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가 서역과 개통한 후의 과정을 설명
한나라가 발흥하여 효무[의 시대]에 이르러 사이(四夷)를 정벌함에 힘쓰고 위덕을 넓혔으며, 장건은 서역으로 가는 길을 처음으로 개통했다. 그 후 표기장군(驃騎將軍)주 001이 흉노의 우지(右地)주 002를 공격하여 혼야왕(渾邪王)과 휴도왕(休屠王)주 003을 항복시키고 마침내 그 지역에서 [흉노를] 몰아낸 뒤 비로서 영거(令居)
주 004의 서쪽에 [성을] 쌓았다. 처음으로 주천(酒泉)군을 설치했고 그 후에 차츰 사민시켜서 그곳을 충실하게 채웠다. 무위(武威)·장액(張掖)·돈황(敦煌) [등의 군]을 나누어 설치하여 사군(四郡)주 005을 늘어놓고 두 개의 관문주 006에 의지하도록 하였다. 이사장군(貳師將軍)이 대완을 정벌한 뒤 서역이 두려움에 떨었고 많은 [나라들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헌상했으며, 한나라에서 서역으로 사신을 갔던 사람들은 더욱 더 임무를 다할 수 있게 되었다.주 007이에 돈황에서 서쪽으로 염택에 이르기까지 자주 정(亭)을 세웠다. 또한 윤대(輪臺)주 008
각주 008)
와 거리(渠犁)
주 009에는 전졸(田卒) 수백 명이 있어, 사자교위(使者校尉)주 010를 두고 [그들을] 지휘·보호주 011하면서 외국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거기서 생산되는 식량을] 지급하게 했다.주 012
輪臺 : 현재 新疆 輪臺[Bugur]縣 東南. 원래 輪臺國(혹은 侖頭國)이 있었으나 전102년 李廣利의 大宛遠征時 멸망했고, 한나라는 이곳에 屯田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武帝 末年 즉 征和4년(전89) 桑弘羊이 輪臺 以東의 捷枝․渠犁 등에 관개된 밭 五千頃 이상이 있으므로 屯田을 보내 匈奴와의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비축하자는 제안을 했는데, 이에 대해 武帝는 더 이상 전쟁을 통해 백성들을 어렵게 하지 않도록 屯田民의 파견을 반대한 ‘輪臺의 詔’를 내렸다. 黃文弼은 현재 輪臺의 동남쪽에 남아 있는 고대 수리관개의 흔적을 漢代 輪臺의 유적으로 보았다(Hulsewé, 1979 : 166 ; 嶋崎昌, 1977 : 5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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輪臺 : 현재 新疆 輪臺[Bugur]縣 東南. 원래 輪臺國(혹은 侖頭國)이 있었으나 전102년 李廣利의 大宛遠征時 멸망했고, 한나라는 이곳에 屯田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武帝 末年 즉 征和4년(전89) 桑弘羊이 輪臺 以東의 捷枝․渠犁 등에 관개된 밭 五千頃 이상이 있으므로 屯田을 보내 匈奴와의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비축하자는 제안을 했는데, 이에 대해 武帝는 더 이상 전쟁을 통해 백성들을 어렵게 하지 않도록 屯田民의 파견을 반대한 ‘輪臺의 詔’를 내렸다. 黃文弼은 현재 輪臺의 동남쪽에 남아 있는 고대 수리관개의 흔적을 漢代 輪臺의 유적으로 보았다(Hulsewé, 1979 : 166 ; 嶋崎昌, 1977 : 50 참조).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 각주 012)
색인어
- 이름
- 효무, 장건
- 지명
- 한나라, 영거(令居), 주천(酒泉)군, 무위(武威), 장액(張掖), 돈황(敦煌), 대완, 한나라, 돈황, 염택, 거리(渠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