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韓)의 문화와 제도
[후한] 환제와 영제의 말기주 001에 한과 예가 강성해져서 군현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자, 주민들이 많이 한국(韓國)에 흘러 들어갔다주 002
번역주 002)
. 건안 연간(196~220)에 공손강주 003이 둔유현주 004 이남의 변방[荒地]을 대방군으로 삼았다주 005 한국에 흘러 들어갔다: 한강 유역과 이북의 경기, 강원도 지역에는 기원전부터 낙랑의 영향을 받아 한식유물이나 무덤이 확인되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이 가평 달전리, 가평 대성리, 인천 운북동유적을 들 수 있다. 가평 달전리의 목곽묘와 목관묘(토광묘)는 낙랑 지역의 무덤 형태와 유사하고, 화분형토기와 鐵戟·灰陶 등 낙랑유물을 부장하였다. 가평 대성리유적의 수혈에서는 낙랑산으로 추정되는 화분형토기가, 인천 운북동유적에서는 낙랑토기와 함께 철경동촉, 오수전, 철기 등이 출토되었다. 그 외 북한강 유역의 일부유적에서도 鐵莖銅鏃이나 盆形土器 등이 출토되기도 한다. 이들 유적은 대체로 기원전 1세기부터 1세기에 해당하며, 낙랑의 주민이 이주하였거나 교류를 통해 문물이 이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부터 1세기까지의 낙랑계 문물이 출토되는 유적의 수는 적은 편이고, 2세기 이후가 되면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즉, 2세기 이후에는 낙랑계의 철기·청동기·토기·유리 등이 이입되기도 하지만, 그 기술적 영향을 받아 재지에서 만든 토기와 기와 등도 늘어난다. 특히 화성 기안리유적에서 확인된 제철유적과 제도술은 낙랑의 주민 이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강원도와 경기북부에서 확인되는 凸자형과 呂자형의 주거지로 이루어진 취락도 2세기 이후에 급격히 증대되는 양상을 보인다. 변한과 진한도 2세기 중엽 이후에는 대형목곽묘가 조성되고, 무덤에 대량의 토기와 철기를 부장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2세기 이후의 변화양상은 낙랑 유이민의 이주와 한과 예가 급격히 성장한 상황을 물질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김무중, 2002;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2012).
번역주 005)
. 공손모와 장창주 006 등을 보내 남아 있는 주민들을 모으고, 군대를 일으켜서 한과 예를 치자, 옛 주민들이 차츰 다시 나타났다. 이후로 왜와 한이 마침내 대방군에 복속하였다. 경초 연간(237~239)에 [위나라의] 명제주 007가 대방태수 유흔주 008과 낙랑태수 선우사주 009를 비밀리에 보내 바다를 건너 두 군을 평정하고주 010,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들에게 읍군의 인수주 011를, 그 다음의 지배자에게는 읍장의 인수를 더하여 주었다. 그 풍속에 의책주 012을 좋아하였으니, 하호주 013들이 군에 이르러 조공을 바치고 알현하면 모두 의책을 주는데, 스스로 인수와 의책을 만들어 착용한 사람도 1천여 인이나 되었다. 부종사 오림주 014이 낙랑군이 본래 한국(韓國)을 통괄하였다고 하여서 진한의 여덟 나라를 분할하여 낙랑군에 주었다주 015. 관리가 통역하여 잘못 전달하매 약간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었다. 신분고한이 원망하여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다주 016 〔原註〕 兩漢志(『한서』의 「지리지」와 『후한서』의 「군국지」)에 樂浪郡의 屯有縣이라고 전한다. 李兆洛이 말하기를, “지금의 조선 平壤城 남쪽이다.”고 하였다. 丁謙이 말하기를, “帶方郡의 治所가 어디에 있는가에 관해서 예전 사람들이 모두 언급하지 않았다.” 고 하였다. 漢書 地理志에 낙랑군 含資縣에 帶水가 있어 서쪽으로 흐르다가 대방(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전한다. 경기도 북쪽 지역을 살펴보면, 臨津江이 있어 江原道 伊川郡 북쪽에서 發源해 북으로 開城에 이르고, (거기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니 딱 樂浪의 남쪽이다. 다시 그 남쪽이 바로 百濟의 경역이다. 이런 형세로 헤아려볼 때 (임진강이) 바로 한나라 때의 帶水일 것이고 그러한즉 伊川郡이 한나라 때의 含資縣이라고 보인다. 辰韓의 渠帥가 먼저 함자(현)에 이르러 항복했으니, 가히 함자(현)가 실제로 辰韓에서 樂浪에 이르는 孔道(要路)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伊川郡이 평양의 동남쪽에 위치하니, 그 情形이 매우 잘 들어맞는다. 이로써 보면 임진강이 개성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므로 (개성이) 대방군 땅(대방군 치소인 대방현)이 있던 곳은 아니라, 지금 開城郡을 帶方으로 비정하니 어쩌면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은 듯하다.
번역주 016)
. 이때에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신지를] 공격하다가 궁준이 전사하였으나 두 군이 마침내 한을 멸망시켰다주 017 신분고한이 ~ 공격하였다: 이 부분은 판본에 따라 字句가 달라진다. 즉 ‘臣幘沽韓忿’에 대해 소흥본·소희본·백납본은 ‘臣幘沾韓忿’이라 하였고, 남감본·급고각본·무영전본은 ‘臣智激韓忿’이라 쓰고 있다. 전자의 자구를 따르는 논자는 臣幘沽韓을 곧 臣濆沽國으로 보아 기리영을 공격한 주체가 마한 소국의 하나로서 경기도 북부지방에 위치하였던 臣濆沽國으로 이해한다(윤선태, 2001). 반면, 후자의 자구를 취하는 경우에는 기리영을 공격한 신지(臣智)에 대하여 백제 고이왕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36; 1959; 천관우, 1976; 1989; 이기동, 1990; 이기백, 1996; 정재윤, 2001), 마한 목지국의 진왕(辰王)으로 보는 견해(노중국, 1987) 등이 있다. 특히 고이왕으로 보는 견해는 “(246년) 가을 8월에 魏나라의 幽州刺史 毋丘儉이 樂浪太守 劉茂, 朔方太守(帶方太守) 王遵(弓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왕이 이 틈을 타서 左將 眞忠을 보내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유무가 이를 듣고 분노하자, 왕이 침략을 받을까 염려하여 그 사람들을 돌려주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제2 고이왕 13년조)라는 기사를 근거로 하고 있다. 신지나 신분고국이 격분한 이유는 중국 군현과 마한(또는 백제), 신분고국 등이 진한 지역과의 교역을 둘러싸고 분쟁을 일으킨 것에서 찾고 있다(武田幸男, 1990; 윤용구, 1999; 임기환, 2000; 윤선태, 2001). 기리영은 옛 황해도 평산군 인산면 기린리로 추정하나(이병도, 1936) 확실치 않다.
번역주 017)
. 〔原註〕 丁謙이 말하기를, “百濟가 비록 馬韓을 멸하였으나 마한 중에는 여전히 12개의 작은 部가 있어 韓王의 칭호를 세습하였다.”고 하였다. 傳紀(『삼국지』, 「위서」, 「동이전」 기사)에서 桓帝, 靈帝 말기에 韓, 濊가 강성해졌고, 建安 연간 뒤에 倭, 韓이 帶方에 복속하였으며, 魏나라 明帝 때에 이르러 二郡이 마침내 韓을 멸하였다고 하였으나, 이는 모두 마한인이 自立한 작은 部를 가리키는 것이지 三韓의 전체 영역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三韓이 예전에는 모두 토착민들의 흩어진 여러 部가 세력이 나뉘고 힘이 미약하였으니, 이 때문에 樂浪(郡)이 이들을 기미정책으로 복속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百濟와 新羅가 發興함에 미쳐, 땅이 넓고 군대가 강하여 족히 고구려와 鼎立할 정도였고, 단언컨대 (중국의) 군현이 능히 제어할 수 있는 바가 결코 아니었다. 어찌 당시의 중국이 끝내 듣지도 묻지도 않고, 막연히 해두며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단 말인가? 百濟는 본래 馬韓 列國 중의 하나이고, 新羅는 弁辰 列國 중의 하나로서 비록 겸병하여 저절로 커졌으나 어찌 여전히 삼한으로 인식하여 특별히 구분하지 않았는가? 아, 疏漏함이 매우 극심하도다. 어찌 괴이하게도 晉書, 후한서가 모두 그 오류를 답습하며, 이를 깨닫지 못했는가?
