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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서역이 복종된 뒤 자세한 환경이 알려지게 됨

  • 국가
    서역(西域)
원제(元帝) 주 001
각주 001)
元帝 : 재위 전48~전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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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이르러 무기교위(戊己校尉)주 002
각주 002)
戊己校尉 : 『漢書』 「百官公卿表」에 따르면 元帝 初元元年(전48)에 두어졌고 丞․司馬 각 1인, 候 5인이 있었다고 한다. 丞의 秩이 比六百石이라면 校尉는 比二千石이었을 것이다. 戊己校尉를 설치한 목적은 車師前王庭의 屯田을 위해서였다. 그곳에 둔전을 실시한 것은 宣帝 地節 4년(전66)부터 시작되었지만, 당시는 아직 車師가 前後部로 나뉘기 전이었다. 元康 2년(전64) 흉노의 공격으로 인하여 한은 車師屯田을 방기하고 주민들을 渠犁로 이주시켰는데, 神爵 2년(전60) 日逐王의 투항으로 鄭吉이 車師를 격파하고 渠犁로 이주했던 주민들을 다시 복귀시켰다. 그리고 初元元年 戊己校尉가 두어지면서 車師(交河)에서의 屯田이 다시 본격적으로 재개된 것이다. ‘戊己’라는 명칭은 흉노의 공격을 막는다는 의도에서 ‘以土塡水’의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설명이 있는데(余太山,2005 : 75-76), 자세한 내용은 後註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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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다시 설치하고 거사전왕정(車師前王庭)에 둔전을 실시했다. 이 때 흉노의 동쪽에 있는 포류(蒲類) 주 003
각주 003)
蒲類 : 뒤의 蒲類國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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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왕 자력지(茲力支) 주 004
각주 004)
茲力支 : 여기서만 언급되는 인물이며, 다른 사항은 알려진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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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1,7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도호에게 투항해 오자, 도호는 거사후왕의 서쪽을 오탐자리(烏貪訾離) 주 005
각주 005)
烏貪訾離 : 뒤에 烏貪訾離國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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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이름]하고 그들을 안치시켰다. 선제·원제 이후 선우는 [스스로] 번신(藩臣)을 칭했고 서역은 복종하게 되었다.주 006
각주 006)
이는 구체적으로 전51년 呼韓邪 單于가 휘하 部衆을 이끌고 남하하여 甘泉宮에서 宣帝를 배알하고 入朝稱臣한 사건과 그 이후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건의 근원은 앞서 언급한 기원전 60년 日逐王 투항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日逐王 先賢撣의 투항은 전60년 虛閭權渠 單于가 사망한 뒤 자신이 계승자가 되지 못하고 대신 握衍胊踶가 즉위한 것에 대한 반발로 발생한 사건인데, 이렇게 해서 흉노 내부에 혼란이 발생하자 左地 귀족들이 呼韓邪를 선우로 옹립하고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전58년 握衍胊踶가 자살하고 呼韓邪가 권력을 장악하는 듯했으나 곧 뒤이어 五單于가 爭立하는 혼란으로 확대되었고, 마지막에는 郅支와 呼韓邪가 대립하다가 결국 郅支에게 밀려난 呼韓邪가 南下하여 한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呼韓邪는 그 뒤 전49년, 전33년에도 入朝하여 前後 3차례 皇帝를 배알하고 朝貢關係를 맺었지만, 그 대가로 막대한 규모의 물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고, 전31년 호한야가 사망한 뒤로도 흉노의 單于들이 교체할 때마다 아들을 한의 조정에 入侍케 하여 그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자세한 사항은 사와다(1996 : 76-82) 참조. 한편 바필드(Barfield, 1981)는 유목국가가 농경지역에 대한 약탈적 공격을 통해서 물자를 획득하는 ‘Outer frontier policy’와는 달리, 내분으로 인해 위기에 처했을 때 농경국가에 대해서 朝貢을 바치고 이를 통해 경제적인 지원을 확보하는 이러한 방식의 정책을 ‘Inner frontier policy’로 이해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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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그 토지, 산천, 왕후(王侯), 호수(戶數), 도리(道里)의 원근주 007
각주 007)
‘戶數’는 뒤에 나오는 본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단순히 戶數가 아니라 口數와 兵數까지 포함하고 있는데, 이들 숫자의 파악은 기본적으로 物的․人的 徵發을 위한 기초자료의 확보를 위함이었다. 西域에 불의의 사태가 벌어졌을 경우 한나라는 원정군을 보내야 했지만 동시에 현지 도시들로부터 徵發을 했고, 이때 징발할 人數와 物資를 파악하기 위해 戶口와 兵力의 파악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道里의 원근 역시 使臣의 파견을 위해서는 물론, 반란이 터졌을 경우 원정군이 현지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일과 그에 따라 필요한 軍糧의 규모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정확한 조사가 요구되는 사항이었다. 본문에 보이는 ‘道里’에는 ① 長安에서의 里數, ② 西域都護의 治所인 烏壘城에서의 里數, ③ 陽關에서의 里數, ④ 주변 도시로부터의 里數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本傳에 기록된 長安․烏壘․陽關 등에서의 거리는 區間別 거리를 합산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경우에 따라서 상이한 계산방법의 적용이나 상이한 자료의 사용 등으로 인해 상호 모순되는 숫자가 산출․기록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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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세하게[翔實]주 008
각주 008)
翔實 : 顔注 : “翔은 詳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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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게 되었다.

