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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자치통감장편

고려인 강전(康戩)의 국자감 입학

  • 날짜
    996년 7월 (음)(至道 2年(996) 7月 丙寅)
  • 출전
    卷40 至道 2年(996) 7月 丙寅
강전(康戩)주 001
각주 001)
康戩 : ?~1006. 고려 출신 북송의 관인. 출신은 고려의 信州 永寧(현재 黃海道 松禾郡)이다. 字는 休祐다. 부친은 康允이다. 강전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다고 전한다. 紇升이 契丹과 교전을 벌일 때 그는 아버지 강윤과 함께 木葉山 아래에서 싸웠다. 전투 중에 화살 두 대를 맞았으나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 뒤 거란(요)에게 함락되자 黑斗嶺으로 도망쳐 살았으며, 다시 黃龍府에 이르러 고려로 돌아갔다고 하며 이때에도 아버지 강윤은 고려에 살아 있었다. 송나라 태조 시절에 강윤이 강전을 사행하는 데에 따라 가도록 하니 중국에 들어가 국학에 입학했다. 그 뒤에 송나라에서 관직을 역임하며 文名을 떨쳤다. 1006년에 죽으니, 송나라 眞宗이 특별히 아들 康希齡을 太常寺奉禮郞으로 삼고 녹봉을 주어 강전의 장례를 마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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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고려인으로 국자학(國子學)주 002
각주 002)
國子學 : 北宋의 수도 開封에 설치된 교육기관. 國子監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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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들어가서 학업을 익히고, 태평흥국(太平興國)주 003
각주 003)
太平興國 : 송 2대 황제 태종의 연호로, 976∼983년 사이에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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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年(980)에 진사에 합격했다.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청렴결백하다고 소문이 나서 전운사(轉運使)주 004
각주 004)
轉運使 : 북송의 관직. 都轉運使의 약칭이다. 唐代에 처음으로 설치되어 漕運 등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북송 시기에는 그 직권이 점점 확대되면서 한 路의 財賦와 民政을 관할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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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되었는데 소이간(蘇易簡)주 005
각주 005)
蘇易簡 : 958∼997. 北宋의 관인. 字는 太簡으로, 梓州 銅山(지금의 四川 中江縣) 사람이다. 太宗 太平興國 5年(980)에 장원급제하였다. 將作監丞, 升州通判, 翰林學士承旨를 거쳐 知審官院, 審刑院, 给事中이 되었으며, 参知政事까지 올랐다. 태종 至道 元年(995)에 知鄧州로 나가기도 하였다.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文房四譜』, 『續翰林志 』등의 저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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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추천한 것이다. 나증(羅拯)주 006
각주 006)
羅拯 : 1016~1080. 北宋의 관인. 開封府 祥符(현재 河南 開封) 사람. 字는 道濟이다. 進士로 급제하여 知榮州, 江西轉運判官, 提點福建刑獄, 江淮發運副使 등을 역임했다. 熙寧 3年(1070) 江淮等路發運使가 되고 후에 관직이 天章閣待制, 知秦州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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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처음에 지단주(知端州)주 007
각주 007)
端州 : 북송의 지명. 隋 開皇 9年(589)에 高要郡을 고쳐 설치하였고, 그 위치는 현재 廣東 肇慶市였다. 관할범위는 오늘날 肇慶, 雲浮, 高要, 高明 4市와 德慶, 新興 2縣을 포괄한다. 重和 元年(1118)에 肇慶府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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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에 있었는데 상소 올리기를 그치지 않았다. 일찍이 각 지역에 사신을 보내 숨은 장정을 찾아 모으고, 판적(版籍)을 개혁하고, 염법(鹽法)·통상(通商)을 의논하기를 청한 것이 무릇 10여 가지였다. 또한 『번우기이집(番禺紀異集)』주 008
각주 008)