그 풍속은 기강이 적어서 국읍주 018에 비록 주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읍락이 뒤섞여 있어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무릎을 꿇고 절하는 예절이 없다. 초가지붕에 흙방을 만들어 거처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무덤과 같으며, 그 출입문은 위에 있다주 019
번역주 019)
. 모든 가족이 함께 거기서 기거하며, 어른과 어린아이, 남녀의 분별이 없다. 그 장례에 관을 사용하고 곽은 사용하지 않았다주 020 초가지붕에 ~ 위에 있다: 이 부분은 움집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마한의 주거지는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강 유역에서는 주로 출입구가 있는 呂字形 또는 凸字形이 주류를 이루지만, 충청도와 전라도의 서해안 지역은 네 모서리에 기둥을 세운 방형이 많다. 그러나 전남 동부 지역은 원형이 대부분이다. 마을은 주로 낮은 구릉이나 평지상에 위치하는데, 대전 용계동유적의 경우처럼 350여 동의 집자리가 있는 대규모 마을도 있다. 집의 내부에는 한쪽 벽면에 부뚜막을 설치하거나 ‘ㄱ’자상의 난방시설을 갖춘 것도 있다. 또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서는 특징적인 穴居시설이 확인되었는데, 일부에서는 土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공주 장선리유적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주거지는 지하에 굴과 같은 형태로 방을 만들었는데, 1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것과 여러 개의 방이 통로로 연결된 형태가 있다. 일부에서는 불을 피웠거나 가구시설도 확인되어 실제 주거용도로 사용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주거지가 보편적인 주거지라고 보기는 힘들고, 일반적인 주거지는 방형의 四柱式 주거지였다고 보는 관점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문헌기록도 사주식의 수혈주거지에 벽면을 흙으로 만들고 지붕을 풀로 덮은 초가집을 표현한 내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이훈·강종원, 2001; 성정용, 2009).
〔原註〕 문(戶)이 위에 있는 것은 혹시 옛날의 움(窖)의 자취가 아닌가 한다.
〔原註〕 문(戶)이 위에 있는 것은 혹시 옛날의 움(窖)의 자취가 아닌가 한다.
번역주 020)
. 소나 말을 탈 줄 모르고, 그것들을 장사 지내는데 모두 써버렸다주 021 그 장례에 관을 사용하고 곽은 사용하지 않았다: 마한의 무덤은 木棺墓와 周溝墓, 墳丘墓로 대별할 수 있다.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 전후 시기까지는 주로 목관묘가 사용되었다. 목관묘는 목관의 외부와 상부에 적석시설을 한 積石木棺墓와 흙으로 채운 土壙木棺墓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 시기의 주요 무덤으로는 완주 갈동, 덕동, 신풍리, 익산 신동리, 장수 남양리, 함평 초포리유적 등이 있다. 기원 전후 시기부터 3세기까지는 주구묘가 특징적이다. 주구묘는 구릉의 사면에 위치하면서 경사면의 위쪽에 눈썹모양 또는 ‘ㄷ’자상의 도랑을 돌린 것과 평탄한 구릉 위나 평지에 위치하면서 사방에 방형·원형·장방형의 도랑을 돌린 형태가 있다. 전자는 천안 청당동유적, 후자는 보령 관창리유적이 대표적이다. 매장주체부는 토광(목관묘, 목곽묘)이 기본이지만, 옹관묘가 배장되기도 한다. 주구묘는 경기에서 전남 서해안까지 매우 넓게 분포하지만, 지역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가 있기도 하다. 4세기 이후에는 분구묘가 나타나는데, 초기에는 부정형을 이루다가 점차 방대형 또는 방형이나 원형의 형태를 갖추어 간다. 분구묘의 매장주체부는 대형옹관묘가 주체를 이루는데, 하나의 분구 내에 다수의 옹관이 안치된다. 일부는 토광과 공존하기도 한다. 익산 율동리, 군산 산월리, 완주 상운리유적이 대표적이다. 마한의 주구묘도 매장주체부를 보면 진·변한과 마찬가지로 2세기 이전에는 목관묘가 주로 사용되다가 이후에는 목곽묘로 변화한다. 다만 棺槨을 갖추거나 異穴合葬이 이루어져 낙랑 지역의 묘제와 유사한 면이 있다. 진·변한 지역도 2세기 이전까지는 목관묘가 유행하다가 이후 목곽묘로 변화하는데, 마한 지역과 달리 주구가 없는 경우가 많다. 또 목곽묘에는 관이 없는 경우가 많고, 합장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 차이라 할 수 있다.
번역주 021)
. 구슬을 재보로 여겨서주 022 소나 말을 ~ 써버렸다: 마한 영역에서는 거의 마구가 출토되지 않고 있다. 충주 금릉동과 아산 명암리 밖지므레 무덤에서 재갈이 출토되긴 하였으나 3세기 무렵으로 시기가 늦은 편이다. 김포 운양동에서도 철봉을 꼬아 사슬모양으로 만든 재갈로 추정되는 철기가 출토되었으나 당시 낙랑이나 중국, 진·변한 지역에서 출토되는 일반적인 재갈과는 형태적인 차이가 있다. 또 청주 봉명동과 청원 송대리, 오산 세교유적에서 청동제 말방울이 출토된 정도이다. 마형대구도 천안 청당동, 아산 갈매리, 연기 응암리, 청원 송대리, 청주 봉명동, 연기 응암리 가마골 유적 등 아산·천안·청주·충주·연기 일대를 중심으로 출토되기는 하지만, 역시 시기가 2~3세기 무렵으로 영남 지역에 비해 시기가 늦은 편이다(박장호, 2012).
번역주 022)
혹은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혹은 목에 매어 달거나 귀에 달아 늘어뜨리기도 하였다. 금은이나 비단과 수를 진귀하게 여기지 않았다주 023 구슬을 재보로 여겨서: 초기철기시대에는 천하석제 곡옥과 함께 유리로 관옥과 고리, 작은 환옥 등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부여 합송리와 장수 남양리에서는 관옥이, 완주 갈동유적에서는 고리, 신풍유적에서는 고리와 관옥, 소형 환옥 등의 유리제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이들은 기원전 2세기 무렵으로 편년되는 것으로서 중국에서 수입된 납-바륨유리이다. 원삼국시대가 되면, 구슬의 재질과 모양이 다양해진다. 유리는 납 대신 포타쉬와 소다가 주성분인 유리로 변화하고, 한반도에서 직접 구슬로 제작했다. 유리구슬을 만든 주형(틀)은 해남 군곡리, 광주 선암동, 익산 송학동, 서울 풍납토성 유적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유리는 관옥과 환옥·곡옥·다면옥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었고, 색상도 남색·초록색·적갈색·흑색 등 다양하다. 유리 이외에도 수정·마노·호박 등의 광물질로 만든 구슬도 유행하였다. 그런데 마한 지역에서는 적갈색 계열의 구슬을 선호하였고, 진·변한 지역에서는 수정제 구슬이 유행한 특성도 있다. 원삼국시대 후기에는 금박유리옥이 출토되기도 하는데, 동남아시아에서 제작된 것이 낙랑이나 대방을 거쳐 수입된 것으로 추정된다(김미령·김승옥, 2013; 양아림, 2014).
