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봉한이 울릉도의 일을 널리 고증하여 책자를 만들 것 등을 아뢰니 윤허하다
사료해설
홍봉한은 울릉도(鬱陵島)에서 나는 인삼(人蔘)을 상고(商賈)들이 몰래 들어가서 채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인들이 알게 된다면 ‘울릉도쟁계’와 같은 문제가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울릉도에 관한 문헌이 부족하므로 관련문서들을 모아서 책자(冊子)로 만들 것을 요청하였는데 영조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 사료를 통해 울릉도에서 인삼이 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18세기 중엽부터는 잠상(潛商)들이 몰래 채취해가는 일이 제법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문
○領議政洪鳳漢奏曰: “聞鬱陵島産人蔘, 商買潛入採之, 倭人若知之, 恐有爭桑之患矣。” 仍請曰: “我國文獻不足, 今於鬱陵島事, 無所考證。 自今博採前後文蹟, 作一冊子, 以爲事大交隣文字好矣。” 上允之。 鳳漢又奏: “濟州覆船時, 軍官具埉, 抱御史而跳下丈許, 汲水船所率六七人賴而得生, 皆埉之功也。 收用似好矣。” 上曰: “昔年閔濟章以通信使軍官, 能活多人而陞資。 且埉曾以參軍, 未出六云, 特爲加資爲五衛將, 奬一勵百焉。”
번역문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듣건대 울릉도(鬱陵島)에서 나는 인삼(人蔘)을 상고(商賈)들이 몰래 들어가서 채취한다고 하니, 왜인(倭人)들이 만약 이를 안다면, 아마도 쟁상(爭桑)의 근심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이어서 청하기를,
“우리 나라의 문헌(文獻)이 부족하여 지금 울릉도의 일에 있어 고증(考證)할 바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전후의 문적(文蹟)을 널리 채택하여 한 책자(冊子)를 만들어서 사대(事大)·교린(交隣)의 문자(文字)를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홍봉한이 또 아뢰기를,
“제주(濟州)에서 배가 뒤집혔을 때 군관 구협(具埉)이 어사(御史)를 안고 한 길[丈]쯤 되는 급수선(汲水船)에 뛰어내려 6, 7인이 이를 힘입어 살았는데 모두 구협의 공(功)이니, 거두어 서용(敍用)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나간 해에는 민제장(閔濟章)이 통신사(通信使)의 군관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살린 까닭에 승자(陞資)하였었다. 또 구협이 일찍이 참군(參軍)으로서 출륙(出六)되지 않았다고 하니, 특별히 가자(加資)하여 오위 장(五衛將)을 삼아 한 사람을 권장하여 백 사람을 면려(勉勵)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듣건대 울릉도(鬱陵島)에서 나는 인삼(人蔘)을 상고(商賈)들이 몰래 들어가서 채취한다고 하니, 왜인(倭人)들이 만약 이를 안다면, 아마도 쟁상(爭桑)의 근심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이어서 청하기를,
“우리 나라의 문헌(文獻)이 부족하여 지금 울릉도의 일에 있어 고증(考證)할 바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전후의 문적(文蹟)을 널리 채택하여 한 책자(冊子)를 만들어서 사대(事大)·교린(交隣)의 문자(文字)를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홍봉한이 또 아뢰기를,
“제주(濟州)에서 배가 뒤집혔을 때 군관 구협(具埉)이 어사(御史)를 안고 한 길[丈]쯤 되는 급수선(汲水船)에 뛰어내려 6, 7인이 이를 힘입어 살았는데 모두 구협의 공(功)이니, 거두어 서용(敍用)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나간 해에는 민제장(閔濟章)이 통신사(通信使)의 군관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살린 까닭에 승자(陞資)하였었다. 또 구협이 일찍이 참군(參軍)으로서 출륙(出六)되지 않았다고 하니, 특별히 가자(加資)하여 오위 장(五衛將)을 삼아 한 사람을 권장하여 백 사람을 면려(勉勵)시키도록 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