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자(郭諮)가 균전(均田)을 조사하는 규칙과 연(燕)을 평정하는 방법 등을 의론(議論)함
서상합문사(西上閤門使)주 001·영주자사(英州刺史)주 002 곽자(郭諮)주 003가 말과 수레를 막는 것을 건의하였다. 곽자가 일찍이 지로주(知潞州)주 004를 지내서, 회군(懷郡)과 보군(保郡) 2군 앞의 산이 벼를 심을만하며, 정무하(定武河)와 당하(唐河)주 005가 영주(瀛州)주 006와 막주(莫州)주 007 사이에 닿고 있어 수전을 일으킬 만하다고 말하였다. 또 녹각거(鹿角車)와 함마창(陷馬槍)을 만들어 독원노(獨轅弩)를 다른 도(道)보다 넓게 둘 것을 요청하였다. 조서로 곽자에게 노천(弩千)을 설치하게 하고 병주(并州)주 008와 노주(潞州)에 나누어 주게 하였다.
곽자가 또 “신이 무신이 된 이래로 일찍이 하루도 적을 막을 계책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요사이 거란(요)에 사신으로 가서 연운 지방을 살펴보니, 300리도 되지 않는 지역에 10만 명이 1년간 쓸 비용도 없었으며, 또 오합지졸이라 20만명이 아니어도 감히 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술수로 제압한다면 군대를 일으키는 것보다 이롭지 않고, 남은 이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면 몇 년 되지 않아 기필코 유주를 버리고 도망할 것입니다. 경력(慶曆)주 009 초에 하북의 크고 작은 수계로 경계를 (정해) 적의 영토를 끊었으니, 바로 (그것이) 술수입니다. 신이 수레와 노를 만들어 놓은 곳은 튼튼한 갑옷도 부술 수 있으니, 도망하거나 공격하는 것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만약 많이 설치한다면 큰 물이 있을 때를 타서 유(幽)와 계(薊) 지역을 마치 주머니 속 물건처럼 쉽게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때마침 삼사(三司)주 010가 균전의 조세를 의논하여 (그를) 소환하니, 곽자가 균전을 조사하는[均括] 규칙 40개조를 말하였다.
(곽자가) 다시 연(燕)을 평정하는 의논을 올리니, 다음과 같았다. “거란(요)의 영토는 와교(瓦橋)주 011로부터 고북구(古北口)주 012
각주 012)
에 이르기까지 땅은 좁고 백성은 적습니다. 고북구에서 중경(中京)까지는 해(奚)와 거란(요)에 속합니다. 중경에서 경주(慶州)주 013까지는 길가에 겨우 700여 가(家)만 있으니, 무릇 거란(요)의 영토가 비록 넓을지라도 사람과 말은 매우 적어, 겨우 간혹 남쪽 지역으로 목축을 할 뿐입니다. 반드시 고려와 발해, 달단, 흑수여진, 실위 등의 나라를 이끌고 전투를 한다 해도 그들이 오기까지 이미 멀리서 와서 식량은 부족할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가까이에서 멀리서 오는 이들을 맞이하고 번갈아 노고를 대하며, 풍족한 음식으로 굶주림을 마주하는 것이 군대를 운용하는 좋은 계책이라 합니다. 또 듣건대 적이 스스로 오게 할 수 있으면 승리하고, 먼저 유리한 지리에 위치하면 편안하다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경력 연간의 계책을 들어 당박(塘泊)의 북쪽 경계에 있는 황하로 무리를 모아 군대를 제한하고 난 연후에 경덕(景德)주 014 연간의 고사로 병사를 두어 스스로 지키게 하십시오. 보졸 12만과 기병 3만, 강한 장정 3만이 해마다 식량 183만 6천곡을 헤아립니다. 또 황하에 이웃한 군읍(郡邑)은 수운을 통해 보주(保州)주 015에 보급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후에 말과 수레 3천, 함마창 1500, 독원노 3만으로 막고는 5명의 장수를 나누어 골라, 신이 그 하나를 갖출 만합니다. (적이) 오면 싸우고 물러나면 추격하지 마십시오. 유주의 저장된 식량이 이미 적어서 적이 오래 머무를 수 없으니 반년도 되지 않아 마땅히 사막으로 달아날 것입니다. 