番禺紀異集 : 馮拯(958∼1023)이 지은 책으로, 모두 5권이다. 풍증이 태종 淳化 연간에 知端州로 있으면서 새, 동물, 초목과 민속의 물품 등에서 중원의 것과 다른 것을 기록한 책이다. 모두 30門으로 나누고 300가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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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바쳤다. 황제께서 소환하려 했는데 구준(寇準)주 009
각주 009)
寇準 : 961~1023. 북송의 관인. 華州 下邽(현재 陝西 渭南 북쪽) 사람. 字는 平仲이다. 太平興國 5年(980) 進士로 급제하고 知巴東縣, 通判鄆州, 三司度支推官 등 관직을 역임했다. 淳化 2年(991) 樞密副使가 되고 후에 知樞密院事, 參知政事가 되었다. 至道 2年(996) 태종이 그의 擅權을 의심하여 知鄧州로 좌천시켰다. 眞宗 즉위 후 三司使가 되고 景德 元年(1004) 재상이 되었다. 그 해 거란(요)의 군대가 대거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진종에게 澶州로 北上할 것을 청하여 거란(요)과 澶淵의 盟을 성립시켰다. 景德 3年(1006) 知陝州가 되고, 大中祥符 7年(1014) 樞密使가 되었다. 다음해(1015) 정쟁에 휘말려 武勝軍節度使, 判河南府로 좌천되었다. 天禧 3年(1019) 다시 재상이 되었다. 다음해(1020) 태자를 내세워 황후를 견제하려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太子太傅·封萊國公으로 좌천되었다. 얼마 후 宦官 周懷의 반란 모의에 연루되어 雷州司戶參軍이 되었다가 곧바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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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디 나증을 좋아하지 않아 이에 지낭주(知朗州)주 010
각주 010)
朗州 : 북송의 지명. 隋 開皇 16年(596)에 嵩州를 고쳐 설치하였고, 그 위치는 현재 湖南 常德市였다. 관할범위가 오늘날 常德市, 漢壽, 桃源縣을 포괄했다. 大中祥符 5年(1012) 鼎州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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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보내고 통판광주(通判廣州)주 011
각주 011)
廣州 : 북송의 지명. 삼국시대 吳 黄武 5年(226) 交州를 나누어 처음 설치했다. 이때 관할영역은 현재 광동·광서 양성의 대부분 지역이었고 남조 후에는 점차 축소되었다. 隋唐代에는 치소를 曲江, 南海 등 현으로 옮기고 주 이름도 番州, 南海郡, 淸海軍 등으로 바꾸었다. 五代에 南漢의 國都로서 興王府로 개칭되었다. 북송 開寶 4年(971)에 다시 廣州로 바뀌고 현재 廣州市인 南海, 番禺 두 개 현을 두었다. 端拱 연간 이후에 廣南東路의 치소가 되었다. 남송 祥興 元年(1278)에 翔龍府로 승격되었다가 같은 해인 至元 15년 元에서 廣州路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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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바꾸었다. 구준이 파직되고 나증은 모친상 때문에 안으로 옮기게 해달라고 청했다. 비로소 지강주(知江州)주 012
각주 012)
江州 : 북송의 지명. 西晉 惠帝 元康 元年(291)에 설치되었고, 이때의 위치는 현재 江西 南昌市의 동쪽이었다. 東晉 咸康 六年(340)에 위치를 현재 湖北 黃梅縣 서남쪽으로 옮겼다. 南朝 宋의 升明 元年(477)에 다시 위치를 현재 江西 九江市 서남쪽으로 이동시켰고, 梁 太平 二年(557)에 위치를 현재 南昌市의 동쪽으로 옮겼다. 陳 天嘉 초에 다시 현재의 九江市로 위치를 옮겼다. 隋 大業 三年(607)에는 九江郡으로 변경되었다가 唐 武德 四年(621)에 다시 江州가 되었고, 天寶 元年(742)에 潯陽郡으로 바뀌었다가 乾元 元年(758)에 다시 江州가 되었다. 唐代에 관할했던 범위는 현재 九江, 德安, 彭澤, 湖口, 都昌 등의 市와 縣이 있는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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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임명하라고 명했다.

  • 각주 001)
    康戩 : ?~1006. 고려 출신 북송의 관인. 출신은 고려의 信州 永寧(현재 黃海道 松禾郡)이다. 字는 休祐다. 부친은 康允이다. 강전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다고 전한다. 紇升이 契丹과 교전을 벌일 때 그는 아버지 강윤과 함께 木葉山 아래에서 싸웠다. 전투 중에 화살 두 대를 맞았으나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 뒤 거란(요)에게 함락되자 黑斗嶺으로 도망쳐 살았으며, 다시 黃龍府에 이르러 고려로 돌아갔다고 하며 이때에도 아버지 강윤은 고려에 살아 있었다. 송나라 태조 시절에 강윤이 강전을 사행하는 데에 따라 가도록 하니 중국에 들어가 국학에 입학했다. 그 뒤에 송나라에서 관직을 역임하며 文名을 떨쳤다. 1006년에 죽으니, 송나라 眞宗이 특별히 아들 康希齡을 太常寺奉禮郞으로 삼고 녹봉을 주어 강전의 장례를 마치게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2)
