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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1916년도에 이루어진 대성산록과 그 주변의 고구려 유적 발굴조사는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세키노조사단’이 주도하였다. 이전의 세키노조사단에는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와 야쓰이 세이치[谷井濟一], 구리야마 준이치[栗山俊一]가 중심적으로 활동하였지만 1916년부터는 새롭게 오바 쓰네키치[小場恒吉], 노모리 겐[野守建], 오가와 게이키치[小川敬吉]가 가세하여 조사 진용이 더욱 짜임새를 갖추게 되었다.
1916년에 조사된 고구려유적에 대해서는 정식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았다. 『대정오년도고적조사보고(大正五年度古蹟調査報告)』와 『고구려시대의 유적(高句麗時代之遺蹟)』이 참고가 되지만 전자는 총독부에 제출된 조사복명서를 묶은 것이고, 후자는 한참 늦은 1929년에 본문 없이 도판만으로 발행된 것이어서 상세한 조사내용을 파악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조사내용을 좀 더 선명하게 알아내기 위해서는 조사 참가자가 조사 후에 일본에서 발표한 논문과 조사 당시의 원본 일지, 도면, 사진 등을 같이 종합해서 검토해야 한다. 조사 당시의 발굴일지는 도쿄대학교 건축학연구실에 보관된 ‘세키노컬렉션’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미 이 시리즈물의 제1집에서 공동연구자였던 사오토메 마사히로[早乙女雅博]가 부분적으로 활자화하여 보고한 바 있다(早乙女雅博, 2008).
다이쇼[大正] 5년에 세키노가 제출한 복명서를 살피면 세키노조사단은 먼저 대성산성(大成山城)에 올라 성벽과 성 내부를 답사한 다음 주변의 고구려 고분을 차례로 조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대성산의 남록에 위치하는 안학궁지의 주변으로 모두 천 수백 기의 고구려 고분이 산재하는 사실을 확인했는데, 석총과 토총이 혼재하는 상황이라고 기술하였다. 훼손된 것이 많고 봉토를 남기는 경우에는 이미 도굴된 것이 대부분이라고 하였다.
장수원시장의 남쪽에 여러 기의 고분이 있어 일부를 조사한 다음 벽화가 발견된 고분을 노산리 개마총이라고 이름 붙였다. 또 장수원의 동북으로 약간 떨어진 대지 위에 약 20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는데 그중 조사된 고분을 내리 서북총이라 하였다. 대성산성의 동쪽으로도 고구려 고분군이 연속하는데 그중에서 4기를 조사하였다. 이를 각각 토포리 대총, 토포리 남총, 호남리 사신총, 호남리 금사총이라고 이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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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의 고구려 유적 조사 자료번호 : ku.d_0003_003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