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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간성리 연화총

1) 조사 경과

고분은 강서에서 남남동으로 780m 정도 떨어진 원산(園山)이라고 불리는 작은 산의 남쪽에 있으며, 남쪽에서 서쪽으로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간성리 연화총은 간성리 고분이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서는 간성리 연화총이라 하겠다. 세키노는 간성리 연화총을 강서 삼묘의 조사가 끝난 다음 조사하였다고 하였으나 세키노의 야장에는 석실 내부에 대한 약측과 문양 스케치가 9월 25일에 이루어진 것으로 주기되어 있다. 세키노가 간성리 고분의 정보를 전해 들은 것은 강서 삼묘를 조사하는 과정에서이다. 이미 누군가에 의해 도굴되어 석실 내부로 출입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강서 삼묘를 조사하면서 동시에 조사한 것이다. 간성리 고분의 조사에도 총독부박물관의 토목기수인 이와이 초사부로가 동행하였다. 도쿄대학에는 1913년 조사 당시 이와이가 작성한 고분의 측량도와 내부 도면이 보관되어 있는데(圖159~162), 이는 『조선고적도보』Ⅱ에 일부 흑백으로 게재된 도면(圖148, 149)의 원본이다.

2) 조사 내용

조사 전의 간성리 고분은 봉토에 노출된 석재가 없이 언덕을 이루고 있었고, 봉토 사면을 따라 조선시대 묘들이 조영되어 있는 상태였다(圖150). 조사 지원을 위해 총독부 영선과에서 나온 이와이 기사가 작성한 측량도를 보면 북서에서 남동으로 이어지는 구릉에 축조된 고분임을 알 수 있다. 이와이의 봉토 측량도에는 2m 높이 간격의 등고선이 그려져 있는데(圖159), 이는 봉토 외연선 만을 삼각측량했던 강서 대묘·중묘와는 다른 것이다. 아마도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고분 조사 중에서 등고선을 그려넣어 봉토의 형태를 측량 실측한 가장 이른 사례로 판단된다.
이와이의 도면을 참고하면 봉토의 남쪽 기저에서 분정(墳頂)까지는 26m 정도이고, 북쪽 구릉사면에서의 높이는 8m 정도이다. 석실은 연도를 남쪽 중앙으로 달아낸 것으로 전실(前室)과 후실(後室)로 구성된다. 굴착은 연도부를 노려 봉토를 파내고 전실 천장의 흙도 같이 걷어내면서 진행되었다. 20분의 1로 작성된 석실 실측도를 보면 조사 과정에서 전실의 천장석까지 굴착했음이 확인되며 천장석에도 구멍이 나 있다. 이것이 조사 이전의 도굴구인지, 아니면 조사 과정에서 석실 내로 빛을 모으기 위해 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세키노가 9월 25일에 작성한 야장에 그려진 도면을 보면 연도부와 전실, 그리고 현실의 흙을 전부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석실 내로 들어가 조사를 진행했음이 인정된다(圖156). 그러나 이와이의 석실 내부 실측도를 검토하면 석실과 연도부 바닥까지 자세히 표현되어 있다(圖161, 162). 세키노가 현장 조사를 하고 난 다음에도 이와이는 실측 도면을 완성시키기 위해 내부 토사를 제거하는 작업을 계속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하 고분의 내부 형태에 대해서는 세키노의 보고를 충실하게 정리해 보기로 한다(關野1914a). 고분은 전실과 현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실의 남쪽 중앙에는 출입할 수 있는 연도가 있다. 전실의 너비는 동서가 512cm 정도, 남북이 248cm이고, 천장 높이가 348cm이다. 현실은 방형에 가까운데 한 변이 348cm, 높이가 415cm이다. 전실에는 현실로 통하는 통로의 좌우벽과 동서벽의 전방(남쪽)에 각각 방형의 감(龕)을 만들었다. 전실의 천장은 전후 벽에만 2단의 평행고임돌을 놓고 그 위를 3개의 구획으로 나누고 각 구획 내부를 방형으로 한 단씩 높게 처리하였다. 현실 천장은 평행고임돌을 3번 쌓고 삼각고임을 2번한 다음 천장석 한 매를 덮어 마무리하였다. 벽은 두께 6cm나 14cm 정도의 안산암재로 쌓고, 입구와 감의 주위는 거친 화강암 석재로 만들었다. 벽 전면은 천장에 이르기까지 석회를 3번에 걸쳐 겹쳐 바르고 그 위로 약간의 채색을 하거나 간단한 문양을 그려서 회화를 작성하였다. 전실의 벽과 천장 등에는 흑색과 갈색으로 문양을 그렸다. 현실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뱀처럼 생긴 형상을 그린 것으로 보이나 훼손되어 그 윗면만이 간신히 남아 있다. 입구의 서쪽 감실에는 인물상이 있다. 얼굴은 훼손되었지만 복식은 식별할 수 있다. 인물의 위로 남북조식의 천개가 그려져 있고 아래에 화염문을 그렸다. 다른 감실 내에도 그림이 있었으나 박락되어 분명하지 않다. 천장 각 구의 중심에는 각각 커다란 연화를 그렸는데 서쪽 구획의 것은 확실히 남아있다. 연화문은 연판의 끝이 날카롭지만 우아하다. 조사 당시 중앙의 천장석이 없어진 상태였는데 이곳을 통해 내부로 출입하였다. 동쪽의 천장석은 박락되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현실은 조사 시 너무 어두워서 촛불로 비추어 보았으나 벽과 천장을 정확히 관찰할 수가 없었다. 남벽 입구 위에는 두꺼운 검은 띠로 삼각형 윤곽을 만들고 그 안에는 봉황을, 그 위에는 뱀 같은 것을 그렸다. 동쪽에는 기린같은 것(다리만 남았음)을 그리고, 서쪽에는 천인을 그려 놓았다. 벽의 사방에는 기둥과 두공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기둥머리에는 명판(皿板)이 있다. 천장의 3중 삼각고임돌에는 흑색이나 갈색으로 두꺼운 띠를 만들었다. 모서리와 삼각형고임돌의 아래에는 삼족오, 파문, 봉황같은 것을 그려 놓았지만 희미하다. 천장의 중심 장식으로 커다란 연화를 그린 것 같다.
이 고분은 비교적 규모가 크고 장식(벽화)이 간단하지만, 전후 이실(二室)이고 북위식(北魏式)에 가까운 두공과 천개모양의 연화문으로 볼 때 약 1,400년전(1912년 기준)의 것으로 여겨지며 강서 삼묘보다 고식이다(關野1914a).
간성리 연화총에서는 한 점의 철못이 출토되었는데 못머리가 둥글고 몸 단면은 사각형이다(圖153). 조사 후 총독부박물관으로 보내진 것으로 확인되는데,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3) 도면과 야장의 정보