번역주 023)
. 그 사람들의 성질이 강건하고 용감하였다. 맨머리에 상투를 드러냈는데주 024, 그 모습이 마치 굳센 병사와 같았다.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가죽으로 만든 교답(蹻蹋)을 신었다주 025 금은이나 비단과 수를 진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금제품은 김포시 운양동에서 출토된 3점의 이식이 전부이다. 금제 이식은 운양동 1-11지점 12호 주구묘에서 1점, 2-9지점 6구역 1호 주구묘에서 2점이 출토되었다. 이들은 1매의 금판을 오려 위쪽은 나선형으로 감고, 아래는 부채꼴모양으로 양끈을 구부려서 만들었다. 금의 순도는 18K 이상이다. 유사한 형태가 중국 길림성 유수 노하심유적과 운봉댐수몰지구 석호(石湖) 왕팔발자묘군(王八脖子墓群)에서 출토된 바 있어, 부여 또는 고구려 지역에서 제작된 완제품이 수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유구는 2~3세기에 해당한다. 그 외에 금박유리가 있는데, 완주 상운리, 아산 명암리 밖지므레, 용인 상갈동, 화성 화산동, 충주 문성리, 천안 청당동, 천안 두정동, 고창 남산리 등지에서 출토된 바 있다(이한상, 2013; 김미령·김승옥, 2013).
번역주 025)
. 그 나라 안에 중요한 행사가 있거나 또는 관가에서 성곽을 쌓게 할 때, 여러 나이 어린 용감하고 건장한 자들은 모두 등가죽을 뚫어 큰 밧줄로 관통시키고, 또한 한 길쯤 되는 나무를 꽂았다. 하루 온종일 소리를 지르면서 힘을 쓰는데, 아프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작업하기를 권장하며, 또한 강건하다고 여겼다주 026. 항상 5월에 파종을 끝마친 뒤 귀신주 027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때] 무리를 지어서 노래 부르고 춤추며 술을 마시는데,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그 춤은 수십 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르며 땅을 밟고 몸을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손과 발이 서로 잘 어울렸는데, 그 리듬이 마치 [중국의] 탁무와 흡사함이 있었다. 10월에 농사일을 끝마친 뒤에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귀신을 믿는데, 국읍마다 한 사람을 세워서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으니, 그를 이름하여 천군주 028 가죽으로 만든 교답(蹻蹋)을 신었다: 고대의 신발은 재질에 따라 짚신·가죽신·나막신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가죽신은 평양의 채협총과 석암리 201호, 205호에서 출토된 바 있는데, 가죽에 옻칠을 하여 만든 것이다. 이와 비슷한 형태가 창원 다호리 19호 무덤에서 출토된 바 있다. 김해 대성동의 가야고분에서는 단화모양의 토우장식이 붙은 기대편이 출토된 바 있어 삼한시기에 가죽신도 유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가장 일반적인 신발은 짚신이었을 것이다. 『후한서』에는 마한인들이 草履를 신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물자료가 군산 내흥동의 원삼국시대 수혈유구에서 출토된 바 있다. 삼국시대 이후의 자료로는 부여 궁남지, 관북리, 왕궁리, 경주 황남동 등지에서 발굴된 바 있고, 짚신모양의 토기도 부산 복천동 고분군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다. 또 나무로 만든 일본의 게다(下駄)모양의 신발도 경산 임당동 저습지, 부산 가동유적, 아산 갈매리 유적 등 삼국시대 유적에서 다수 출토되었다. 이 신발은 높은 굽을 가진 납작한 나무판에 구멍을 내고 끈으로 엮어 신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蹻蹋은 이러한 형태의 신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복천박물관, 2010).
번역주 028)
이라고 불렀다. 또한 여러 나라마다 별읍이 있는데, 이를 이름하여 소도주 029 천군: 삼한의 각 소국에는 정치적 지배자인 국읍의 主帥와 더불어 전문적으로 하늘의 제사를 담당하는 司祭가 있었는데, 이를 天君이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초기 사회에서는 祭政一致가 보편적인 현상이었으나 사회가 분화되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지배자와 사제가 임무를 나누기 때문에 전문적인 사제가 천군이 되었던 것이다. 역사의 발전 단계에서 초기 사제가 지도자로 등장하는 사례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檀君王儉에서 檀君은 몽골어와 투르크어에서 하늘과 그 하늘이 신격화된 천신을 가리키는 용어를 가리키는 텡그리, 또는 조선시대에 무당을 가리키는 당골을 한문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王儉은 정치적인 군장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단군왕검’을 종교와 정치가 일치된, 즉 제정일치사회의 군장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편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왕호인 次次雄 혹은 慈充이 바로 巫, 사제였다고 전하고 있다. 마한에서 천군이 존재하였다는 것에서 이미 정치적으로 왕, 또는 臣智 같은 지도자가 등장하였기 때문에 제정이 분리된 사회였음을 살필 수 있다.
번역주 029)
라고 하였다. 큰 나무를 세우고주 030, 방울과 북을 매어 달고 귀신을 섬겼다주 031 소도: 각 소국에 別邑이 존재하였고, 여기서 天君이 하늘에 대하여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신성한 별읍을 蘇塗라고 불렀다. 소도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는 소도가 경계표시라든가, 또는 성황당과 관련된 것이라고 보기도 하나, 신전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마도 각 소국마다 소도가 존재하여 농경사회의 여러 제의를 수행한 것으로 이해된다(이병도, 1976; 문창로, 2013). 한편 소도는 청동기문화기의 소산으로 철기문화의 기반을 갖는 부족국가에 대항하던 성격을 가졌으며, 철기문화를 가진 이주민과 청동기문화의 토착민들 사이에서 예견되는 갈등과 대립을 조절 발산시켜주는 완충적 역할을 수행하였다(김철준, 1969; 1990)고 보기도 한다.
번역주 031)
. 여러 도망자들이 소도 내에 이르러도 모두 돌려보내지 않았으므로 도적질하기를 좋아하였다주 032. 소도를 세운 의미는 흡사 부도와 같으나, 행하는 바의 선악에 다른 점이 있었다. 그 북쪽의 군에 가깝게 위치한 여러 나라들은 예속에 밝았으나 먼 곳에 위치한 나라들은 마치 죄수와 노비들처럼 서로 모여 사는 것과 같았다주 033. 특별하게 진기한 보물은 산출되지 않는다. 동물과 식물은 중국과 거의 같았다. 큰 밤이 생산되는데, 크기가 배만 하였다주 034. 또한 가느다란 꼬리를 가진 닭이 있는데주 035, 그 꼬리가 모두 길어서 다섯 자나 넘었다주 036. 남자들은 때때로 문신주 037을 하였다. 또한 주호주 038가 있는데, 마한의 서쪽 바다의 큰 섬에 위치하였다. 그 사람들은 작고 왜소한 편이었으며, 언어는 한과 같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선비족과 같이 머리를 밀었다. 다만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소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였다. 그들은 상의만 입고 하의는 입지 않아서 마치 나체와 같았다. 그들은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韓)에서 물건을 사고팔았다주 039 방울과 북을 매어 달고 귀신을 섬겼다: 소도에서는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겼다고 이해하여 오늘날 솟대의 기원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땅을 파고 큰 기둥을 세운 입대목(立大木) 유구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다. 진안 여의곡 1호 수혈, 김해 율하리 B-14수혈, 울산 덕신리 572-6유적의 경우 깊이 1m 내외의 구덩이를 2단으로 파고 기둥을 세운 후 돌과 흙을 채워 기둥을 지지토록 하였다. 이들은 청동기시대의 무덤유적 주변에서 발견하였으며, 입석과 함께 솟대도 청동기시대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다만, 청동방울은 대전 괴정동, 부여 합송리 등의 한국식동검문화기에 처음으로 나타나 유행하며, 주로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식동검문화기의 청동의기는 사용 흔적이 있는 경우도 있어 실제로 제사장이 사용하다가 무덤에 부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광주 신창동유적에서도 토제방울과 동탁형토제품, 방울의 설(舌), 토제북, 현악기, 찰음(擦音)악기, 조형목기 등과 함께 발굴되었다. 이러한 유물을 소도에서 이루어진 농경제사 의례의 흔적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이종철, 2014; 조현종, 2014).
