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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한편 당시도리이의 경쟁자이면서 「조선고적조사사업(朝鮮古蹟調査事業)」에서 일찌감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도쿄대학 공학부 건축학연구실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도 1913년 9월 12일부터 12월까지 집안의 고구려 유적을 조사한다. 세키노는 도리이와는 달리 처음부터 조선고적조사의 일환으로 집안을 방문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촉탁이라는 신분으로 현지조사를 실시하였으므로 관련 비용은 조선총독부에서 부담했을 것이다.
조사단은 세키노 다다시를 단장으로 하고 야쓰이 세이이치, 이마니시 류, 구리야마 등이 보조하였는데, 사진촬영은 도리이의 조수이기도 했던 사와 슌이치가 담당했다. 즉 이 때의 조사에서 촬영되어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Ⅰ에 실린 사진은 그 대부분을 사와가 촬영한 것으로 이해해도 된다. 이마니시 류는 도쿄대학 문학부 사학과 출신이고 구리야마는 세키노와 마찬가지로 도쿄대학 공학부 출신의 제자이기 때문에 세키노가 꾸린 조사단은 그야말로 도쿄대학 조사단이라 할 수 있다.
1913년에 세키노는 바쁜 일정을 보내는데, 지난 글(정인성, 2008)에서 밝힌 것처럼 진남포에서 여러 고구려 고분을 조사한 다음 용강에서 쌍영총과 용강대총 등을 조사하고 육로로 북상하여 안주, 희천, 강계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에서는 11일간에 걸쳐 각종 유적을 조사하고 다시 압록강을 건너 아득령, 황초령을 지나, 함흥까지 가서 조사를 수행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조사과정에서 그는 그가 지나온 길이 고구려 시기에 집안에서 평양으로 혹은 함흥 방면으로 통하던 고대 교통로라고 판단했다. 즉 이는 관구검이 침입했을 때의 추격로로 판단하였는데, 세키노가 조사 전에 이미 관련 문헌을 꼼꼼히 파악하고 조사에 임했음을 확인시켜 준다. 즉 세키노의 현지답사라는 것은 관련되는 문헌기사를 현지답사를 통해 확인하는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13년의 집안 답사에서 세키노의 구체적인 동선은 현재 도쿄대학에 남아 있는 ‘세키노 컬렉션’주 001
각주 001)
세키노 다다시가 평생의 조사과정에서 남긴 방대한 양의 조사 기록으로 야장, 도면, 탁본, 사진류가 포함된다. 현재 도쿄대학의 총합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나 공과대학 건축학연구실에서 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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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사진목록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목록집은 세키노 다다시가 조선고적조사와 관련된 조사에서 촬영한 유리건판과 함께 총독부 박물관에 제출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의 사진 목록은 대개 사진이 촬영되는 순서대로 작성된다는 사실(國立中央博物館, 1997)을 감안하면 집안에 도착한 세키노 조사단이 가장 먼저 조사한 것은 국내성이다. 그런 다음 산성자 산성으로 이동하여 조사하고, 그 주변에서 절천정총과 석총(아마도 형제총)을 현지조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다음 마선구로 다시 내려와 천추총과 오회분을 순서대로 사진 촬영하였다. 오회분의 개별 고분에 대한 조사를 마친 다음 태왕릉과 호태왕비를 차례대로 조사하고 광개토대왕릉은 가장 마지막에 조사하였다. 집안의 조사를 마친 세키노는 이후 아득령과 장진군, 황초령의 진흥왕순수비비각, 천불산 개심사로 이동하면서 조사를 계속하였는데(세키노 컬렉션 사진목록 참조), 이는 세키노가 강연에서 밝힌 동선과 대체로 일치한다.
여러 고분들을 제쳐두고 국내성과 산성자 산성을 가장 먼저 조사한 것을 보면 1913년의 조사에서 세키노가 가장 주목한 것은 고분이 아니라 국내성과 산성자 산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국내성과 환도성의 위치 비정 문제가 일본 학계의 중요한 이슈였고, 라이벌 관계였던 도리이가 세키노보다 한 발 앞서 집안을 답사하고 환도성과 국내성의 위치 비정 문제를 선점당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된다.
세키노는 답사 전에 일본고고학회에서 강연했을 때 국내성의 위치를 통구성 또는 산성자로 비정했지만 환도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실지를 답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조사 전인 같은 해(1913년) 3월 27일에 동양협회(東洋協會)에서 ‘만주 집안현의 고구려 시대 유적’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을 때 환도성의 위치를 통구에서 약 17~18리 하류에 있는 유수림자구 근처라고 판단했다.
