모시』주 010
각주 010)
『詩經』을 말한다. 『詩經』은 중국 최초의 詩歌 叢集으로 춘추시대에 편성되었다. 모두 305편으로 되어 있고, 儒家에 의해 경전의 반열에 속하게 되었다. 『詩經』의 초전이라 할 수 있는 『三家詩』가 일실되고 宋代 이후로는 고문 경전인 『毛詩』만이 전해지게 되어, 현재 『詩經』이라 함은 곧 『毛詩』를 지칭한다. 『漢書』 藝文志에서는 『三家詩』를 서술한 뒤에 “또 毛公의 學이 있는데 스스로 子夏의 所傳이라 하였다. 河間獻王이 좋아했지만, 學官에 채택되지는 못했다”고 말하고, 『毛詩』 29권·『毛詩故訓傳』 30권을 저록했는데, 이 중 毛公이 訓詁를 붙여 경전의 뜻을 해설한 『毛詩故訓傳』이 오늘날의 『詩經』이다(이기동 역해, 『시경강설』,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4, 28~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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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하수가 넓다고 누가 말했던가? 조각배조차도 띄울 수 없네주 011
각주 011)
이는 『詩經』 國風, 衛風 河廣 편의 일구이다. ‘河廣’의 한 구절에서 ‘刀’를 ‘조각배(舠)’의 의미로 썼는데, 여기서 이 부분을 지적한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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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漢書』 卷28下 地理志 玄菟郡 武帝元封四年開 高句驪 莽曰下句驪 屬幽州 〈應劭曰 故真番,朝鮮胡國〉 戶四萬五千六 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 縣三 高句驪 遼山 遼水所出 西南至遼隊入大遼水 又有南蘇水 西北經塞外 〈應劭曰 故句驪胡〉 上殷台 莽曰下殷 〈如淳曰 台音鮐 師古曰 音胎〉 西蓋馬 馬訾水西北入鹽難水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 行二千一百里 莽曰玄菟亭
『太平寰宇記』 卷173 高勾麗國 馬砦水 一名鴨綠水 水源出東北靺鞨白山 水色似鴨頭 故名之 去遼東五百里 經國內城南 又西與一水合 卽鹽難水也 二水合流西南 至安平城 入高麗之地 以此水最大 波瀾淸折 所經津濟皆貯大船 其國恃此 以爲天塹 其水凡濶三百步 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 遼水東南四百八十里
『通典』 卷186 高句麗 馬訾水 一名鴨綠水 水源出東北靺鞨白山 水色似鴨頭 故俗名之 去遼東五百里 經國內城南 又西與一水合 卽鹽難水也 二水合流 西南至安平城 入海 高麗之中 此水最大 波瀾淸澈 所經津濟 皆貯大船 其國恃此 以爲天塹 水闊三百步 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 遼水東南四百八十里
『新唐書』 卷220 高麗 有馬訾水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 號鴨淥水 歷國內城西 與鹽難水合 又西南至安市 入于海 而平壤在鴨淥東南 以巨艫濟人 因恃以爲塹
『詩經』 國風 衛風 河廣  誰謂河廣 一葦杭之 하수가 넓다고 누가 말했던가? 일엽편주로도 건널 수 있네
誰謂宋遠 跂餘望之 송나라가 멀다고 누가 말했던가? 발돋움하면 보이는 것을
誰謂河廣 曾不容刀 하수가 넓다고 누가 말했던가? 조각배조차도 띄울 수 없네
誰謂宋遠 曾不崇朝 송나라가 멀다고 누가 말했던가? 아침나절도 안 걸릴 것을

  • 각주 001)
    사전을 찾아보면 ‘짙푸른 물결(湛藍的水波)’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바로가기
  • 각주 002)
    『漢書』 地理志에 전하는 현도군 屬縣 3縣 중 하나이다. 이때 『漢書』 地理志의 해당 기록은 기원전 1세기 말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즉 여기서의 西盖馬縣 관련 기록도 제2현도군 시기(기원전 82~75 이후부터 2세기 초반까지)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일단 西蓋馬라는 이름으로 보아 縣이 『三國志』 高句麗傳의 蓋馬大山 서쪽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오늘날 집안시 집안현성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孫進己 主編, 『東北歷史地理』 1, 1988, 328쪽), 제1현도군 당시 강계 부근에서 신빈현 목기진 부근 목기토성으로 옮겨졌다는 견해(田中俊明, 「玄菟郡と高句麗の興起」 『朝鮮文化硏究』 1, 東京大, 1994, 36쪽), 부이강변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玄菟郡考」 『韓國古代史硏究(修訂版)』, 博英社, 1985, 185쪽), 자강도 위원-초산 부근으로 비정하는 견해(윤용구, 「현도군의 군현 지배와 고구려」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 122~123쪽) 등이 제기된 바 있는데, 실상 정설이 없다 할 정도로 가지각색의 견해가 난립해 있는 상황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압록강 하류에 위치해 있던 遼東郡의 속현으로 漢·魏·晉代에 걸쳐 존속하였다가, 미천왕 12년(311) 고구려의 공격으로 함락되어 고구려의 영역에 편입된다. 현재 신의주의 북쪽 대안인 中國 丹東市 振安區 九連城鎭 부근 靉河尖古城에서 “安平樂未央”이라 새겨진 명문 와당이 발견됨으로써 이곳에 비정되고 있다. 한편 『新唐書』 卷220 高麗에서는 같은 부분에서 ‘西安平’을 ‘安市’라 적고 있으며, 『通典』 卷186 高句麗와 『太平寰宇記』 卷173 高勾麗에서는 ‘安平城’으로 적고 있다. 이로 보아 『新唐書』에서 ‘安市’라 적고 있는 것은 ‘安平’의 오기로 생각된다. 바로가기
  • 각주 004)