    國子學 : 北宋의 수도 開封에 설치된 교육기관. 國子監이라고도 불린다. 바로가기
  • 각주 003)
    太平興國 : 송 2대 황제 태종의 연호로, 976∼983년 사이에 사용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轉運使 : 북송의 관직. 都轉運使의 약칭이다. 唐代에 처음으로 설치되어 漕運 등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북송 시기에는 그 직권이 점점 확대되면서 한 路의 財賦와 民政을 관할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蘇易簡 : 958∼997. 北宋의 관인. 字는 太簡으로, 梓州 銅山(지금의 四川 中江縣) 사람이다. 太宗 太平興國 5年(980)에 장원급제하였다. 將作監丞, 升州通判, 翰林學士承旨를 거쳐 知審官院, 審刑院, 给事中이 되었으며, 参知政事까지 올랐다. 태종 至道 元年(995)에 知鄧州로 나가기도 하였다.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文房四譜』, 『續翰林志 』등의 저작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羅拯 : 1016~1080. 北宋의 관인. 開封府 祥符(현재 河南 開封) 사람. 字는 道濟이다. 進士로 급제하여 知榮州, 江西轉運判官, 提點福建刑獄, 江淮發運副使 등을 역임했다. 熙寧 3年(1070) 江淮等路發運使가 되고 후에 관직이 天章閣待制, 知秦州에 이르렀다. 바로가기
  • 각주 007)
    端州 : 북송의 지명. 隋 開皇 9年(589)에 高要郡을 고쳐 설치하였고, 그 위치는 현재 廣東 肇慶市였다. 관할범위는 오늘날 肇慶, 雲浮, 高要, 高明 4市와 德慶, 新興 2縣을 포괄한다. 重和 元年(1118)에 肇慶府로 승격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8)
    番禺紀異集 : 馮拯(958∼1023)이 지은 책으로, 모두 5권이다. 풍증이 태종 淳化 연간에 知端州로 있으면서 새, 동물, 초목과 민속의 물품 등에서 중원의 것과 다른 것을 기록한 책이다. 모두 30門으로 나누고 300가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9)
    寇準 : 961~1023. 북송의 관인. 華州 下邽(현재 陝西 渭南 북쪽) 사람. 字는 平仲이다. 太平興國 5年(980) 進士로 급제하고 知巴東縣, 通判鄆州, 三司度支推官 등 관직을 역임했다. 淳化 2年(991) 樞密副使가 되고 후에 知樞密院事, 參知政事가 되었다. 至道 2年(996) 태종이 그의 擅權을 의심하여 知鄧州로 좌천시켰다. 眞宗 즉위 후 三司使가 되고 景德 元年(1004) 재상이 되었다. 그 해 거란(요)의 군대가 대거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진종에게 澶州로 北上할 것을 청하여 거란(요)과 澶淵의 盟을 성립시켰다. 景德 3年(1006) 知陝州가 되고, 大中祥符 7年(1014) 樞密使가 되었다. 다음해(1015) 정쟁에 휘말려 武勝軍節度使, 判河南府로 좌천되었다. 天禧 3年(1019) 다시 재상이 되었다. 다음해(1020) 태자를 내세워 황후를 견제하려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太子太傅·封萊國公으로 좌천되었다. 얼마 후 宦官 周懷의 반란 모의에 연루되어 雷州司戶參軍이 되었다가 곧바로 사망했다. 바로가기
  • 각주 010)
    朗州 : 북송의 지명. 隋 開皇 16年(596)에 嵩州를 고쳐 설치하였고, 그 위치는 현재 湖南 常德市였다. 관할범위가 오늘날 常德市, 漢壽, 桃源縣을 포괄했다. 大中祥符 5年(1012) 鼎州로 개칭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1)
    廣州 : 북송의 지명. 삼국시대 吳 黄武 5年(226) 交州를 나누어 처음 설치했다. 이때 관할영역은 현재 광동·광서 양성의 대부분 지역이었고 남조 후에는 점차 축소되었다. 隋唐代에는 치소를 曲江, 南海 등 현으로 옮기고 주 이름도 番州, 南海郡, 淸海軍 등으로 바꾸었다. 五代에 南漢의 國都로서 興王府로 개칭되었다. 북송 開寶 4年(971)에 다시 廣州로 바뀌고 현재 廣州市인 南海, 番禺 두 개 현을 두었다. 端拱 연간 이후에 廣南東路의 치소가 되었다. 남송 祥興 元年(1278)에 翔龍府로 승격되었다가 같은 해인 至元 15년 元에서 廣州路로 고쳤다. 바로가기
  • 각주 012)
    江州 : 북송의 지명. 西晉 惠帝 元康 元年(291)에 설치되었고, 이때의 위치는 현재 江西 南昌市의 동쪽이었다. 東晉 咸康 六年(340)에 위치를 현재 湖北 黃梅縣 서남쪽으로 옮겼다. 南朝 宋의 升明 元年(477)에 다시 위치를 현재 江西 九江市 서남쪽으로 이동시켰고, 梁 太平 二年(557)에 위치를 현재 南昌市의 동쪽으로 옮겼다. 陳 天嘉 초에 다시 현재의 九江市로 위치를 옮겼다. 隋 大業 三年(607)에는 九江郡으로 변경되었다가 唐 武德 四年(621)에 다시 江州가 되었고, 天寶 元年(742)에 潯陽郡으로 바뀌었다가 乾元 元年(758)에 다시 江州가 되었다. 唐代에 관할했던 범위는 현재 九江, 德安, 彭澤, 湖口, 都昌 등의 市와 縣이 있는 지역이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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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강전(康戩)의 국자감 입학 자료번호 : jt.k_0002_0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