번역주 039)
. 또한 주호가 있는데 ~ 사고팔았다: 제주도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석기나 토기 등의 내륙문물이 이입되었고,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에는 청동기와 철기, 토기 등의 내륙문물과 유리, 鐵莖銅鏃, 동전, 동경 등의 한식문물도 다수 이입되었다. 내륙계 문물 중의 동검이나 정문경(精文鏡) 등은 서남부 지역에서 이입된 것이지만, 철기는 영남 지역에서 입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제주도에 살았던 사람들은 육지 지역과의 빈번한 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화와 필요한 물자를 조달해 온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한 활동의 증거는 남해안 도서 지역에서도 단편적으로 발견된다. 즉, 사천 방지리, 늑도, 광주 신창동유적 등지에서는 토기의 태토에 현무암질 모래가 포함된 대형토기들이 발견되었다. 다른 유적의 토기들은 대체로 파편이어서 형태를 알 수 없지만, 사천 늑도출토품 중에는 완전한 형태로 복원된 것도 있다. 이 토기는 높이 120cm, 구경 120cm로서 태토에는 현무암질의 모래를 포함하고 있고, 삼양동식토기에 해당한다. 또 늑도유적에서는 현무암질 닻돌도 출토되어 제주인들이 변진의 철을 입수하기 위해 남해안을 항해하면서 남겼던 증거라고 할 수 있다(이재현, 2008).
〔原註〕 『후한서(范書)』에서는 “乘船往來 貨巿韓中”이라고 기술하였다.
〔原註〕 『후한서(范書)』에서는 “乘船往來 貨巿韓中”이라고 기술하였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그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옛 유망인들이 진(秦)의 부역을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오자주 040, 마한이 그 동쪽 경계의 땅을 갈라 주었다.”주 041라고 하였다. 성책이 있다. 그 언어는 마한과 같지 않았다. 나라를 방(邦)이라고 부르고, 활을 호(弧), 도적을 구(寇), 술 잔 돌리는 것을 행상(行觴)이라고 불렀으며, 서로 부르기를 모두 도(徒)라고 하였으니, 이는 연이나 제나라 사물의 호칭뿐만 아니라 특히 진(秦)나라 사람들의 그것과도 비슷하였다. 낙랑 사람들을 아잔(阿殘)이라고 하였는데, 동방의 사람들은 나를 아(阿)라고 불렀으니주 042, 낙랑 사람이 본래 자기 무리의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뜻한다. 지금도 그를 가리켜서 진한(秦韓)이라고 부르는 자가 있다주 043. 처음 6국이었다가 차츰 나뉘어서 12국이 되었다주 044.
변진 역시 12국이다주 045. 또한 여러 소별읍주 046이 있다. 각각 거수가 있는데, 큰 자를 신지라 이름하고, 그 다음에 험측주 047, 그 다음에 번예주 048, 그 다음에 살해, 그 다음에 읍차가 있다주 049
번역주 049)
. 이저국주 050, 불사국주 051 각각 거수가 있는데 ~ 읍차가 있다: 이 부분은 마한의 경우는 큰 나라의 지배자를 신지, 작은 나라의 지배자를 읍차라고 불렀으나, 진·변한의 경우는 소국의 크기에 따라 신지·험측·번예·살해·읍차 등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불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마한에 비하여 진·변한의 소국 지배자들을 다섯 등급으로 구분하였던 사실은 그들 소국들 자체 내에서 상호간의 서열이 매우 발달하였음을 말해주며, 아울러 이를 통하여 진·변한 소국들 사이에 연맹체 조직의 질서가 정연하게 자리 잡았음을 시사한다. 한편 진·변한 소국의 통합 시기가 늦어서 소국 지배자들의 개별성이 강하게 작용하고, 그럼으로써 주수(主帥)를 뜻하는 고유의 명칭이 장기간 잔존되었던 사실을 반영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이현혜, 1984). 이 밖에 험측 등을 독립된 소국이나 읍락의 지배자로 보지 않고, 신지를 정점으로 하여 편성된 통치체계의 하위 서열자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김정배, 1997).〔原註〕 宋本에서는 邑借라고 표기하였다. 『范書(후한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章懷太子는 注에서 “(이것들은) 모두 官名이다.”라고 하였다.
번역주 051)
, 변진미리미동국주 052 불사국: 『삼국사기』 지리지 양주조에 火王郡은 본래 比自火郡 또는 比斯伐이었다고 전한다. 진흥왕순수비 창녕비에는 비자벌(比子伐), 『일본서기』에는 比自㶱로 전하기도 하는데, 현재 경남 창녕의 옛 이름이다. 여기서 自와 子, 斯는 모두 사이시옷의 의미를 지니고, 벌이나 화는 모두 들(평야)을 가리킨다. 따라서 비자벌(화), 비사벌은 ‘빗벌’로 독음할 수 있다. 한편 마한의 소국 이름 가운데 ‘卑離’를 칭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들(평야)을 가리키는 夫里를 가리킨다고 이해되고 있다. 이에 따른다면, 비리=부리=불로 연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상정해볼 수 있고, 결국 불사국과 비자벌은 음이 상통한다고 이해하여도 좋을 것이다(鮎貝房之進, 1937; 양주동, 1975; 이병도, 1976). 이와 달리 불사국은 경북 안동시에 위치한 소국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76; 1991).
번역주 052)
, 변진접도국주 053, 근기국주 054, 난미리미동국주 055, 변진고자미동국주 056, 변진고순시국주 057, 염해국주 058, 변진반로국주 059, 변진악노국주 060, 군미국주 061, 변군미국주 062, 변진미오야마국주 063, 여담국주 064, 변진감로국주 065, 호로국주 066, 주선국주 067, 마연국주 068, 변진구야국주 069 변진미리미동국: 본서에서 변한 소국에 속하는 경우는 변진을 소국명 앞에 표기하였다. 오늘날 경남 밀양시의 옛 이름이 推火郡이다. 추화는 ‘밑벌(밑불)’로 독음할 수 있는데, ‘彌離’와 ‘밑(밀)’의 음이 상통한다. 종래에 이에 주목하여 미리미동국을 경남 밀양시에 위치한 변한 소국으로 추정하였다(이병도, 1976; 김태식, 1993). 한편 현재 밀양시 삼량진읍의 옛 이름이 密津縣이었는데, 밀진의 ‘밀’과 ‘미리’를 연결시켜 미리미동국을 삼량진읍으로 추정한 견해도 제기되었다(鮎貝房之進, 1937). 이밖에 미리미동국을 현재 경북 의성군 단밀면의 옛 이름이 武冬彌知縣이었던 사실과 연결시켜 미리미동국을 경북 예천군 용궁면 또는 상주시 함창면으로 비정한 견해도 있다(천관우, 1976; 1991).
번역주 069)
, 변진주조마국주 070 변진구야국: 경남 김해시에 위치한 변한 소국으로서 후에 금관가야라고도 불렀다. 금관가야는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국으로 군림하다가 400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가야연맹의 지도력을 상실하고 세력이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532년에 구해왕이 신라에 항복하였다. 김해 지역에는 신석기시대부터 다수의 주민이 거주해왔으며, 청동기시대에는 대규모의 고인돌을 조성한 집단들이 김해의 여러 지역에 형성되어 있었다. 특히 김해 중심부에는 구산동·내동·대성동·서상동·회현동 등지에서 대형 고인돌과 석관묘 등이 확인되었다. 그중에서 구산동 A2-1호 고인돌은 장방형의 묘역을 가진 고인돌로서 상석의 무게가 350톤에 이르는 최대형 고인돌로 추정되고 있다. 초기철기시대에도 봉황동과 구산동의 구릉지를 중심으로 취락이 형성되었으며, 청동기와 왜계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일찍부터 대외교역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42년에 9干의 추대를 받아 가락국(구야국)을 세웠다고 전해지며. 이 시기에는 봉황동유적지를 중심으로 취락을 형성하였고, 대성동과 양동리·내덕리 등지에 목관묘를 조성하였다. 특히 양동리와 내덕리에서는 중국제 후한경과 왜계 청동유물 등의 외래유물과 철기, 청동기 등이 출토되어 활발한 대외교역의 양상을 알려주고 있다. 2세기 이후에는 양동리와 대성동유적을 중심으로 대형 목곽묘를 조성하였고, 한경과 수정제 장신구, 다량의 철제무기와 철정 등을 부장하고 있어 당시의 문화와 사회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까지의 발굴자료로 보면 3세기 중엽까지는 대성동과 양동리 세력이 거의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3세기 후엽부터 대성동 세력이 우위를 확보하여 구야국의 정치적 중심세력이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李永植, 1994; 백승충, 1995; 신경철, 1995; 홍보식, 2000; 김태식, 2002; 이재현, 2005; 박대재, 2006).
