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무(洪武) 연간, 주사 관철(寬徹) 등을 서역으로 출사하며 새서(璽書)로써 극덕이화탁(克德爾和卓)에게 효유하여 이른 내용
홍무 연간(1368~1398)에 남옥(藍玉)
주 001
각주 001)
이 사막(沙漠)으로 출정(出征)하여 포어아해(捕魚兒海)
주 002에 이르러 살마아한의 상인 수백 명을 사로잡았다. 태조는 관원을 파견하여 그들을 호송해서 귀국시켰는데, 도중에 별실팔리를 경유하였다. 별실팔리의 왕 흑적아화자(黑的兒火者)
주 003는 곧 천호(千戶) 합마력정(哈馬力丁)
주 004 등을 파견하여 입조해서 말과 해청(海靑)주 005을 공물로 바쳤는데,주 006 [홍무] 24년(1391) 7월에 경사에 이르렀다. 홍무제는 기뻐하며 왕에게 채폐 10표리를 하사하고, 그 사신에게도 모두 하사품을 주었다.주 007 9월에 주사(主事) 관철(寬徹)·어사(御史) 한경(韓敬)·평사(評事)주 008
당정(唐鉦)에게 명하여 서역으로 출사하도록 했는데, 새서(璽書)로써 흑적아화자에게 효유하여 이르기를, “짐이 보건대, 하늘 아래와 대지 위에 나라를 소유한 자가 그 얼마인지 알지 못한다. 비록 산과 바다로 가로막혀 있고 풍속이 다르다 하지만, 호오(好惡)의 감정과 혈기(血氣)의 유별(類別)은 일찍이 다른 바가 없었다. 황천(皇天)이 돌아보고 보우(保佑)하여 한결같이 대해왔다. 까닭에 천명을 받아 천하의 군주가 된 자는 위로 천도(天道)를 받들어 일시동인(一視同仁)하여, 크고 작은 여러 나라와 상이한 지역 및 다른 종족의 군민(君民)으로 하여금 모두 인덕(仁德)을 갖추어 장수(長壽)를 누리는 지경에 오르게 하였다. 그리고 우방(友邦)의 원국(遠國)은 천의(天意)를 따라 사대(事大)를 함으로써 나라를 보위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면 황천(皇天)이 잘 살펴서 또한 창성(昌盛)할 수 있다. 전에 우리 중국의 송(宋)나라 군주가 사치하고 방종하며 나태하고 방탕하여 간신이 정사(政事)를 어지럽혔다. 하늘이 비루한 덕을 잘 살펴서 이에 원나라 세조(世祖)에게 명하여 [북방의] 사막지대에서 개국의 기반을 창시(創始)토록 하여 [중원으로] 들어와 중화를 통치하여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안정된 것이 70여 년이었다. 후대에 이르러 국정(國政)을 돌보지 않고 부적합한 자를 임용하여 기강이 모두 풀어지게 함으로써 강자는 약자를 능멸하고 중인(衆人)이 과인(寡人)을 능욕하여, 민생은 한탄하고 원망하여 하늘에 상달(上達)하였다. 하늘이 이로 인하여 그 천명을 바꾸어 짐에게 위촉하였다. 짐은 몸소 하늘이 부여한 권력을 쥐고 백성의 주인이 되었다. 무릇 모든 난웅(亂雄) 가운데 성교(聲敎)주 009를 멋대로 하는 자로서 짐의 명을 어기는 자는 군대를 보내어 쓰러뜨렸고, 짐의 명에 따르는 자는 은덕을 베풀어 어루만져 주었다. 이러한 까닭에 30년 동안 제하(諸夏)주 485가 안정되고 외번(外蕃)은 신복(臣服)하였다. 다만 원(元)나라 대신 만자(蠻子) 합날장(哈剌章) 등이 아직 잔여의 무리를 거느리고 틈새를 만들어 변경을 침범하여, [짐이]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니 그 형세는 그만둘 수 없었던 것이다. 군대가 포어아해(捕魚兒海)에 이르자 옛 원나라 제왕(諸王)과 부마(駙馬)주 011가 그 부속(部屬)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살마아한에서 무역하러 온 수백 명이 있었기에 짐은 관원에게 명하여 호송하여 귀국시킨 것이 이미 3년이 지났다. 사신이 돌아온 뒤 왕이 곧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여 공물을 바치니, 짐은 매우 가상히 여겼다. 왕은 사대(事大)의 성심(誠心)을 더욱 굳건히 해 통교(通交)를 하여 사명(使命)을 끊이지 않게 한다면 어찌 장구히 나라를 보호하지 못하겠는가! 특별히 관원을 보내어 위로하고 장려하니, 짐의 뜻을 잘 헤아리기 바란다”라 하였다.주 012
관철(寬徹) 등이 [그곳에] 도착한 뒤, 왕은 그가 많은 하사품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구류(拘留)시켰다. 한경·당정 두 사람은 돌아올 수 있었다.주 013
