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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백제가 각종을 보내 백제의 멸망과 귀실복신이 다시 일으키고자 함을 알림

9월 기해삭 계묘(5일)에 백제가 달솔주 001
번역주 001)
백제의 16등 관등 가운데 제2위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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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빠졌다.] 사미(沙彌)주 002
번역주 002)
沙彌는 具足戒를 받고 정식 승려가 되기 이전 단계의 수행승을 가리킨다. 각종은 여기에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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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覺從) 등을 파견하여[어떤 책(或本)에는 도망쳐 와 난을 고하였다고 한다.] 보고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올해 7월에 신라가 힘을 믿고 세력을 만들어, 이웃 나라와 화친하지 않고, 당나라 사람을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군신이 모두 포로가 되어 살아남은 자가 거의 없습니다[어떤 책(或本)에는 금년 7월 10일에 당의 소정방이 수군을 거느리고 미자진(尾資津) 주 003
번역주 003)
錦江 하구 彌造浦(현재 충청남조 감포현 미조포)라는 설과 인천의 옛 이름인 彌鄒浦라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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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진을 쳤다. 신라의 춘추지가 병마를 거느리고 노수리산(怒受利山) 주 004
번역주 004)
黃山으로 현재 충청남도 論山市 連山面이다. ‘연산’의 옛 이름이 黃山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장군 계백이 이끈 군대와 신라의 대군이 ‘黃山原’에서 전투한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한편 백제의 奴斯只縣(현재 충청남도 대전시 유성구)과의 음운상의 유사점을 들어 ‘유성’에 비정하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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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주둔하였다. 백제를 협공하여 싸운 지 3일 만에 우리 사비성 주 005
번역주 005)
원문은 王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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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함락하였다. 같은 달 13일에 결국 궁궐을 함락하였다주 006
번역주 006)
원문은 王城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660) 정월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7월 9일에 소정방의 기벌포 도착과 황산원에서의 전투가 진행되었고, 12일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의자왕의 성이 포위되고, 13일에 왕성이 함락되었다. 왕성은 백제의 도읍인 泗泌城(현재 충청남도 부여)을 가리킨다. 사비성이 7월 13일에 함락되자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의자왕은 웅진성에 웅거했지만 18일에는 이곳도 함락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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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수리산은 백제의 동쪽 경계라고 한다.]. 이때 서부(西部)주 007
번역주 007)
서부는 백제의 왕도 5부 가운데 하나이다. 자세한 내용은 『日本書紀』 흠명천황 13년 10월조 西部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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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솔(恩率)주 008
번역주 008)
백제의 관위 16계 관등 가운데 제3위에 해당되는데, 부여에 남아 있는 「劉仁願紀功碑」에는 복신이 ‘杆率’이라 되어 있다. 杆率은 제5위에 해당되므로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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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실복신(鬼室福信) 주 009
번역주 009)
『삼국사기』, 『舊唐書』 등에는 福信이라 적혀 있다. 백제 무왕의 조카인 동시에 의자왕의 사촌이다. 사비성이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게 함락된 후, 승려 도침과 함께 周留城을 근거로 부흥운동을 전개했다. 일본에 있던 왕자 豐璋을 맞아 왕으로 추대하고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劉仁願이 지키던 사비성을 포위하기도 했다. 唐이 劉仁軌를 파견하여 구원하게 하자, 任存성으로 물러나 복신은 霜岑將軍, 도침은 領車將軍을 칭하고 유민을 모아 부흥운동에 힘썼다. 그러나 도침과의 불화로 그를 죽이고, 풍장까지 죽이려 하다가 도리어 풍장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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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격분하여 임사기산(任射岐山) 주 010
번역주 010)
혹본의 任叙利山과 任存山은 모두 任存城을 가리킨다. 충청남도 대흥 부근에 있는 봉수산성을 가리키는다는 설과 충남 홍성 학성산성이라는 설이 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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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웅거하였습니다주 011
번역주 011)
「唐劉仁願紀功碑」에는 福信과 道琛이 함께 任存城에서 군대를 일으킨 것으로 되어 있고, 이 기사에서는 福信이 任存城에서 군대를 일으킨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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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或本)에는 북임서리산(北任叙利山)이라 한다.]. 달솔 여자진(餘自進) 주 012
번역주 012)
余自信이라고도 한다. 『日本書紀』 天智天皇 2년 9월조에는 渡倭한 기록이 보이고, 동 8년 시세조에는 여자신과 남녀 7백여 명이 近江國으로 이주한 기록이 보인다. 또한 동 10년 정월 시월조에는 大錦下를 제수받은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新撰姓氏錄』 右京 諸蕃 高野造條에는 「百濟人佐平余自信之後也.」라고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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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중부(中部)주 013
번역주 013)
웅진성을 의미한다. 熊津城은 『周書』 백제전에 의하면 ‘중부는 古沙城’에 해당된다. 웅진성은 그 북쪽에 위치하며 당나라 군사가 점거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을 거점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잘못 전해진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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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 주 014