그러면 군대를 진격하여 고북구를 끊고 송정관(松亭關)주 016을 막아 유주와 계주에 널리 격문을 돌리면 연 지역은 남쪽으로부터 평정될 것입니다. 옛날에 한의 고조는 3척의 검을 들어 천하를 평정하였으나 오직 흉노(匈奴)주 017만은 미처 멸하지 못하여 효무제(孝武帝)주 018古北口 : 중국 北京市 密雲縣 북동부 만리장성에 있는 요새. 면적은 83.1km2이며, 인구는 1만 1천명(1997)이다. 중국 奧地에서 장성 밖으로 출입하는 관문의 하나이며, 만리장성의 유명한 관문 중의 하나이다. 동쪽의 喜峯口와 더불어 예부터 북경의 二重鎭이라 하였던 요충지였으나, 최근에는 관광지로 변모하였다. 淸代에는 북경과 熱河를 연결하는 요지였으며, 현재는 북경과 중국 동북지구를 왕래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옛 이름은 虎北口이며, 潮河가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관문의 길이는 22.5m이며, 2개의 절벽에 험한 길이 나 있어 예로부터 군사전문가들이 전쟁시 반드시 거쳐가는 격전지였다. 북방민족이 중국을 침입할 때 이용했던 통로로서, 특히 명나라 때는 山海關과 居庸關의 중간에 위치하고, 북동쪽의 喜峯口와 북서쪽의 獨石口가 쌍벽을 이루어 수도 북경을 몽골족의 침공에서 지키는 제일선이 되었다고 한다. 청나라 때는 병영지의 물자 수송을 위해 承德에 避暑山莊을 건설하였는데, 특별히 이곳에는 세관을 두지 않았다. 喜峯口는 河北省 遷西縣 북쪽에 있으며, 獨石口는 赤城縣의 북쪽에 있다. 이 세 곳에는 만리장성의 안쪽에 군대가 주둔하기 위해 구축한 성벽이 남아 있다. 동쪽의 金山산맥에 위치한 만리장성은 비교적 보존이 양호한 곳이다. 남쪽에는 대규모의 密傳 댐이 있어 수력발전과 관개에 이용되고 있다. 京通鐵道와 京承鐵道가 통과하며, 고대 병영지의 험한 길은 오늘날 도로가 되었다.
각주 018)
때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막북(漠北)주 019으로 내쫓았습니다. 당(唐)의 태종(太宗)주 020은 의로운 깃발을 세워 천하를 취하였으나, 오직 토번(吐蕃)만은 미처 멸하지 못하여 대종(代宗)주 021孝武帝 : B.C. 156~B.C. 87. 재위 B.C. 141~B.C. 87. 前漢의 제7대 황제 武帝이다. 景帝의 열한번째 아들로, 시호는 世宗이다. 재위 기간 동안 推恩令을 내려 諸侯王들에게 땅을 나눠 자제들에게 주고 侯로 삼게 하여, 제후국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즉위하자 권신들을 면직시키고 어질고 겸손한 선비를 등용하여 관리의 자질을 향상시켰다. 五經博士를 두어 유학에 중점을 두고, 天朔 2年(기원전 127)부터 왕국을 分封하여 중앙집권화를 마무리했다. 나중에 전국을 13州로 나누어 주마다 刺史를 두어 통치력을 강화했고, 운하를 굴착하여 농지의 灌漑와 운송을 도왔다. 상인들의 선박에 세금을 매기고, 告緡令을 실시해 상인들의 자산에도 세금을 매겨 富商을 통제했다. 桑弘羊의 건의를 받아들여 冶鐵과 製鹽, 鑄錢은 官賣하도록 했다. 平準官과 均輸官을 두어 무역과 運輸를 官營하도록 했다. 代田法을 시행해 水利를 일으키고 屯田으로 농민을 이주시켜 농업을 발전시켰다. 대외적으로는 張騫을 大月氏國으로 파견하고, 唐蒙을 夜郞에 보내 서남 7郡을 건설했다. 장군 衛靑과 霍去病, 李廣 등에게 흉노를 토벌하도록 해 오르도스 지방을 회복하여 2군을 두었다. 元狩 4年(기원전 119) 위청이 흉노를 몽골 초원으로 내쫓았다. 董仲舒의 방안을 채택해 오로지 儒術만 존숭하면서 法術刑名도 겸용하여 봉건 지배를 강화시켰다. 封禪을 행하고 神仙을 구하는 한편 토목 공사를 크게 벌여 요역이 繁重해졌다. 농민들이 유랑하게 되자 天漢 2年(기원전 99) 關東의 농민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켜 몇 해를 끌었다. 建元부터 後元까지 11차례나 연호를 바꾸었는데, 제왕이 연호를 가지게 된 端初를 열었다. 治世 때의 특색은 중앙집권화와 영토의 확장인데, 특히 중앙아시아를 통해 동서 교섭이 왕성해진 점을 들 수 있다.
