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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한원

위 무제가 깃발을 휘날려, 먼저 답돈을 효수하니, [공]손강은 절개를 지켜, 재빨리 누반을 참수하였다.

위 무제가 깃발을 휘날려, 먼저 답돈을 효수하니, [공]손강은 절개를 지켜, 재빨리 누반을 참수하였다.
『후한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헌제 초평 연간(190~193)에 구력거가 죽었다. 아들 누반은 나이가 어렸지만 조카 답돈이 무략이 있어 대신 세워 3군을 총관하게 하니 무리가 모두 그의 호령을 따랐다. 이후에 난루·소복연이 그 부의 무리를 이끌고 누반을 받들어 선우로 삼고, 답돈을 왕으로 삼았다. 이때 원소의 아들 [원]상이 패하여 답돈에게 도망쳤으며, 유·기주의 관리로 오환에 도망친 자가 10만여 호였다. 건안 12년(207)에 위 무제가 친히 오환을 정벌하여 유성에서 답돈을 크게 격파하여 그를 참하고, 20여만 인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원상은 누반·오연 등과 모두 요동으로 달아났는데, 요동태수 공손강이 [이들을] 모두 참하여 [경도로] 보냈다. 그밖에 1만여 무리의 락을 돌려보내 모두 중국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고 한다.”
 
• 참고
『後漢書』 卷90 烏桓 獻帝初平中 丘力居死 子樓班年少 從子蹋頓有武略 代立 總攝三郡 衆皆從其號令 建安初 冀州牧袁紹與前將軍公孫瓚相持不決 蹋頓遣使詣紹求和親 遂遣兵助擊瓚 破之 紹矯制賜蹋頓難樓蘇僕延烏延等 皆以單于印綬 後難樓蘇僕延率其部衆奉樓班爲單于 蹋頓爲王 然蹋頓猶秉計策 廣陽人閻柔 少沒烏桓鮮卑中 爲其種人所歸信 柔乃因鮮卑衆 殺烏桓校尉邢舉而代之 袁紹因寵慰柔 以安北邊 及紹子尙敗 奔蹋頓時幽冀吏人奔烏桓者十萬餘戶 尙欲憑其兵力 復圖中國 會曹操平河北 閻柔率鮮卑烏桓歸附 操即以柔爲校尉建安十二年 曹操自征烏桓 大破蹋頓於柳城 斬之 首虜二十餘萬人 袁尙與樓班烏延等皆走遼東 遼東太守公孫康並斬送之 其餘衆萬餘落 悉徙居中國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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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무제가 깃발을 휘날려, 먼저 답돈을 효수하니, [공]손강은 절개를 지켜, 재빨리 누반을 참수하였다. 자료번호 : hw.k_0002_0020_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