  • 각주 001)
    元帝 : 재위 전48~전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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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戊己校尉 : 『漢書』 「百官公卿表」에 따르면 元帝 初元元年(전48)에 두어졌고 丞․司馬 각 1인, 候 5인이 있었다고 한다. 丞의 秩이 比六百石이라면 校尉는 比二千石이었을 것이다. 戊己校尉를 설치한 목적은 車師前王庭의 屯田을 위해서였다. 그곳에 둔전을 실시한 것은 宣帝 地節 4년(전66)부터 시작되었지만, 당시는 아직 車師가 前後部로 나뉘기 전이었다. 元康 2년(전64) 흉노의 공격으로 인하여 한은 車師屯田을 방기하고 주민들을 渠犁로 이주시켰는데, 神爵 2년(전60) 日逐王의 투항으로 鄭吉이 車師를 격파하고 渠犁로 이주했던 주민들을 다시 복귀시켰다. 그리고 初元元年 戊己校尉가 두어지면서 車師(交河)에서의 屯田이 다시 본격적으로 재개된 것이다. ‘戊己’라는 명칭은 흉노의 공격을 막는다는 의도에서 ‘以土塡水’의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설명이 있는데(余太山,2005 : 75-76), 자세한 내용은 後註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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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蒲類 : 뒤의 蒲類國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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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茲力支 : 여기서만 언급되는 인물이며, 다른 사항은 알려진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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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烏貪訾離 : 뒤에 烏貪訾離國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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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이는 구체적으로 전51년 呼韓邪 單于가 휘하 部衆을 이끌고 남하하여 甘泉宮에서 宣帝를 배알하고 入朝稱臣한 사건과 그 이후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건의 근원은 앞서 언급한 기원전 60년 日逐王 투항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日逐王 先賢撣의 투항은 전60년 虛閭權渠 單于가 사망한 뒤 자신이 계승자가 되지 못하고 대신 握衍胊踶가 즉위한 것에 대한 반발로 발생한 사건인데, 이렇게 해서 흉노 내부에 혼란이 발생하자 左地 귀족들이 呼韓邪를 선우로 옹립하고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전58년 握衍胊踶가 자살하고 呼韓邪가 권력을 장악하는 듯했으나 곧 뒤이어 五單于가 爭立하는 혼란으로 확대되었고, 마지막에는 郅支와 呼韓邪가 대립하다가 결국 郅支에게 밀려난 呼韓邪가 南下하여 한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呼韓邪는 그 뒤 전49년, 전33년에도 入朝하여 前後 3차례 皇帝를 배알하고 朝貢關係를 맺었지만, 그 대가로 막대한 규모의 물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고, 전31년 호한야가 사망한 뒤로도 흉노의 單于들이 교체할 때마다 아들을 한의 조정에 入侍케 하여 그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자세한 사항은 사와다(1996 : 76-82) 참조. 한편 바필드(Barfield, 1981)는 유목국가가 농경지역에 대한 약탈적 공격을 통해서 물자를 획득하는 ‘Outer frontier policy’와는 달리, 내분으로 인해 위기에 처했을 때 농경국가에 대해서 朝貢을 바치고 이를 통해 경제적인 지원을 확보하는 이러한 방식의 정책을 ‘Inner frontier policy’로 이해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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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戶數’는 뒤에 나오는 본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단순히 戶數가 아니라 口數와 兵數까지 포함하고 있는데, 이들 숫자의 파악은 기본적으로 物的․人的 徵發을 위한 기초자료의 확보를 위함이었다. 西域에 불의의 사태가 벌어졌을 경우 한나라는 원정군을 보내야 했지만 동시에 현지 도시들로부터 徵發을 했고, 이때 징발할 人數와 物資를 파악하기 위해 戶口와 兵力의 파악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道里의 원근 역시 使臣의 파견을 위해서는 물론, 반란이 터졌을 경우 원정군이 현지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일과 그에 따라 필요한 軍糧의 규모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정확한 조사가 요구되는 사항이었다. 본문에 보이는 ‘道里’에는 ① 長安에서의 里數, ② 西域都護의 治所인 烏壘城에서의 里數, ③ 陽關에서의 里數, ④ 주변 도시로부터의 里數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本傳에 기록된 長安․烏壘․陽關 등에서의 거리는 區間別 거리를 합산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경우에 따라서 상이한 계산방법의 적용이나 상이한 자료의 사용 등으로 인해 상호 모순되는 숫자가 산출․기록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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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翔實 : 顔注 : “翔은 詳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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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원제(元帝), 자력지(茲力支), 선제, 원제
지명
포류(蒲類), 오탐자리(烏貪訾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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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이 복종된 뒤 자세한 환경이 알려지게 됨 자료번호 : jo.k_0002_0096_0010_0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