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강(婼羌)에 대한 소개
양관을 나서서 가까운 것부터 시작하면 야강(婼羌)
주 001
각주 001)
이 있다. 야강의 국왕은 ‘거호래왕(去胡來王)’주 002이라 칭한다. 양관에서 1,800리,주 003婼의 발음에 대해서 “婼의 音은 兒이다”라고 하나 孟康에 따르면 nzie로 읽을 수 있지만, “音而遮反”이라고 한 顔師古에 따르면 nzi와 tsia의 反切音 즉 nzia로 읽게 된다. Karlgren(1957)에 따르면 그 음은 t’iak이 된다. 婼은 중국 측 기록에서 『左傳』과 『穀梁傳』에 기원전 7세기 魯國의 한 귀족의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지만, 여기서는 羌族의 일부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Hulsewé, 1979 : 80 참조). 婼羌은 곤륜산맥에서 인도 서북부에 이르는 고산지대에 광범위하게 분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岑仲勉(1981 : 1-6)은 이 지명이 후일 야르칸드(Yarkand, 葉爾羌)의 기원이 된 것으로 보았다.
각주 003)
장안에서 6,300리 떨어져 있으며, 서남쪽에 동떨어져 있고[辟] 대도[孔道] 연변에 있지 않다.주 004호수는 450, 인구는 1,750, 병사는 500이다. 서쪽으로 차말(且末)과 접한다. 가축을 따라 수초를 찾아다니며, 농사를 짓지 않고 선선과 차말의 곡식에 의존한다. 산에는 철이 나며 스스로 무기를 만드는데, 무기에는 활, 창, 단검[服刀], 검, 갑옷 등이 있다. 서북으로는 선선에 이르며, 그렇게 되면 대도를 만나게 된다.陽關을 나서서 가장 가까운 곳(‘近者’)이 婼羌이라고 했지만 相距는 1,800里라고 하였는데, 이는 곧 이어 나오는 鄯善에 관한 기록 즉 陽關에서 1,600里 떨어져 있다는 내용과 상치된다. 이러한 모순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漢書』에 기록된 里數가 때로는 實測에 근거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구간별 거리를 合算하여 도출된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즉 陽關에서 鄯善까지의 거리 1,600里는 馬行으로 16일 걸린다는 實測에 근거한 것이지만, 陽關에서 婼羌까지의 거리는 직통거리를 계산한 것이 아니라 陽關-鄯善에다가 鄯善-婼羌의 2일거리(=200里)를 合算하여 나온 것이다. 이것은 당시 陽關을 나서서 白龍堆를 거쳐 제일 먼저 도착하는 곳이 鹽澤 부근의 樓蘭(=鄯善)이고, 婼羌은 鄯善을 경유해서만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세 지점의 방위를 고려하면 陽關에서 婼羌까지의 거리가 실제로는 더 가까웠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본문에서와 같이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서 婼羌에 대하여 “辟在西南, 不當孔道”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런 사정을 말해 준다. 물론 婼羌을 현재의 若羌으로 볼 경우 鄯善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당시의 婼羌은 그보다 훨씬 더 동쪽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Herrmann, 1966 : 16의 지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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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婼의 발음에 대해서 “婼의 音은 兒이다”라고 하나 孟康에 따르면 nzie로 읽을 수 있지만, “音而遮反”이라고 한 顔師古에 따르면 nzi와 tsia의 反切音 즉 nzia로 읽게 된다. Karlgren(1957)에 따르면 그 음은 t’iak이 된다. 婼은 중국 측 기록에서 『左傳』과 『穀梁傳』에 기원전 7세기 魯國의 한 귀족의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지만, 여기서는 羌族의 일부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Hulsewé, 1979 : 80 참조). 婼羌은 곤륜산맥에서 인도 서북부에 이르는 고산지대에 광범위하게 분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岑仲勉(1981 : 1-6)은 이 지명이 후일 야르칸드(Yarkand, 葉爾羌)의 기원이 된 것으로 보았다.
-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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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3)
陽關을 나서서 가장 가까운 곳(‘近者’)이 婼羌이라고 했지만 相距는 1,800里라고 하였는데, 이는 곧 이어 나오는 鄯善에 관한 기록 즉 陽關에서 1,600里 떨어져 있다는 내용과 상치된다. 이러한 모순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漢書』에 기록된 里數가 때로는 實測에 근거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구간별 거리를 合算하여 도출된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즉 陽關에서 鄯善까지의 거리 1,600里는 馬行으로 16일 걸린다는 實測에 근거한 것이지만, 陽關에서 婼羌까지의 거리는 직통거리를 계산한 것이 아니라 陽關-鄯善에다가 鄯善-婼羌의 2일거리(=200里)를 合算하여 나온 것이다. 이것은 당시 陽關을 나서서 白龍堆를 거쳐 제일 먼저 도착하는 곳이 鹽澤 부근의 樓蘭(=鄯善)이고, 婼羌은 鄯善을 경유해서만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세 지점의 방위를 고려하면 陽關에서 婼羌까지의 거리가 실제로는 더 가까웠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본문에서와 같이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서 婼羌에 대하여 “辟在西南, 不當孔道”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런 사정을 말해 준다. 물론 婼羌을 현재의 若羌으로 볼 경우 鄯善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당시의 婼羌은 그보다 훨씬 더 동쪽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Herrmann, 1966 : 16의 지도 참조).
- 각주 004)
색인어
- 지명
- 야강(婼羌), 야강, 장안, 차말(且末), 선선, 차말, 선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