藍玉(?~1393): 鳳陽府 定遠縣 출신으로서 明朝의 개국공신이자 저명한 將領이다. 開平王 常遇春의 처남이기도 한데, 처음에는 그의 휘하에 있었다. 謀略이 있고 용감하여 여러 차례 戰功을 세웠다. 管軍鎭撫에서 大都督府僉事로 승진하였다. 洪武 14년(1381)에 永昌侯로 봉해졌고, 洪武 20년(1387)에는 大將軍으로 拜受되었다. 洪武 21년(1388)에는 捕魚兒海 전투에서 北元의 太尉 蠻子 등을 죽이고 그 部衆을 항복시켰으며 말과 낙타, 소와 양 등 15만 마리를 획득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이에 朱元璋은 그를 優遇하여 凉國公으로 봉했다. 다만 그는 자신이 세운 공을 자랑하고 교만하여 날로 오만방자하고 발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 휘하의 假子 수천 명을 풀어 橫暴한 행동을 자행했으며, 東昌의 民田을 侵占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각종 추문이 이어지자 점차 洪武帝는 이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게 되었지만, 藍玉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기존의 언행을 반복하였다. 결국 洪武 26년(1393)에 錦衣衛에서 藍玉의 ‘謀反’을 고발하자 하옥되고 말았다. 鞠問 끝에 반란을 획책했음이 공포되었다. 이에 藍玉은 族誅되고, 관련자로서 公侯伯에서부터 文武官員에 이르기까지 약 2만 명이 연루되었는데, 모두 피살되었다. 이것이 바로 ‘藍玉의 獄’이며, 이에 관한 공식 기록이 『逆臣錄』이라는 書名으로 간행된 책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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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藍玉(?~1393): 鳳陽府 定遠縣 출신으로서 明朝의 개국공신이자 저명한 將領이다. 開平王 常遇春의 처남이기도 한데, 처음에는 그의 휘하에 있었다. 謀略이 있고 용감하여 여러 차례 戰功을 세웠다. 管軍鎭撫에서 大都督府僉事로 승진하였다. 洪武 14년(1381)에 永昌侯로 봉해졌고, 洪武 20년(1387)에는 大將軍으로 拜受되었다. 洪武 21년(1388)에는 捕魚兒海 전투에서 北元의 太尉 蠻子 등을 죽이고 그 部衆을 항복시켰으며 말과 낙타, 소와 양 등 15만 마리를 획득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이에 朱元璋은 그를 優遇하여 凉國公으로 봉했다. 다만 그는 자신이 세운 공을 자랑하고 교만하여 날로 오만방자하고 발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 휘하의 假子 수천 명을 풀어 橫暴한 행동을 자행했으며, 東昌의 民田을 侵占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각종 추문이 이어지자 점차 洪武帝는 이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게 되었지만, 藍玉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기존의 언행을 반복하였다. 결국 洪武 26년(1393)에 錦衣衛에서 藍玉의 ‘謀反’을 고발하자 하옥되고 말았다. 鞠問 끝에 반란을 획책했음이 공포되었다. 이에 藍玉은 族誅되고, 관련자로서 公侯伯에서부터 文武官員에 이르기까지 약 2만 명이 연루되었는데, 모두 피살되었다. 이것이 바로 ‘藍玉의 獄’이며, 이에 관한 공식 기록이 『逆臣錄』이라는 書名으로 간행된 책자이다.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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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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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485)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색인어
- 이름
- 태조, 흑적아화자(黑的兒火者), 합마력정(哈馬力丁), 홍무제, 관철(寬徹), 한경(韓敬), 당정(唐鉦), 흑적아화자, 원나라 세조(世祖), 합날장(哈剌章), 관철(寬徹), 한경, 당정
- 지명
- 남옥(藍玉), 사막(沙漠), 포어아해(捕魚兒海), 살마아한, 별실팔리, 별실팔리, 서역, 중국, 포어아해(捕魚兒海), 살마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