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역주 한원

봉후가 멋대로 포악하게 굴다가, 만이[곡]에서 패배를 맞이하였고,

봉후가 멋대로 포악하게 굴다가, 만이[곡]에서 패배를 맞이하였고,
『후한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영원 6년(94), 여러 새로 항복했던 오랑캐들은 마침내 서로 놀라 동요하여 15부의 20여만 명이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주 001
각주 001)
『後漢書』 南匈奴 列傳에 의하면 남흉노의 亭獨尸逐侯鞮單于 師子가 永元 6년(94)에 즉위했는데, 북흉노에서 항복한 흉노인 500~600인이 밤에 師子를 습격했다. 이에 후한의 安集掾史 王恬이 師子를 호위하고 있던 병사들을 거느리고 싸워서 그들을 격파하였다. 이때 새로 항복해서 내부한 흉노인들이 놀라 동요하여 15部 20여만 명이 후한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닫기
이전에 선우였던 둔도하의 아들 욱건일축왕 봉후를 위협해 즉위시켜 선우로 삼고 마침내 관리와 사람들을 죽이고 우정과 여장을 불태웠다. 수레가 거듭 삭방[군]으로 향했다가 막북으로 넘어가려고 했다. 이에 오환교위주 002
각주 002)
烏桓校尉: 漢代 이래로 통상 변경의 州郡이 이민족의 관리와 교섭을 담당하였지만, 이민족이 집단적으로 투항하거나, 塞內로 이주해온 경우에는 이를 전담할 특별기구가 필요했다. 漢武帝때에 內附한 烏桓人들을 上穀·漁陽·右北平·東等郡의 塞外로 옮기고 護烏桓校尉를 두어 監領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後漢書』 卷90 烏桓鮮卑列傳 ; 『續漢書』 百官志5). 오환교위는 이후 後漢·曹魏·西晉代에도 오환을 대상으로 한 이민족 통어관으로서 유지되었다.
닫기
임상이 선비대도호 소발외와 오환대인 물가의 8천 기병을 거느리고 만이곡에서 봉후를 요격했다. 다시 크게 격파하니 전후하여 대체로 1만 7천여 급을 참수했다. 봉후가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새외로 달아났다.”
 
• 참고
『後漢書』 卷89 南匈奴 永元六年立 降胡五六百人夜襲師子 安集掾王恬將衞護士與戰 破之 於是新降胡遂相驚動 十五部二十餘萬人皆反畔 脅立前單于屯屠何子薁日逐王逢侯爲單于 遂殺畧吏人 燔燒郵亭廬帳 將車重向朔方 欲度漠北 於是遣行車騎將軍鄧鴻越騎校尉馮柱行度遼將軍朱徽將左右羽林北軍五校士及郡國積射·緣邊兵 烏桓校尉任尚將烏桓鮮卑 合四萬人討之 … 任尚率鮮卑大都護蘇拔廆烏桓大人勿柯八千騎 要擊逢侯於滿夷谷 復大破之 前後凡斬萬七千餘級 逢侯遂率衆出塞 漢兵不能追 七年正月 軍還

  • 각주 001)
    『後漢書』 南匈奴 列傳에 의하면 남흉노의 亭獨尸逐侯鞮單于 師子가 永元 6년(94)에 즉위했는데, 북흉노에서 항복한 흉노인 500~600인이 밤에 師子를 습격했다. 이에 후한의 安集掾史 王恬이 師子를 호위하고 있던 병사들을 거느리고 싸워서 그들을 격파하였다. 이때 새로 항복해서 내부한 흉노인들이 놀라 동요하여 15部 20여만 명이 후한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2)
    烏桓校尉: 漢代 이래로 통상 변경의 州郡이 이민족의 관리와 교섭을 담당하였지만, 이민족이 집단적으로 투항하거나, 塞內로 이주해온 경우에는 이를 전담할 특별기구가 필요했다. 漢武帝때에 內附한 烏桓人들을 上穀·漁陽·右北平·東等郡의 塞外로 옮기고 護烏桓校尉를 두어 監領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後漢書』 卷90 烏桓鮮卑列傳 ; 『續漢書』 百官志5). 오환교위는 이후 後漢·曹魏·西晉代에도 오환을 대상으로 한 이민족 통어관으로서 유지되었다.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봉후가 멋대로 포악하게 굴다가, 만이[곡]에서 패배를 맞이하였고, 자료번호 : hw.k_0002_0010_0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