번역주 070)
, 변진안야국주 071 변진주조마국: 주조마국은 『일본서기』에 임나 소국의 하나로 나오는 卒麻國과 관련이 깊다고 이해되고 있다. 졸마국의 위치에 대하여 옛 金山의 助馬部曲과 연결시켜 경북 김천시 조마면으로 추정하는 견해(이병도, 1976), 速含郡과 졸마국이 음운상 통한다고 이해하여 주조마국을 경남 함양군 함양읍에 위치한 변한 소국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김태식, 2002). 이밖에 주조마국을 경남 함안군 칠원면 또는 마산시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76).
〔原註〕 馮本에서는 ‘走’를 ‘定’으로 표기하였다.
〔原註〕 馮本에서는 ‘走’를 ‘定’으로 표기하였다.
번역주 071)
, 마연국주 072, 변진독로국주 073 변진안야국: 경남 함안군 가야읍에 있었던 변한 소국으로서 후에 阿羅加耶라고도 불렸다. 『삼국사기』에는 阿尸良國, 阿那加耶, 阿羅國 등으로, 『삼국유사』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 『일본서기』에는 安羅, 阿羅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고학적 자료로는 함안군 도항리와 말산리유적에서 1~2세기대의 목관묘가 발굴되기는 하였으나 부장품이 탁월한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3세기대의 자료는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한 상태이고, 4~5세기대 이후가 되어서야 도항리·말산리의 구릉부에 대형의 목곽묘와 봉토분이 형성되었고, 묘의 규모나 부장품의 내용이 탁월하여 아라가야의 중심지임을 짐작케 한다(권주현, 1993; 김형곤, 1995; 이형기, 1999; 남재우, 2000; 김태식, 2002; 南在祐, 2003; 조영제, 2004; 김세기, 2012).
번역주 073)
, 사로국주 074 변진독로국: 부산광역시 동래구 일대에 위치하였던 변한 소국이다. 민락동과 수안동 일대에 형성된 동래패총은 2~3세기를 중심시기로 하는 생활유적으로 패총과 삼한시기의 야철지가 확인되었다. 패총에서는 다량의 토기와 동물뼈, 골각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그중에는 마한이나 왜계토기 등도 포함되어 있어 활발한 대외교역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덤유적은 복천동 지역에 형성되었는데, 1~2세기대에는 주로 평지와 구릉의 하단에 무덤을 조성하다가, 4세기 이후에는 구릉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상위계층의 무덤이 조성되었다. 온천동과 구서동, 노포동 등지에서도 삼한시기의 생활유적과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출토유물 중에는 울산이나 경주 지역과 밀접한 관련을 보여주는 것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탈해이사금이 동래의 거칠산국(居柒山國)을 복속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고고학적 자료를 보면 4~5세기까지도 여전히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유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번역주 074)
, 우중국주 075 사로국: 후에 신라로 발전하였다. 경주 일대에는 신석기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거주하였다. 청동기시대에는 여러 지역에 취락을 형성하면서, 고인돌이나 암각화 등을 남겼다. 기원전 2세기 말 또는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는 철기와 청동기를 제작하였고, 대외교역을 통해 성장하였는데, 그러한 양상은 당시의 묘제인 목관묘에서 잘 나타난다. 목관묘에는 토기와 철기·칠기·청동기와 중국의 한에서 수입한 여러 위세품을 부장하였다. 특히 입실리와 죽동리·조양동·구정동·교동·사라리의 목관묘에서는 당시의 최고 위세품이라 할 수 있는 청동 무기와 장신구, 철기, 중국산 거울이나 동전, 방울 등 다량의 기물을 부장하였다. 이러한 위세품을 부장한 무덤은 당시 최고위 계층의 무덤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1세기까지는 특정한 촌락이나 세력이 주도적인 위치를 독점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2세기 이후에는 대형의 목곽묘를 조성하고, 황성동 일대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제철업이 발전했는데, 아직까지 당시 최고위계층의 무덤이라 할 수 있는 대형 목곽묘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4세기 이후에 해당하는 대형목곽묘가 월성로를 포함하는 인왕동과 황남동 일대에서 부분적으로 확인되었고, 5세기 이후에는 대형의 적석목곽분을 포함한 대규모의 고분군이 황남동과 인왕동, 황오동 일대에 조성되어 신라의 발전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최병현, 1992; 이현혜, 2008; 이희준, 2007; 이희준, 2011; 주보돈, 2003; 최병현, 2015; 김용성, 2015).
〔原註〕 斯盧는 곧 新羅이다. 곧 譯音이 와전된 것이다.
〔原註〕 斯盧는 곧 新羅이다. 곧 譯音이 와전된 것이다.
번역주 075)
이 있다. 변한과 진한을 합하여 24국인데주 076, 큰 것은 4천~5천 가, 작은 것은 6백~7백 가이며, 총 4만~5만 호이다. 그 12국은 진왕에게 속하였다. 진왕은 항상 마한인으로서 삼았으며, 대대로 [마한인끼리] 서로 계승하였다. 진왕은 스스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주 077 우중국: 보통 유행본에는 優中國으로 전하나 『翰苑』 雍氏註, 南藍本 및 天啓重刻本에는 優由國으로 전한다. 종래에 신라 명주 울진군의 본래 이름인 于珍也縣과 연결시켜 우중국을 경북 울진에 위치한 진한 소국으로 추정하였다(천관우, 1976). 한편 『삼국사기』 지리지 양주조에 密城郡의 영현 烏丘山縣이 본래 烏也山縣 또는 烏禮山縣이라고 불렀던 사실을 주목하여 우유국을 경북 청도군 청도읍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이병도, 1976). 『삼국사기』 열전 석우로조에 왜군이 신라를 치니, 첨해왕이 于柚村으로 出居하였다고 전하고, 진흥왕순수비 창녕비에 于抽란 지명이 나온다. 경북 울진군 영해면의 옛 지명이 우시군(于尸郡)이며, 신라 경덕왕 대에 有鄰郡으로 개칭하였다. 于尸에서 ‘尸’는 ‘ㄹ’ 또는 ‘ㅈ(ㅅ)’ 받침을 의미하므로 ‘于尸’는 ‘울’ 또는 ‘웆’으로 독음할 수 있다. 于抽의 경우 ‘우추’뿐만 아니라 ‘웇’으로도 독음할 수 있으므로 ‘于尸’의 독음 ‘울’ 또는 ‘웆’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주목한다면, 于柚村은 于尸郡, 즉 영덕군 영해면으로 비정할 수 있고, 나아가 優由國은 바로 영해면에 위치한 진한 소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전덕재, 2013).
〔原註〕 馮本에서는 中을 由라고 하였다.
〔原註〕 馮本에서는 中을 由라고 하였다.
번역주 077)
. 진왕은 스스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종래에 여기에 언급된 진왕을 진한왕=사로국왕이라고 이해하였던 경우도 있었다(천관우, 1976; 박대재, 2002). 그러나 앞의 마한조에서 언급된 진왕과 이를 동일한 실체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이러하였을 때 진왕은 항상 마한인으로서 삼았으며, 대대로 [마한인끼리] 서로 계승하였다는 의미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진왕은 마한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진·변한 24국 중에서 12국까지 대표하는 존재로서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노중국, 2002; 김태식, 1993; 권오영, 1996). 또한 진왕에게 속하였다는 12국에 대해서는, 이를 진한 12국으로 보는 견해(천관우, 1976)와 변한 12국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김태식, 1993), 마한조에서 목지국 신지의 이른바 ‘優呼’에 변한계의 안야국과 구야국 지배자의 칭호가 보이므로, 변한 12국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한편 진왕이 스스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는 사실은 목지국의 왕이 진왕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소국들의 합의가 필요하였다는 사실과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노중국, 1990).