번역주 014)
현재 충청남도 공주에 해당된다. 久麻那利는 『日本書紀』 雄略天皇 21년조의 분주에는 「汶洲王盖鹵王母弟也. 日本舊記云. 以久麻那利賜末多王. 盖是誤也. 久麻那利者任那國下哆呼唎縣之別邑也.」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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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웅거하였습니다[어떤 책(或本)에서는 도도기류산(都都岐留山) 주 015
번역주 015)
『삼국사기』의 豆率, 豆陵伊, 『日本書紀』의 硫留, 州柔 그리고 『新舊唐書』, 『資治通鑑』의 周留는 모두 같은 지역을 가리킨다. 임존성과 함께 백제부흥군의 근거지였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현재는 부안설이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日本書紀』 천지천황 원년 3월 䟽留城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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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한다.]. 각기 군영을 만들어 흩어진 병졸을 불러 모았습니다주 016
번역주 016)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660) 8월 2일조에는 ‘百濟의 잔여 무리가 南岑城 등에 거하고, 佐平 正武가 豆尸原嶽에 주둔하여 신라와 당나라 사람들을 약탈하였다.’고 적혀 있다. 26일조에는 ‘신라군이 任存(大興)의 大柵을 공격하였으나 적이 많고 지리가 험하여 이기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8월부터 이미 백제 부흥군의 저항이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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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기주 017
번역주 017)
백제 멸망 시의 전투에서 이미 무기가 소진되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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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전의 싸움에서 모두 다 써버렸습니다. 그래서 막대기주 018
번역주 018)
원문은 棓이다. 『萬象名義』에는 「棓, 蒲講反. 大杖也, 梲也, 破也, 棒字.」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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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손에 쥐고 싸웠습니다. 신라의 군사가 쓰러지면 그 무기를 빼앗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백제의 무력이 늘어나서 당도 감히 공격해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복신 등은 백제의 백성을 불러 모아 함께 왕성을 지키고 있습니다주 019
번역주 019)
『舊唐書』 百濟傳 顯慶 5년(660)조 및 『三國史記』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 9월조에 의하면, ‘蘇定方이 仁願에게 泗沘를 지키게 하고 王文度를 熊津都督으로 삼아 지키게 한 다음 9월 3일에 귀국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복신 등의 백제부흥군이 백제의 왕성인 사비성을 탈환했다는 내용은 다른 곳에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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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인이 존경하여 ‘좌평주 020
번역주 020)
660년에 은솔과 달솔로 각기 기재된 귀실복신과 여자진이 좌평이라 기재되어 있다. 좌평은 백제 관등 16계 가운데 최고위에 해당되므로 여기에 보이는 좌평은 존칭의 의미로 기재된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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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신, 좌평 자진’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복신만이 영명하고 용맹한 위세를 발휘하여 이미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있습니다주 021
번역주 021)
백제의 멸망과정을 간단히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660년 3월 당 고종이 소정방을 대총관으로 하여 수륙 13만의 군으로 백제 정벌을 명함 → 5월 16일 신라 무열왕이 김유신 등과 함께 경주에서 출발 → 6월 18일 무열왕 등이 南川停에 도착 → 6월 21일 무열왕이 태자 法敏을 보내어 德物島에서 소정방을 맞이함 → 7월 9일 신라의 김유신이 황산벌에서 백제의 계백과 싸움. 소정방이 기벌포에 도착 → 7월 12일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의 사비성을 포위 → 7월 13일 사비성에 있던 왕자 隆, 대좌평 天福 등이 항복 → 7월 18일 의자왕이 태자와 함께 웅진성에서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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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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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沙彌는 具足戒를 받고 정식 승려가 되기 이전 단계의 수행승을 가리킨다. 각종은 여기에만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錦江 하구 彌造浦(현재 충청남조 감포현 미조포)라는 설과 인천의 옛 이름인 彌鄒浦라는 설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黃山으로 현재 충청남도 論山市 連山面이다. ‘연산’의 옛 이름이 黃山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장군 계백이 이끈 군대와 신라의 대군이 ‘黃山原’에서 전투한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한편 백제의 奴斯只縣(현재 충청남도 대전시 유성구)과의 음운상의 유사점을 들어 ‘유성’에 비정하는 설도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원문은 王城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원문은 王城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660) 정월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7월 9일에 소정방의 기벌포 도착과 황산원에서의 전투가 진행되었고, 12일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의자왕의 성이 포위되고, 13일에 왕성이 함락되었다. 왕성은 백제의 도읍인 泗泌城(현재 충청남도 부여)을 가리킨다. 사비성이 7월 13일에 함락되자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의자왕은 웅진성에 웅거했지만 18일에는 이곳도 함락되었다고 한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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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부는 백제의 왕도 5부 가운데 하나이다. 자세한 내용은 『日本書紀』 흠명천황 13년 10월조 西部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08)