『고고학잡지』에 수록된 답사보고를 살피면 세키노는 우선 압록강을 중심으로 집안분지의 자연지리적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 다음 통구 주위를 견고한 석성(石城)으로 구축했음을 설명하고 산성자(山城子)에는 자연지형을 절묘하게 이용한 산성자 산성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산성에 대해서 개괄한 세키노는 집안과 마선구, 산성자를 포함하여 집안에 1만기 이상의 고분이 있으며 이들 모두를 고구려 고분으로 판단하고 있다(關野, 1914c·1914d)
圖13_소판석령을 오른 세키노 일행 (『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세키노가 이때 집안의 석총들을 고구려 고분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은 학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1909년에 평양에서 석암리 벽돌무덤을 조사하고 그 전실묘를 고구려무덤으로 발표하였다가 도리이 류조의 비판을 받은바 있기 때문이다(정인성, 2006). 즉 일정 기간 세키노는 이미 도리이가 요동지역에서 고구려와 한족(漢族)의 고분을 분명히 구분하고 그 내용을 잡지에 공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의 벽돌무덤을 고구려의 것으로 판단하였다. 도리이가 적절한 비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학회장에서는 주류학자 세키노와 상반된 주장을 하는 도리이에 대해 심한 비난이 쏟아졌고, 그후 조선고적조사에서 그 역할이 크게 제한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도리이는 후일 세키노의 그러한 해석이 청일전쟁과 관련된 정치적인 해석이라고 의심했다(鳥居, 1953).주 002
각주 002)
즉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중국문화와 구별되는 고구려 유적을 발견하는 것이 유리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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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맥락에서 1913년에 이루어진 집안 조사는 세키노가 고구려와 낙랑고분의 차이를 현지 조사경험을 바탕으로 분명히 인식하는 계기가 된 점에서 중요하다.
또한 광개토대왕비를 관찰하고 동대자(東臺子)에서 건축물의 초석군과 많은 기와를 발견하는데, 이를 통해 통구(집안)가 고구려 시대에 오랫동안 국도(國都)로 기능하였음을 확신했다. 나아가 그 국도가 국내성인지 환도성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 있었는지에 의문을 가지면서 답사를 진행하였다.
세키노는 답사 결과 통구는 고구려의 국내성이고 산성자 산성은 고구려대의 위나엄성이라고 결론내리는데, 당시 참고한 문헌은 도리이의 그것보다 폭 넓어서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삼국사략』, 『동사강목』, 『문헌비고』,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 등을 아우른다. 세키노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근무하던 오다 쇼고의 도움으로 이러한 서적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정약용이 『대한강역고』에서 국내성을 초산 부근의 북쪽 강을 건넌 땅이라고 한 점을 주목했다. 그리고 『동삼성여지도설(東三省與地圖說)』에 처음으로 광개토대왕비가 소개되면서 “그 비가 출토된 통구의 땅은 개국내성(蓋國內城)의 근교가 된다”고 적어두고 있음을 참고했는데, 이는 시라토리와 같은 의견이다.
한편 환도성의 위치 비정을 둘러싸고 1906년에 발견된 관구검 기공비에 세키노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당시 관구검 기공비의 탁본을 일본군인 호리미[堀米]가 오가와[小川柳波]에게 건넸는데, 이를 확인한 오가와는 비석이 발견된 판석령을 환도성이라 했다. 이미 살핀 것처럼 도리이는 처음 통구가 국내성인 위나엄성이고 판석령이 환도성이라고 주장했다. 즉 국내성과 위나엄성을 동일시한 것이다. 그 뒤 1912년의 현지조사 후에 생각을 바꾸어 『동사강목』이나 『문헌비고』를 참고로 국내성을 환인의 오녀산성이라 하고 환도산성을 산성자라고 했다. 당시 문헌학의 마쓰이와 같은 연구자는 여전히 환도성을 판석령에 비정하고 『요사(遼史)』를 참고하여 국내성을 압록강의 상류인 임강현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세키노는 정약용의 국내성 비정이 탁견이라 평가하면서 광개토대왕릉비의 발견으로 그 물적 증거가 확보되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판석령에서 관구검 비석이 발견되면서 다수의 연구자들이 이를 환도성으로 비정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라 하였다. 나아가 판석령 답사에서 산성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산성자 산성을 지목한 도리이의 설을 평가하면서도 국내성 비정 문제에서는 대립각을 분명히 했다.
결과적으로 세키노는 국내성을 지금의 통구(집안)로 판단하고 위나엄성을 산성자로 비정했다. 그 근거로는 『삼국사기』유리왕조의 기사에서 말하는 국내, 위나엄성의 설명이 통구, 즉 집안의 그것과 유사함을 들었다. 또한 국내성은 발해의 신주(神州), 요대의 녹주(神州)에 해당한다고 확신했다.
