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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굴수(屈戍)가 거란(契丹)의 인장을 청하여 무종(武宗)이 이를 허락함

  • 국가
    거란(契丹)
 
정원(貞元) 4년(788), 의 무리와 함께 우리의 진무(振武) 주 001
각주 001)
振武: 振武軍을 말한다. 당 景龍 2년(708) 설치했고 치소는 東受降城(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托克托西南)에 있었다. 天寶 4년(745) 치소를 金河縣(지금의 內蒙古自治區 和林格尒 서북)으로 옮겼고 오대 후당 때에는 朔州(지금의 山西省 朔縣)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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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침략해 인축(人畜)을 대거 약탈하고 돌아갔다. 9년(793)과 10년(794), 다시 사자를 보내와 알현하자 대수령(大首領) 회락예하(悔落拽何) 이하 각자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돌려 보냈다. 11년(795), 대수령 열소(熱蘇) 등 25명이 와서 알현하였다. 이후로 [헌종(憲宗)] 원화(元和)·[목종(穆宗)] 장경(長慶)·[경종(敬宗)] 보력(寶曆)·[문종(文宗)] 대화(大和)·개성(開成) 연간에 이를 때까지 사자를 보내와 조공을 바쳤다.
[무종(武宗)] 회창(會昌) 2년(842) 9월, 제(制)를 내려 말하기를, “거란에서 새로 즉위한 왕 굴수(屈戍)에게 운마장군(雲麾將軍)을 제수해 우무위장군원외치동정원(右武衛將軍員外置同正員)을 담당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장중무(張仲武) 주 002
각주 002)
張仲武(791?~?): 唐代의 宰相으로 范陽(지금 北京市 서남쪽) 사람이다. 어려서 『左氏春秋』를 익혔고 薊北雄武軍使가 되었다가 會昌 初(841) 雄武軍使가 되었으나 幽州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幽州節度副大使, 檢校工部尙書 兼 御史大夫, 蘭陵郡王이 되었다. 回鶻를 격파하고 檢校兵部尙書 兼 東西招撫回鶻使가 되었다. 그 이후 宣宗 大中 初(847~859) 司徒, 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大中 연간에 죽었고 시호는 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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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상언(上言)하여 “굴수 등이 전하기를, 거란은 옛부터 회흘(迴紇)의 인장을 사용했는데 지금 [황제께] 간청(懇請)하여 아뢰기를 거란[國家]의 [새로운] 인장을 하사해 줄 것을 청합니다.”라고 한다고 하자 [무종이] 이를 허락하고, [인장에] ‘봉국거란지인(奉國契丹之印)’이라는 문구를 새기게 했다.

  • 각주 001)
    振武: 振武軍을 말한다. 당 景龍 2년(708) 설치했고 치소는 東受降城(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托克托西南)에 있었다. 天寶 4년(745) 치소를 金河縣(지금의 內蒙古自治區 和林格尒 서북)으로 옮겼고 오대 후당 때에는 朔州(지금의 山西省 朔縣)로 옮겼다.  바로가기
  • 각주 002)
    張仲武(791?~?): 唐代의 宰相으로 范陽(지금 北京市 서남쪽) 사람이다. 어려서 『左氏春秋』를 익혔고 薊北雄武軍使가 되었다가 會昌 初(841) 雄武軍使가 되었으나 幽州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幽州節度副大使, 檢校工部尙書 兼 御史大夫, 蘭陵郡王이 되었다. 回鶻를 격파하고 檢校兵部尙書 兼 東西招撫回鶻使가 되었다. 그 이후 宣宗 大中 初(847~859) 司徒, 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大中 연간에 죽었고 시호는 莊이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회락예하(悔落拽何), 열소(熱蘇), 헌종(憲宗), 목종(穆宗), 경종(敬宗), 문종(文宗), 무종(武宗), 굴수(屈戍), 장중무(張仲武), 굴수, 무종
지명
, 진무(振武), 거란, 거란, 회흘(迴紇), 거란[國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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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수(屈戍)가 거란(契丹)의 인장을 청하여 무종(武宗)이 이를 허락함 자료번호 : jo.k_0016_0199_0040_0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