    『漢書』 地理志의 이 구절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翰苑』에 인용된 『高麗記』 逸文을 비롯하여 『新唐書』와 『通典』 등 후대 사서에서는 마자수를 압록강이라 하고 있어, 일찍부터 마자수를 압록강으로 염난수를 渾江(佟佳江)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받아들여져 왔다(池內宏, 「遼東の玄菟郡と其の屬縣」 『朝鮮地理歷史硏究報告』, 1912; 「遼東の玄菟郡と其の屬縣」 『滿鮮史硏究』 上世第一冊, 吉川弘文館, 1951, 71~73쪽). 그러나 白鳥庫吉이 ‘압록강은 佟佳江과 합류하기 전까지는 항상 西南流하여 조금도 西北流하는 일이 없다’고 하여 마자수를 渾江(佟佳江)으로, 염난수를 압록강으로 본 이래(白鳥庫吉, 「丸都城及國內城考」 『史學雜誌』 25編 4·5號, 1914; 「丸都城及國內城考」 『白鳥庫吉全集』 3, 1970) 李丙燾 또한 이 견해를 지지함으로써 현재는 염난수를 압록강으로, 마자수를 渾江(佟佳江)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李丙燾, 「玄菟郡考」 『韓國古代史硏究(修訂版)』, 博英社, 1985, 184쪽; 노태돈, 「고구려의 기원과 국내성 천도」 『한반도와 중국 동북 3성의 역사 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323쪽; 윤용구, 「현도군의 군현 지배와 고구려」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 118쪽). 이에 따르면 본 구절은 “馬訾水는 西北으로 흘러 鹽難水로 들어가고, (鹽難水는) 西南으로 흘러 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풀이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문장 중간에 주어를 인위적으로 바꾸어야 하는 부담이 있을 뿐더러 『翰苑』에 인용된 『高麗記』 逸文을 비롯하여 『新唐書』와 『通典』 등 후대 사서에서는 모두 馬訾水를 압록강이라 하며 이 강이 白山(백두산)에서 발원하여 국내성 남쪽을 지나 서류한다는 서술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이로 보아 역시 전통적인 견해에 따라 馬訾水를 압록강으로, 鹽難水를 혼강으로 비정함이 타당하다 생각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馬訾水는 서북쪽으로는 鹽難水에 들어가며, 서남쪽으로는 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해석하도록 한다. 즉 『漢書』의 이 구절은 압록강(마자수)의 물길이 중간에 혼강과 합류하는 것을 마치 물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것처럼 이해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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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본 것처럼 馬訾水는 곧 압록강을 말하며, 당시 玄菟郡 西蓋馬縣과 遼東郡의 西安平縣을 지나 서해바다로 나간 것이니 여기서의 2郡은 玄菟郡과 遼東郡을 말하는 것이 된다. 바로가기
  • 각주 006)
    여기에 인용된 “馬訾水가 서쪽으로 흘러 鹽澤으로 들어간다”는 應劭의 注는 현전하는 『漢書』의 注에는 보이지 않는다. 바로가기
  • 각주 007)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東明聖王 즉위조에 보이는 ‘淹㴲水’, 「廣開土王陵碑文」의 ‘奄利大水’ 등과 통하는 강 이름이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의 淹㴲水 관련 기록 분주에서는 “일명 蓋斯水이니 지금의 鴨綠 東北에 있다”라고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송화강 혹은 그 어느 지류로 추정한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개정판)』 상, 을유문화사, 1996, 329쪽, 주 13). 후대 고구려인이 압록강을 淹水라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를 통해 평양 천도 이후 주몽신화에 일부 변개가 발생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8)
    백두산을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9)
    ‘今案’ 이하 2구는 『通典』에도 보이기 때문에 『高麗記』의 저자 저술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판단된다(湯淺 87쪽). 바로가기
  • 각주 010)
    『詩經』을 말한다. 『詩經』은 중국 최초의 詩歌 叢集으로 춘추시대에 편성되었다. 모두 305편으로 되어 있고, 儒家에 의해 경전의 반열에 속하게 되었다. 『詩經』의 초전이라 할 수 있는 『三家詩』가 일실되고 宋代 이후로는 고문 경전인 『毛詩』만이 전해지게 되어, 현재 『詩經』이라 함은 곧 『毛詩』를 지칭한다. 『漢書』 藝文志에서는 『三家詩』를 서술한 뒤에 “또 毛公의 學이 있는데 스스로 子夏의 所傳이라 하였다. 河間獻王이 좋아했지만, 學官에 채택되지는 못했다”고 말하고, 『毛詩』 29권·『毛詩故訓傳』 30권을 저록했는데, 이 중 毛公이 訓詁를 붙여 경전의 뜻을 해설한 『毛詩故訓傳』이 오늘날의 『詩經』이다(이기동 역해, 『시경강설』,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4, 28~29쪽). 바로가기
  • 각주 011)
    이는 『詩經』 國風, 衛風 河廣 편의 일구이다. ‘河廣’의 한 구절에서 ‘刀’를 ‘조각배(舠)’의 의미로 썼는데, 여기서 이 부분을 지적한 것으로 해석된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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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는 짙푸른 물결로 솟아올라, 천험을 질주하니 조각배를 띄웠고, 자료번호 : hw.k_0002_0060_0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