각주 021)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토번이) 공물을 바치고 번병이라 칭하였습니다. 우리 태조도 천명을 빼어나게 받아서 천하가 모두 복속하였으나, 또한 오직 거란(요)만을 미처 멸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성상의 계책을 기다려 하늘의 토벌을 받들어 행할 것입니다. 또 저들이 의지하는 것은 오직 말뿐입니다. 다만 여러 방면에서 힘을 다하여 말을 운용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면 적을 깨뜨릴 수 있고 유연(幽燕)의 지역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代宗 : 726∼779, 재위 762∼779. 당의 8대 황제이다. 이름은 李豫이다. 肅宗의 장남으로 756년 당시 황태손이던 때에 조부인 玄宗 李隆基가 安祿山의 반란을 피하여 서쪽으로 도망가자 아버지인 황태자 이형과 동행하였으며, 조부 李隆基가 이형에게 제위를 물려주어 肅宗으로 등극하자 李豫는 황태자에 책봉되었고 762년에 宦官인 이보국이 황후 장씨를 시해하고 얼마 안 있어 부친 肅宗이 사망하자 곧바로 李豫는 황제에 올랐다. 즉위 이듬해에 7년 동안 唐朝를 어지럽힌 안사의 난은 결국 진압되었으나, 반란은 곳곳에서 끊이지 않았고 더군다나 代宗은 불교에 심취하여 불교 사찰에 많은 토지와 면세 혜택을 주기도 하여 唐朝의 재정이 한층 더 악화되었으며, 779년 5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황제가 그 말을 장하게 여겨서 독원노 2만개를 설치하도록 조서를 내렸으며, 얼마 있다가 곽자를 동제점재경제사고무(同提點在京諸司庫務)주 022로 명하고 내군기고(內軍器庫)주 023의 병장기를 분별하는 것은 남북작방(南北作坊)주 024에 내려 작업을 완료하도록 하였는데, 특별히 곽자를 제거(提舉)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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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2)
古北口 : 중국 北京市 密雲縣 북동부 만리장성에 있는 요새. 면적은 83.1km2이며, 인구는 1만 1천명(1997)이다. 중국 奧地에서 장성 밖으로 출입하는 관문의 하나이며, 만리장성의 유명한 관문 중의 하나이다. 동쪽의 喜峯口와 더불어 예부터 북경의 二重鎭이라 하였던 요충지였으나, 최근에는 관광지로 변모하였다. 淸代에는 북경과 熱河를 연결하는 요지였으며, 현재는 북경과 중국 동북지구를 왕래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옛 이름은 虎北口이며, 潮河가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관문의 길이는 22.5m이며, 2개의 절벽에 험한 길이 나 있어 예로부터 군사전문가들이 전쟁시 반드시 거쳐가는 격전지였다. 북방민족이 중국을 침입할 때 이용했던 통로로서, 특히 명나라 때는 山海關과 居庸關의 중간에 위치하고, 북동쪽의 喜峯口와 북서쪽의 獨石口가 쌍벽을 이루어 수도 북경을 몽골족의 침공에서 지키는 제일선이 되었다고 한다. 청나라 때는 병영지의 물자 수송을 위해 承德에 避暑山莊을 건설하였는데, 특별히 이곳에는 세관을 두지 않았다. 喜峯口는 河北省 遷西縣 북쪽에 있으며, 獨石口는 赤城縣의 북쪽에 있다. 이 세 곳에는 만리장성의 안쪽에 군대가 주둔하기 위해 구축한 성벽이 남아 있다. 동쪽의 金山산맥에 위치한 만리장성은 비교적 보존이 양호한 곳이다. 남쪽에는 대규모의 密傳 댐이 있어 수력발전과 관개에 이용되고 있다. 京通鐵道와 京承鐵道가 통과하며, 고대 병영지의 험한 길은 오늘날 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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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8)