집안 답사과정에서 이 문제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하여 야쓰이와 이마니시에게 조사를 의뢰하였다. 두 사람이 마선구를 2리 정도 올라갔더니 길이 두 개로 갈라졌는데, 오른쪽을 택해 올라가니 다시 길이 나누어지는데 오른쪽을 선택하면 통화로 가고 왼쪽을 선택하면 대판석령을 지나 환인으로 통한다. 그런데 처음부터 왼쪽 계곡을 거슬러 올랐더니 소판석령이 나왔는데 관구검 비편이 나온 곳이 그곳, 즉 소판석령임을 확인했다.
당시 세키노도 도리이와 마찬가지로 비석의 출토 경위에 대해 현지에서 청취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두었는데, 오광국의 증언을 그대로 옮겨 적고 있다.
처음 비석이 출토된 것은 이 소판석령의 고개 정상부 오른쪽에서 도로공사를 하다가 한 인부가 발견하고 이를 집안현 지사인 오광국에게 건네었는데 그는 이를 관구검의 기공비라고 판단하였다. 즉시 인부 10여 인을 사역시켜 비편이 발견된 지점의 돌들을 전부 조사시켜 다른 파편도 획득했다.
 
야쓰이와 이마니시의 현지답사 결과 그곳이 통구의 서북쪽 6리 정도에 해당하며 조망이 좋아 멀리 조선의 낭림산이 보이는 것을 확인했지만 주위에 성으로 인정할 만한 평지나 유적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었다. 나중에 이 지역에 대한 상세한 지도를 손에 넣어 이를 확인해 보았더니 그곳이 통구에서 환인으로 가는 교통로로는 적합하지만 도저히 산성이 축조될 지형이 아니라고 보았는데, 앞에서 살핀 것처럼 그러한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도리이와 너무도 흡사하다. 이곳을 환도라고 비정하는 것은 직접 현지를 답사하지 않았던 결과라 비판하고 이곳을 환도라 추정하고 국내성을 임강현 부근으로 판단한 설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답사 후 환도를 산성자로 비정하는 도리이의 주장마저 비판한 사실이다. 그것은 산성자가 험하여 성내에 왕궁 등을 만들 공간이 없으며 겨우 창고지 정도가 인정된다고 하여 도저히 성내의 지형이 도성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즉 도리이는 관구검 기공비 잔편이 출토된 소판석령을 환도산이라 하고 산성자 산성을 환도산이라고 했으나 세키노는 그 거리가 4리에 이르고 지세가 연속되는 산맥이 아니기 때문에 『위지(魏誌)』의 환도기사(丸都記事)인 ‘도어환도지하(都於丸都之下)’와 관구검의 기사를 참조하여 환도성은 환도산의 허리에 있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아 산성자성을 환도성으로 보는 설에 분명히 반대한 것이다.
세키노는 1913년의 조사범위가 통구지역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환도(丸都)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했는데, 통구가 국내성이라면 『요사』 등의 기록으로 보건대 환도는 압록강의 하류 20리 지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소판석령이 환도성이 아니라면 관구검 기사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관구검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왕이 환도성을 도망쳐 국내성에 이르러 강을 건너 조선의 강계로 들어가 도망하므로 이를 쫓아 함흥(咸興), 종성(鏡城) 부근까지 이르렀는데, 관구검은 귀로에 다시 환도를 통과하지 않고 우회하여 소판석령을 지나면서 그곳에 기공비만을 세워두고 곧장 환인으로 빠져 나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세키노는 집안(통구)성이 국내성이지만 산성자성은 위나엄성이라고 판단하고 환도성은 『도리기(道里記)』나 『요사』의 기록을 근거로 집안에서 압록강을 따라 더 하류에 있는 유수림자 부근일 것으로 예상했다.
도리이와 세키노를 중심으로 문헌과 현지답사를 통한 국내성과 위나엄성, 그리고 환도성의 비정 문제는 그 후에도 한동안 논란이 되었다. 1914년에 시라토리는 환도성이 산성자에 있다는 도리이의 손을 들어 주었으나 국내성이 오녀산성이라는 설에는 반대하였다. 그 후 1935년에 이케우치 히로시는 집안을 답사하고 시라토리의 주장에 동조했다.
광복 후 중국 학자들은 집안의 성을 유리왕이 천도한 국내성이라 인정하고, 천도 동시에 쌓았다는 위나엄성은 본래 산성자 산성인데, 산상왕 재위시에 산성자 산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은 다음 이를 환도성이라 부르고, 산상왕 재위 53년에 왕궁을 산성으로 옮겼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연구자도 있어 도리이와 세키노가 촉발시킨 국내성과 환도성의 위치 비정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연구과제로 남아 있다(田村, 2001)

  • 각주 001)
    세키노 다다시가 평생의 조사과정에서 남긴 방대한 양의 조사 기록으로 야장, 도면, 탁본, 사진류가 포함된다. 현재 도쿄대학의 총합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나 공과대학 건축학연구실에서 관리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즉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중국문화와 구별되는 고구려 유적을 발견하는 것이 유리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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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노 다다시의 1913년 조사 자료번호 : ku.d_0003_002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