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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한원

연 (모용황)은 거침없이 내달려, 환도의 정상에 공적을 새겼다.

연 (모용황)은 거침없이 내달려, 환도의 정상에 공적을 새겼다.
『십육국춘추』 전연록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연주 [모용]황 9년(342), 황이 구려를 정벌하니, 승세를 타고 군대를 신속히 진군시켜 마침내 환도에 들어갔다. 구려왕 유주 001
각주 001)
고구려 16대 왕 고국원왕이다. 『三國史記』 고국원왕 즉위조를 보면 “諱斯由[或云劉]”라 적고 있다. 이병도는 여기서의 ‘劉’는 본래 ‘釗’의 오식으로 『梁書』 고구려전이 ‘劉’로 오식한 것을 따라 썼던 것으로 이해하며, ‘斯由’와 ‘釗’가 서로 음상사한 바, 본래는 ‘釗’가 옳다고 보았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개정판)』 상, 을유문화사, 1996, 412쪽, 주 1).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梁書』 고구려전에서도 고국원왕의 휘를 ‘劉’로 적고 있어 단순하게 오식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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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단마로 달아나 숨었다. 이에 그 아버지 무덤을 파고, 그 주검과 [유의] 어머니와 아내, 값진 보물을 아우르고, 남녀 5만여 구를 약취하였으며, 그 궁실을 불사르고 환도를 허물고 돌아왔다주 002
각주 002)
이 사건과 관련하여서는 『十六國春秋』 이외에도 『資治通鑑』 卷97 咸康 8年 및 『晉書』 卷109 慕容皝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참고가 된다. 특히 현전하는 『十六國春秋』의 기록은 『資治通鑑』의 해당 기록과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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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불내성이다.
 
• 참고
『十六國春秋』 卷25 慕容皝下 咸康八年 … 十一月 皝親帥勁卒四萬 入自南陜 以伐宇文高句驪 使建威將軍翰及平狄將軍霸爲前鋒 別遣長史王寓等 勒衆萬五千 從北道而進 高句驪王釗謂 皝軍之從北路也 乃遣弟武統精銳五萬拒北道 躬率嬴兵以防南陜 翰等先至與釗戰於木底 皝以大衆繼之 左常侍鮮于亮與數騎先犯高句驪陣 所向摧陷 句驪陣動 大衆因而乗之 句驪大敗 左長史韓壽斬其將阿佛和度加 諸軍乗勝追之 遂入丸都 釗單馬遁走 輕車將軍慕輿埿追獲其母周氏及妻而還 會王寓等戰於北道 軍皆敗沒 由是皝不復窮追 遣使招釗 釗不出 皝將還 韓壽曰 高句驪之地 不可戍守 今其主亡民散 潛伏山谷 大軍既去 必復鳩聚 收其餘燼 猶足爲患請載其父尸 囚其生母而歸 俟其束身自歸 然後返之 撫以恩信 策之上也 皝從之 掘釗父乙弗利墓 載其尸並其母妻 收其府庫累世珍寳 掠男女五萬餘口 焚其宮室 毀丸都城而還
『資治通鑑』 卷97 咸康8年 咸康八年 … 十一月 皝自將勁兵四萬出南道 [將 卽亮翻 下同] 以慕容翰慕容霸爲前鋒 別遣長史王寓等將兵萬五千出北道以伐高句麗 高句麗王釗果遣弟武帥精兵五萬拒北道 自帥羸兵以備南道 [羸 倫爲翻] 慕容翰等先至 與釗合戰 皝以大衆繼之 左常侍鮮于亮曰 臣以俘虜蒙王國士之恩 [事見上卷咸康四年] 不可以不報 今日 臣死日也 獨與數騎先犯高句麗陳 所嚮摧陷 高句麗陳動 [騎 奇寄翻 下同 陳 讀曰陣] 大衆因而乘之 高句麗兵大敗 左長史韓壽斬高句麗將阿佛和度加 [高句麗置官 有相加大加小加] 諸軍乘勝追之 遂入丸都 釗單騎走 輕車將軍慕輿埿追獲其母周氏及妻而還 會王寓等戰於北道 皆敗沒 由是皝不復窮追[復 扶又翻 下同] 遣使招釗 釗不出 皝將還 韓壽曰 高句麗之地 不可戍守 今其主亡民散 潛伏山谷 大軍旣去必復鳩聚 [鳩 亦聚也] 收其餘燼 [火餘曰燼 猶能復然] 猶足爲患 請載其父尸囚其生母而歸 俟其束身自歸 然後返之 撫以恩信 策之上也 皝從之 發釗父乙弗利墓 載其尸 收其府庫累世之寶 虜男女五萬餘口 燒其宮室 毁丸都城而還 [還 從宣翻 又如字]
『晉書』 卷109 慕容皝 咸康七年 皝遷都龍城 率勁卒四萬 入自南陝 以伐宇文高句麗 又使翰及子垂爲前鋒 遣長史王㝢等勒衆萬五千 從北置而進 高句麗王釗謂皝軍之從北路也 乃遣其弟武統精銳五萬距北置 躬率弱卒以防南陝 翰與釗戰于木底 大敗之 乘勝遂入丸都 釗單馬而遁 皝掘釗父利墓 載其尸幷其母妻珍寶 掠男女五萬餘口 焚其宮室 毁丸都而歸 明年 釗遣使稱臣於皝 貢其方物 乃歸其父尸

  • 각주 001)
    고구려 16대 왕 고국원왕이다. 『三國史記』 고국원왕 즉위조를 보면 “諱斯由[或云劉]”라 적고 있다. 이병도는 여기서의 ‘劉’는 본래 ‘釗’의 오식으로 『梁書』 고구려전이 ‘劉’로 오식한 것을 따라 썼던 것으로 이해하며, ‘斯由’와 ‘釗’가 서로 음상사한 바, 본래는 ‘釗’가 옳다고 보았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개정판)』 상, 을유문화사, 1996, 412쪽, 주 1).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梁書』 고구려전에서도 고국원왕의 휘를 ‘劉’로 적고 있어 단순하게 오식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이 사건과 관련하여서는 『十六國春秋』 이외에도 『資治通鑑』 卷97 咸康 8年 및 『晉書』 卷109 慕容皝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참고가 된다. 특히 현전하는 『十六國春秋』의 기록은 『資治通鑑』의 해당 기록과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일치한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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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모용황)은 거침없이 내달려, 환도의 정상에 공적을 새겼다. 자료번호 : hw.k_0002_0060_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