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묻힌 비석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경기는 요[동]성에서 미명을 드날렸고,
파묻힌 비석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경기는 요[동]성에서 미명을 드날렸고,
범엽의 『후한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경기가 요동태수로 관직을 옮겼다. 원흥 원년(105)에 맥인이 [요동]군의 경계를 노략질하자, [경]기가 뒤쫓아 공격하여 그 거수를 참하였다.” 『고려기』를 살펴보니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옛 성 남문에 비석이 있는데 땅속에 파묻힌 채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 땅에서 몇 척 정도 드러나 있다고 하였으니, 바로 경기의 비석이다.”
• 참고
『後漢書』 卷4 孝和帝 元興元年春正月戊午 引三署郎召見禁中 選除七十五人 補謁者長相 高句驪寇郡界 … 秋九月 遼東太守耿夔擊貊人 破之
『後漢書』 卷85 高句驪 和帝元興元年春 復入遼東 寇略六縣 太守耿夔擊破之 斬其渠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