위략에 이르기를 “분명히 그들이 도망해서 이주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마한에게 통제를 받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토지는 비옥하며, 오곡과 벼를 심기에 알맞았다주 078
번역주 078)
. 양잠을 잘하였으며, 겸포를 짰다. 소와 말이 끄는 수레를 탔으며, 시집가고 장가드는 것을 예절에 맞게 하고, 남녀 간에 분별이 있었다. 큰 새의 깃털을 장례용으로 썼는데, 그 뜻은 죽은 사람으로 하여금 날아오르도록 하고자 해서였다주 079 오곡과 벼를 심기에 알맞았다: 오곡에는 벼를 포함하는 것이 보통이나 여기서는 벼를 포함하지 않은 다섯 가지의 주요 곡물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오곡에 포함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신석기시대부터 소규모의 잡곡 농사가 이루어졌고, 조·기장·수수·벼·보리 등이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 그중 조와 기장은 재배종이 확실하지만, 나머지는 식물의 종이나 연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서서는 잡곡농사와 벼농사가 본격화되었고, 여러 생활유적에서 탄화된 곡식도 다량으로 확인되고 있다. 또한 진주 대평유적에서는 대규모의 밭유적이 확인되었고, 논도 울산 옥현, 논산 마전리 등의 여러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확인된 곡식은 쌀과 콩·팥·보리·밀·조·수수·기장 등이 있다. 철기가 사용된 삼한 시기에는 경작지가 확대되고, 농경생활도 더욱 발전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벼는 김해 부원동유적, 김해 회현리유적, 사천 늑도유적, 고성 동외동패총, 합천 영창리 27호 가마, 양산 평산리 9호 주거지, 상주 병성동유적, 경주 황성동 나-12, 단양 수양개 4호·8호 주거지, 부여 논티, 군산 관원리 11호 주거지, 전주 송천동유적 8호·11호 주거지, 김제 심포리유적, 광주 신창동, 보성 금평패총, 영암 신연리 1호 주거지, 해남 군곡리패총 등에서 출토된 바 있다. 밀은 단양 수양개유적, 보리와 콩은 단양 수양개와 양양 가평리유적, 팥은 철원 와수리, 단양 수양개, 양산 평산리 9호, 콩은 양양 가평리, 단양 수양개, 녹두는 단양 수양개 등에서 출토되었다. 특히 완주 용흥리유적에서는 쌀·밀·팥·조가, 단양 수양개유적에서는 보리·녹두·팥·콩이, 사천 늑도유적에서는 밀·보리·쌀이 함께 확인되었다(허문회 외, 2001; 복천박물관, 2005; 국립중앙박물관, 2006).
〔原註〕 宋本에는 ‘移’字가 없다.
〔原註〕 宋本에는 ‘移’字가 없다.
번역주 079)
. 큰 새의 깃털을 ~ 해서였다: 고대인들이 새를 하늘의 전령이라고 믿었고, 또 새가 영혼을 하늘로 실어다 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큰 새의 깃털을 무덤에 집어넣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고대사회에서 새는 태양신의 別態 또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자, 영혼의 운반자로 인식되었다. 변한과 진한 지역의 무덤에는 새나 태양을 상징하는 문양을 장식한 기물이 많다. 기원전 1세기부터 1세기까지의 목관묘에서는 새의 깃털을 사용해 만든 부채로써 주검을 덮은 경우가 확인되고 있다. 또 새의 형상을 장식한 검파두식도 여러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2~3세기의 목곽묘에서는 새 모양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태양을 상징하는 문양을 거울이나 銅泡·漆器·토기·철기 등에 장식하여 무덤에 부장하였고, 대형의 목곽묘를 조성하여 다량의 기물을 부장하였다. 이와 같은 성대한 장례와 厚葬의 습속은 死者의 昇天과 來世의 안녕을 바라는 조상숭배의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장례의례를 통해 다른 사람과의 차별과 결속을 도모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며, 사자의 지위를 계승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다. 변한과 진한 지역에서 대형의 무덤을 만들고, 대량의 기물을 부장하는 새로운 喪葬制度를 통해 철기와 토기 등의 기물을 대량으로 소비하게 만들었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생산과 유통을 장악한 엘리트계층은 한층 권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으며, 사회적 차별과 계층분화가 더욱 진행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권오영, 1999; 이재현, 2012).
위략에 이르기를 “그 나라에서 가옥을 짓는데, 여러 개의 나무를 가로질러서 지었으므로 마치 감옥과 흡사하였다.”라고 하였다.
나라에서 철이 생산되는데주 080, 한(韓), 예, 왜에서 모두 와서 가져갔다. 사고 팔 때에 모두 철을 사용하였으니,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았다주 081. 또한 그것을 [낙랑과 대방의] 두 군에 공급하였다주 082
번역주 082)
. 풍속에 노래 부르고 춤추며, 술 마시기를 즐겼다. 큰 고[瑟]주 083 그것을 [낙랑과 대방의] 두 군에 공급하였다: 변·진한에서 철을 공급하고 대신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하였으며, 이를 예나 왜 등에 다시 수출하였다. 초기에 금관가야는 중개무역을 통하여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진한과 변한 지역의 철기문화는 낙랑군 설치 이전에 이미 어느 정도 전래되었지만 낙랑군이 설치된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영남 지역에서 확인된 전국계통의 철기는 주조철부와 호미 등을 들 수 있다. 즉, 경산 임당 FⅡ-34호 목관묘에서 출토된 주조철부는 공부(銎斧)에 2조의 돌대를 돌린 것으로 세죽리-연화보 유형의 대표적인 철기이다. 같은 형태의 주조철부 공부 파편이 사천 늑도유적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그리고 대구 팔달동과 울산 중대유적 등에서 출토된 장방형 공부를 가진 주조철부도 중국의 전국~전한 초기에 걸쳐 한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 지역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형태이다. 사다리모양의 철판에 구멍을 뚫은 호미도 중국 동북 지역의 전국~서한 초기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것과 같은 형태이다. 창원 다호리 62호 목관묘 출토품은 주조품이고, 밀양 교동 3호 목관묘와 경주 황성동 강변로 1호 옹관묘에서 출토된 것은 단조품이다. 이러한 전국 계통의 철기들은 영남 지역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해당하며, 기원전 2세기~1세기에 해당한다.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영남 지역에서는 철기가 본격적으로 생산되었다. 철기는 주로 무덤의 부장품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지만, 울산 달천유적에서는 採鑛遺構, 경주 황성동유적에서는 鍛冶遺構와 溶解·精鍊遺構가, 사천 늑도유적에서는 정련 또는 용해유구가 확인되었다. 기원전 1세기부터 1세기까지는 주로 단검과 창·화살촉·환두도 등의 무기류와 도끼·끌·조각칼·괭이·낫·따비 등의 농공구류, 재갈 등의 마구류가 주류를 이룬다. 전국시대 燕이나 漢의 철기문화를 고조선이나 낙랑을 통해 직접적으로 수용한 것도 있지만, 지역실정에 맞게 변형한 독창적인 것도 있다. 2세기 이후에는 장검과 환두대도, 철제보습 등의 새로운 철기도 등장하며, 무덤에 부장되는 철기의 양도 증대하였다. 특히 무덤에 부장되는 철기 중에는 검이나 재갈·鐵鉾·有刺利器·낫·도자 등에 고사리 모양의 문양을 장식하거나 철모 중에는 지나치게 크기를 강조하여 실용성이 없는 철기도 유행하는데, 이들은 부장용 또는 장송의례를 위해 제작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목곽묘가 일반화되면서 무덤의 부장품으로 소모되는 철기가 급증하였고, 진한과 변한에서 생산된 철이 낙랑과 대방, 마한과 예, 왜 등지에 수출되면서 대량적인 철 생산을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철 자원이 풍부한 김해와 경주의 구야국과 사로국이 성장하고, 그 내부에서도 기술, 유통 및 분배를 장악한 집단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권력을 더욱 확대하는 기반이 되었다(이남규, 1993; 이성주, 1997; 이남규, 2002; 손명조, 2012; 한국문화재조사연구기관협회, 2012).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영남 지역에서는 철기가 본격적으로 생산되었다. 철기는 주로 무덤의 부장품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지만, 울산 달천유적에서는 採鑛遺構, 경주 황성동유적에서는 鍛冶遺構와 溶解·精鍊遺構가, 사천 늑도유적에서는 정련 또는 용해유구가 확인되었다. 기원전 1세기부터 1세기까지는 주로 단검과 창·화살촉·환두도 등의 무기류와 도끼·끌·조각칼·괭이·낫·따비 등의 농공구류, 재갈 등의 마구류가 주류를 이룬다. 전국시대 燕이나 漢의 철기문화를 고조선이나 낙랑을 통해 직접적으로 수용한 것도 있지만, 지역실정에 맞게 변형한 독창적인 것도 있다. 2세기 이후에는 장검과 환두대도, 철제보습 등의 새로운 철기도 등장하며, 무덤에 부장되는 철기의 양도 증대하였다. 특히 무덤에 부장되는 철기 중에는 검이나 재갈·鐵鉾·有刺利器·낫·도자 등에 고사리 모양의 문양을 장식하거나 철모 중에는 지나치게 크기를 강조하여 실용성이 없는 철기도 유행하는데, 이들은 부장용 또는 장송의례를 위해 제작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목곽묘가 일반화되면서 무덤의 부장품으로 소모되는 철기가 급증하였고, 진한과 변한에서 생산된 철이 낙랑과 대방, 마한과 예, 왜 등지에 수출되면서 대량적인 철 생산을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철 자원이 풍부한 김해와 경주의 구야국과 사로국이 성장하고, 그 내부에서도 기술, 유통 및 분배를 장악한 집단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권력을 더욱 확대하는 기반이 되었다(이남규, 1993; 이성주, 1997; 이남규, 2002; 손명조, 2012; 한국문화재조사연구기관협회, 2012).