孝武帝 : B.C. 156~B.C. 87. 재위 B.C. 141~B.C. 87. 前漢의 제7대 황제 武帝이다. 景帝의 열한번째 아들로, 시호는 世宗이다. 재위 기간 동안 推恩令을 내려 諸侯王들에게 땅을 나눠 자제들에게 주고 侯로 삼게 하여, 제후국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즉위하자 권신들을 면직시키고 어질고 겸손한 선비를 등용하여 관리의 자질을 향상시켰다. 五經博士를 두어 유학에 중점을 두고, 天朔 2年(기원전 127)부터 왕국을 分封하여 중앙집권화를 마무리했다. 나중에 전국을 13州로 나누어 주마다 刺史를 두어 통치력을 강화했고, 운하를 굴착하여 농지의 灌漑와 운송을 도왔다. 상인들의 선박에 세금을 매기고, 告緡令을 실시해 상인들의 자산에도 세금을 매겨 富商을 통제했다. 桑弘羊의 건의를 받아들여 冶鐵과 製鹽, 鑄錢은 官賣하도록 했다. 平準官과 均輸官을 두어 무역과 運輸를 官營하도록 했다. 代田法을 시행해 水利를 일으키고 屯田으로 농민을 이주시켜 농업을 발전시켰다. 대외적으로는 張騫을 大月氏國으로 파견하고, 唐蒙을 夜郞에 보내 서남 7郡을 건설했다. 장군 衛靑과 霍去病, 李廣 등에게 흉노를 토벌하도록 해 오르도스 지방을 회복하여 2군을 두었다. 元狩 4年(기원전 119) 위청이 흉노를 몽골 초원으로 내쫓았다. 董仲舒의 방안을 채택해 오로지 儒術만 존숭하면서 法術刑名도 겸용하여 봉건 지배를 강화시켰다. 封禪을 행하고 神仙을 구하는 한편 토목 공사를 크게 벌여 요역이 繁重해졌다. 농민들이 유랑하게 되자 天漢 2年(기원전 99) 關東의 농민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켜 몇 해를 끌었다. 建元부터 後元까지 11차례나 연호를 바꾸었는데, 제왕이 연호를 가지게 된 端初를 열었다. 治世 때의 특색은 중앙집권화와 영토의 확장인데, 특히 중앙아시아를 통해 동서 교섭이 왕성해진 점을 들 수 있다.
- 각주 019)
- 각주 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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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21)
代宗 : 726∼779, 재위 762∼779. 당의 8대 황제이다. 이름은 李豫이다. 肅宗의 장남으로 756년 당시 황태손이던 때에 조부인 玄宗 李隆基가 安祿山의 반란을 피하여 서쪽으로 도망가자 아버지인 황태자 이형과 동행하였으며, 조부 李隆基가 이형에게 제위를 물려주어 肅宗으로 등극하자 李豫는 황태자에 책봉되었고 762년에 宦官인 이보국이 황후 장씨를 시해하고 얼마 안 있어 부친 肅宗이 사망하자 곧바로 李豫는 황제에 올랐다. 즉위 이듬해에 7년 동안 唐朝를 어지럽힌 안사의 난은 결국 진압되었으나, 반란은 곳곳에서 끊이지 않았고 더군다나 代宗은 불교에 심취하여 불교 사찰에 많은 토지와 면세 혜택을 주기도 하여 唐朝의 재정이 한층 더 악화되었으며, 779년 5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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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23)
- 각주 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