여기서는 세키노의 보고에 의한 간성리 고분 설명과 이와이의 도면, 세키노의 야장 약측도에서 얻어지는 정보를 추가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우선 이와이의 도면 자료에는 전실과 현실의 사이에 전실 쪽에 붙여서 양쪽으로 돌문을 달아 회전할 수 있게 장부 구멍을 만들어 두었음이 관찰된다(圖149). 묘도와 연결되는 연도 부분에도 판석으로 된 폐쇄석을 세워둔 흔적이 관찰된다(圖150). 전실 천정의 각 구(區)를 높이는 방법은 천장부에 두껍게 석회를 발랐기 때문에 파악하기 힘들다. 연도와 전실, 현실 네 벽 모두에도 두껍게 회를 칠했는데, 조사 당시 곳곳에 박락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도면을 통해 알 수 있다(圖161, 162). 이와이의 석실 입단면도에는 고분의 굴착 방법과 벽의 축조 상황이 잘 나타난다. 연도 벽은 석회를 먹이고 자연석을 놓으면서 쌓았고, 석실 네 벽은 비교적 대형 석재로 조립하고 그 위에 회를 바른 정황을 알 수 있다(圖162). 전실에 설치된 감은 그 높이를 비슷하게 맞추었다. 현실의 서벽 남쪽 모서리에 그려진 두공과 현실 천장의 동남 삼각형고임돌 아래에 그려진 바람개비 모양의 벽화는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것으로 학술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圖157). 천장 부분의 벽화도 흐린 사진만 보고되었었기 때문에 세키노가 야장에 그려둔 스케치는 자료적 가치가 높다(圖158). 봉토의 등고를 작성하고 봉토와 석실의 단면을 측량한 점은 이후 전개되는 공식적인 ‘고적 조사’의 기본 조사틀이 되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부분이다.

『조선고적도보』의 사진과 도면

圖148_분구 측량도
圖149_석실 내부 실측도

세키노의 현장 기록

圖150_간성리 연화총 발굴 전 상태
圖151_현실 천장부
圖152_연도 형태
圖153_삼각고임부 벽화와 출토 유물
圖154_현실 천장의 벽화
圖155_간성리 연화총 현장 메모
圖156_간성리 연화총 약측도
圖157_간성리 연화총 벽화
圖158_간성리 연화총 벽화

이와이의 측량 실측

圖159_간성리 연화총의 분구 측량도
圖160_간성리 연화총 석실 평면도
圖161_간성리 연화총 측단면도 1
圖162_간성리 연화총 측단면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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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성리 연화총 자료번호 : ku.d_0003_0010_005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