번역주 083)
가 있는데, 그 모습이 축(筑)과 같았으며, 그것을 연주함에 또한 가락이 있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돌로 그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하고자 하였다주 084 큰 고: 초기 가야금으로 추정되며, 그 모양은 광주시 신창동이나 경북 경산시 임당동 유적에서 출토된 악기와 비슷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비파 모양의 현악기는 광주 신창동유적에서 반파된 채 출토되었다. 머리 부분에 현을 거는 작은 구멍이 있고, 삼각형의 꼬리 부분에는 두 개의 촉구멍을 뚫어 현의 고정부를 결합하도록 만들었다. 남아 있는 구멍은 6개지만, 원래는 10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벚나무로 만들었고, 내부는 전체적으로 오목하게 파내었으나 중앙부가 솟아 있다. 이는 받침의 이동을 통해 음을 조절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닥은 전체를 고르게 깎아 평탄하게 만들었다. 복원된 크기는 길이 77.2cm, 너비 28.2cm이다. 비슷한 형태의 흑칠판 현악기가 경산 임당 A-Ⅰ-121호 목관묘에서 출토되었고, 창원 다호리 11호, 15호, 17호 목관묘 출토의 장방형 흑칠판도 같은 형태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건무, 2012; 조현종, 2014).
번역주 084)
. 지금 진한인들은 모두 납작 머리[褊頭]주 085 어린아이가 ~ 하였다: 편두의 풍습이 유행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주로 특수한 신분의 여성들이 편두를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의 독특한 미의식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原註〕 범엽의 『후한서』에 이르기를, “아이가 태어나면 그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려고 모두 돌로 누른다.”고 하였다. 『滿洲源流考』 권2에서 “(무릇) 돌로 머리를 누르는 것은 壯夫도 감당하지 못할 일이니, 갓 태어난 어린 아이에게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실로 人情上 있을 수 없는 일이다. 滿洲의 옛 풍속에서는 아이가 태어나 수 일이 지나면 臥具에 두어 아이가 위를 바라보게 하여 눕히니, 오래 지나면 腦骨이 저절로 평평해져 머리 형태가 납작한 것처럼 된다. 이는 익숙해져 저절로 그리된 것이라 족히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니며, 진한 또한 이와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漢人들은 아이를 낳으면 늘 옆으로 눕히니, 오래 지나면 좌우가 모지고 평평해져 머리 형태가 좁은 것처럼 된다. 몽골인들은 아이를 낳으면 가죽 띠로 나무판에다 묶어 땅에 세워두니, 장성하면 미세하게 股形의 키 모양이 된다. 만약 범위종(범엽)의 말대로라면, 漢人과 몽골 또한 모두 돌로 눌러서 그 머리를 좁게 만들거나 股形의 키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것인가? 대략 三韓의 命名에 관해서는 史書에서 차례로 馬韓, 辰韓, 弁韓(弁辰이라고도 한다)을 열거하였으나 韓이라 칭한 뜻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陳壽의 魏志에서는 직접 韓地, 韓王이라 하였고 魚豢의 『魏略』에서는 더욱이 조선왕 準이 거짓으로 韓氏 姓을 칭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附會함이 매우 심하였다. 대개 만주어와 몽골어에서는 모두 君長을 汗이라고 일컫는다. 韓은 汗과 더불어 그 음이 서로 뒤섞였으니, 史書에 실린 三韓의 각 수십 국은 당시에 필시 三汗(세 명의 汗)이 있어 이를 나누어 다스렸을 것이다. (그러나) 史家들은 汗이 君을 뜻하는 것임을 모른데다가 용렬하고 비루하기까지 하고, 심지어 韓을 族姓이라고 잘못하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장님이) 쟁반을 두드리고 피리를 어루만져보고는 해(日)에 대하여 깨우침이 있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있겠는가? 또한 中外의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억지로 詮解(해석)할 수 없는 것이 형세로다. 지금 무릇 위에서 하늘이 밝게 비추고 사람들은 모두 이를 우러르는데, 그러나 漢語에서는 이를 天이라 하고 만주어에서는 이를 阿上喀이라고 하고, 몽골어에서는 이를 騰格哩라고 하고, 西番語에서는 이를 那木喀이라고 하고, 回語에서는 이를 阿思滿이라고 한다. 저 언어로써 이 언어를 말하면, 서로 알아들을 수 없으나 사람이 공경하는 바와 하늘이 주는 감흥이 서로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만약 필히 일일이 漢字로 끌어 붙여 억측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불가능하겠는가? 무릇 韓과 汗은 음이 유사하나 뜻이 다른데도 잘못하여 왜곡하였음을 오히려 알 수 있다. 돌로 머리를 눌렀다는 오류의 경우에도 실로 이치에 어긋나므로 가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原註〕 범엽의 『후한서』에 이르기를, “아이가 태어나면 그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려고 모두 돌로 누른다.”고 하였다. 『滿洲源流考』 권2에서 “(무릇) 돌로 머리를 누르는 것은 壯夫도 감당하지 못할 일이니, 갓 태어난 어린 아이에게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실로 人情上 있을 수 없는 일이다. 滿洲의 옛 풍속에서는 아이가 태어나 수 일이 지나면 臥具에 두어 아이가 위를 바라보게 하여 눕히니, 오래 지나면 腦骨이 저절로 평평해져 머리 형태가 납작한 것처럼 된다. 이는 익숙해져 저절로 그리된 것이라 족히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니며, 진한 또한 이와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漢人들은 아이를 낳으면 늘 옆으로 눕히니, 오래 지나면 좌우가 모지고 평평해져 머리 형태가 좁은 것처럼 된다. 몽골인들은 아이를 낳으면 가죽 띠로 나무판에다 묶어 땅에 세워두니, 장성하면 미세하게 股形의 키 모양이 된다. 만약 범위종(범엽)의 말대로라면, 漢人과 몽골 또한 모두 돌로 눌러서 그 머리를 좁게 만들거나 股形의 키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것인가? 대략 三韓의 命名에 관해서는 史書에서 차례로 馬韓, 辰韓, 弁韓(弁辰이라고도 한다)을 열거하였으나 韓이라 칭한 뜻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陳壽의 魏志에서는 직접 韓地, 韓王이라 하였고 魚豢의 『魏略』에서는 더욱이 조선왕 準이 거짓으로 韓氏 姓을 칭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附會함이 매우 심하였다. 대개 만주어와 몽골어에서는 모두 君長을 汗이라고 일컫는다. 韓은 汗과 더불어 그 음이 서로 뒤섞였으니, 史書에 실린 三韓의 각 수십 국은 당시에 필시 三汗(세 명의 汗)이 있어 이를 나누어 다스렸을 것이다. (그러나) 史家들은 汗이 君을 뜻하는 것임을 모른데다가 용렬하고 비루하기까지 하고, 심지어 韓을 族姓이라고 잘못하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장님이) 쟁반을 두드리고 피리를 어루만져보고는 해(日)에 대하여 깨우침이 있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있겠는가? 또한 中外의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억지로 詮解(해석)할 수 없는 것이 형세로다. 지금 무릇 위에서 하늘이 밝게 비추고 사람들은 모두 이를 우러르는데, 그러나 漢語에서는 이를 天이라 하고 만주어에서는 이를 阿上喀이라고 하고, 몽골어에서는 이를 騰格哩라고 하고, 西番語에서는 이를 那木喀이라고 하고, 回語에서는 이를 阿思滿이라고 한다. 저 언어로써 이 언어를 말하면, 서로 알아들을 수 없으나 사람이 공경하는 바와 하늘이 주는 감흥이 서로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만약 필히 일일이 漢字로 끌어 붙여 억측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불가능하겠는가? 무릇 韓과 汗은 음이 유사하나 뜻이 다른데도 잘못하여 왜곡하였음을 오히려 알 수 있다. 돌로 머리를 눌렀다는 오류의 경우에도 실로 이치에 어긋나므로 가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번역주 085)