    백제의 관위 16계 관등 가운데 제3위에 해당되는데, 부여에 남아 있는 「劉仁願紀功碑」에는 복신이 ‘杆率’이라 되어 있다. 杆率은 제5위에 해당되므로 차이가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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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舊唐書』 등에는 福信이라 적혀 있다. 백제 무왕의 조카인 동시에 의자왕의 사촌이다. 사비성이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게 함락된 후, 승려 도침과 함께 周留城을 근거로 부흥운동을 전개했다. 일본에 있던 왕자 豐璋을 맞아 왕으로 추대하고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劉仁願이 지키던 사비성을 포위하기도 했다. 唐이 劉仁軌를 파견하여 구원하게 하자, 任存성으로 물러나 복신은 霜岑將軍, 도침은 領車將軍을 칭하고 유민을 모아 부흥운동에 힘썼다. 그러나 도침과의 불화로 그를 죽이고, 풍장까지 죽이려 하다가 도리어 풍장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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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본의 任叙利山과 任存山은 모두 任存城을 가리킨다. 충청남도 대흥 부근에 있는 봉수산성을 가리키는다는 설과 충남 홍성 학성산성이라는 설이 제시되어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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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唐劉仁願紀功碑」에는 福信과 道琛이 함께 任存城에서 군대를 일으킨 것으로 되어 있고, 이 기사에서는 福信이 任存城에서 군대를 일으킨 것으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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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余自信이라고도 한다. 『日本書紀』 天智天皇 2년 9월조에는 渡倭한 기록이 보이고, 동 8년 시세조에는 여자신과 남녀 7백여 명이 近江國으로 이주한 기록이 보인다. 또한 동 10년 정월 시월조에는 大錦下를 제수받은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新撰姓氏錄』 右京 諸蕃 高野造條에는 「百濟人佐平余自信之後也.」라고 기재되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3)
    웅진성을 의미한다. 熊津城은 『周書』 백제전에 의하면 ‘중부는 古沙城’에 해당된다. 웅진성은 그 북쪽에 위치하며 당나라 군사가 점거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을 거점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잘못 전해진 내용이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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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충청남도 공주에 해당된다. 久麻那利는 『日本書紀』 雄略天皇 21년조의 분주에는 「汶洲王盖鹵王母弟也. 日本舊記云. 以久麻那利賜末多王. 盖是誤也. 久麻那利者任那國下哆呼唎縣之別邑也.」라고 적혀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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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의 豆率, 豆陵伊, 『日本書紀』의 硫留, 州柔 그리고 『新舊唐書』, 『資治通鑑』의 周留는 모두 같은 지역을 가리킨다. 임존성과 함께 백제부흥군의 근거지였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현재는 부안설이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日本書紀』 천지천황 원년 3월 䟽留城 참조.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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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660) 8월 2일조에는 ‘百濟의 잔여 무리가 南岑城 등에 거하고, 佐平 正武가 豆尸原嶽에 주둔하여 신라와 당나라 사람들을 약탈하였다.’고 적혀 있다. 26일조에는 ‘신라군이 任存(大興)의 大柵을 공격하였으나 적이 많고 지리가 험하여 이기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8월부터 이미 백제 부흥군의 저항이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7)
    백제 멸망 시의 전투에서 이미 무기가 소진되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8)
    원문은 棓이다. 『萬象名義』에는 「棓, 蒲講反. 大杖也, 梲也, 破也, 棒字.」라고 적혀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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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舊唐書』 百濟傳 顯慶 5년(660)조 및 『三國史記』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 9월조에 의하면, ‘蘇定方이 仁願에게 泗沘를 지키게 하고 王文度를 熊津都督으로 삼아 지키게 한 다음 9월 3일에 귀국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복신 등의 백제부흥군이 백제의 왕성인 사비성을 탈환했다는 내용은 다른 곳에는 보이지 않는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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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0년에 은솔과 달솔로 각기 기재된 귀실복신과 여자진이 좌평이라 기재되어 있다. 좌평은 백제 관등 16계 가운데 최고위에 해당되므로 여기에 보이는 좌평은 존칭의 의미로 기재된 것으로 이해된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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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멸망과정을 간단히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660년 3월 당 고종이 소정방을 대총관으로 하여 수륙 13만의 군으로 백제 정벌을 명함 → 5월 16일 신라 무열왕이 김유신 등과 함께 경주에서 출발 → 6월 18일 무열왕 등이 南川停에 도착 → 6월 21일 무열왕이 태자 法敏을 보내어 德物島에서 소정방을 맞이함 → 7월 9일 신라의 김유신이 황산벌에서 백제의 계백과 싸움. 소정방이 기벌포에 도착 → 7월 12일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의 사비성을 포위 → 7월 13일 사비성에 있던 왕자 隆, 대좌평 天福 등이 항복 → 7월 18일 의자왕이 태자와 함께 웅진성에서 항복.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각종(覺從), 소정방, 춘추지, 귀실복신(鬼室福信), 여자진(餘自進), 복신, 복신, 자진, 복신
지명
미자진(尾資津), 노수리산(怒受利山), 사비성, 노수리산, 임사기산(任射岐山), 북임서리산(北任叙利山),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 도도기류산(都都岐留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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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각종을 보내 백제의 멸망과 귀실복신이 다시 일으키고자 함을 알림 자료번호 : ns.k_0040_0070_005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