이다. 왜와 가까운 곳의 남녀는 또한 문신을 하였다. 보전에 능숙하며, 병장기는 마한과 같았다주 086 납작 머리: 4세기 이전의 삼한 시기에 해당하는 편두인골은 아직까지 발견된 예가 없다. 다만 김해 예안리 고분의 4세기 목곽묘에서 편두인골 10례가 발굴되었다. 김해 예안리 유적은 고김해만에 연한 사주 위에 형성된 유적으로 신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패총과 무덤 등이 섞여 있어 인골이 양호하게 남아 있었다. 편두인골은 85호, 99호, 100호, 106호, 131호, 132호, 137호, 138호, 141호, 150호 목곽묘에서 확인되었는데, 모두 4세기에 해당한다. 그중 131호와 150호는 장년의 남자이고, 141호는 성별미상인 소아인골이었고, 그 외의 나머지 7례는 대체로 성인의 여성인골이었다. 이 편두습속이 진한인의 특징적인 습속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예안리 유적은 변한의 영역에 해당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진한 지역에서는 편두인골이 확인된 바 없어 당시 진한인과 변진이 섞여 산다고 기록한 내용을 반영한 것이거나 진한인과의 혼인관계를 나타내는 실증자료일 것으로 판단된다. 편두인골은 연해주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도 확인된 바 있고, 보르네오나 하와이의 원주민에서는 근세까지 시행되었다 한다(小片丘彦 외, 1988; 김정학, 1990; 부산대학교박물관, 1993).
번역주 086)
. 그 풍속에 길가는 사람들이 서로 마주치면, 모두 멈추어서주 087 길을 양보하였다. 병장기는 마한과 같았다: 변한과 진한의 병장기는 劍·刀·鉾·鏃·戈 등이 있다. 기원전 1세기부터 철검이 출현하여 청동제 단검과 함께 사용되는데, 청동제 단검과 크기가 같고, 칼집과 자루 등의 부속구도 청동단검과 같다. 원삼국시대 후기(2세기 중엽 이후)에는 장검으로 대체된다. 도(刀)는 자루 끝을 둥근 고리형태로 만든 環頭刀와 나무 또는 뼈로 자루를 만든 것으로 구분된다. 청동제도 일부 있지만 수입품일 가능성이 크고, 철제가 보편적이다. 크기에 따라 刀子와 小刀, 大刀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환두소도는 삼각형점토대토기와 동반하여 출토되어 출현시기가 이르다. 환두소도는 削刀로 사용되었다는 연구결과도 있지만, 삭도나 공구로 보기에는 길이가 다소 긴 것도 있다. 경주 사라리 130호 출토 철도는 나무자루의 바깥에 청동금구로 씌워 고정과 장식을 겸하였다. 원삼국시대 후기에는 環頭大刀가 출현하여 유행한다. 鉾는 청동제와 철제로 구분된다. 변한과 진한 지역의 청동제 모는 장대화하면서 투겁에 고리와 돌대가 있다. 여러 조의 혈구가 형성되거나 장식문양이 가미되기도 한다. 철제 모는 短身과 長身으로 구분할 수 있다. 원삼국 후기에는 身部가 매우 긴 대신에 銎部는 지나치게 짧거나 약하게 만들어서 실용성이 없는 것도 있고, 關部를 오리거나 철판을 끼워 고사리 모양을 장식한 것도 있다. 이러한 철모는 부장용 또는 의기용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戈는 銅戈가 많고, 鐵戈는 소수에 불과하다. 동과는 血溝에 다양한 장식문양이 가미되며, 일부는 광대한 형태를 띠기도 한다. 철과는 경주·영천·성주·밀양·창원 지역 등의 주요 목관묘 유적에서 제한적으로 확인되었다. 대부분 원삼국시대 전기에 확인되며, 이후에는 소멸한다. 鏃은 철촉이 대부분이다. 원삼국시대 전기에는 대부분이 無莖式이지만, 후기가 되면 무경촉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有莖鏃이 등장하며, 수량도 많아진다. 이상의 병장기는 과(戈)를 제외하면 주로 步戰에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이다. 청동과는 의기적 성격이 강하고 철제과는 거의 사용되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삼한시기에는 기마나 車戰用 무기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영남 지역과 같은 형태의 철기가 제주도나 마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어 변진의 철이 마한에 공급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김새봄, 2011; 우병철, 2012).
戈는 銅戈가 많고, 鐵戈는 소수에 불과하다. 동과는 血溝에 다양한 장식문양이 가미되며, 일부는 광대한 형태를 띠기도 한다. 철과는 경주·영천·성주·밀양·창원 지역 등의 주요 목관묘 유적에서 제한적으로 확인되었다. 대부분 원삼국시대 전기에 확인되며, 이후에는 소멸한다. 鏃은 철촉이 대부분이다. 원삼국시대 전기에는 대부분이 無莖式이지만, 후기가 되면 무경촉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有莖鏃이 등장하며, 수량도 많아진다. 이상의 병장기는 과(戈)를 제외하면 주로 步戰에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이다. 청동과는 의기적 성격이 강하고 철제과는 거의 사용되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삼한시기에는 기마나 車戰用 무기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영남 지역과 같은 형태의 철기가 제주도나 마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어 변진의 철이 마한에 공급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김새봄, 2011; 우병철, 2012).
변진은 진한과 더불어 뒤섞여 있었다주 088. 역시 성곽이 있었다. 의복과 거처는 진한과 같았고, 언어, 법과 풍속이 서로 비슷하였다. 귀신을 제사함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으니, 조왕신주 089을 차려놓은 것이 모두 입구의 서쪽에 있었다. 그 가운데 독로국은 왜와 경계를 접하였다주 090. 12국 역시 왕이 있었다주 091. 그 사람들의 형체가 모두 컸으며, 의복이 깨끗하였고, 긴 머리였다. 또한 폭이 넓은 고운 베를 짰다. 법과 풍속이 매우 엄격하였다.
평하여 말한다. “『사기』·『한서』에서는 조선과 양월을 기록하였고, 동경(東京) 시대에는 서강을 찬록하였다. 위나라 때 흉노가 마침내 쇠약해지자, 다시 오환과 선비가 나타났다. 이어 동이에 이르러서는 사역이 항시 통하여 사건에 따라 기술하였으니 어찌 범상한 일이라 하겠는가.”
- 번역주 001)
-
번역주 002)
한국에 흘러 들어갔다: 한강 유역과 이북의 경기, 강원도 지역에는 기원전부터 낙랑의 영향을 받아 한식유물이나 무덤이 확인되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이 가평 달전리, 가평 대성리, 인천 운북동유적을 들 수 있다. 가평 달전리의 목곽묘와 목관묘(토광묘)는 낙랑 지역의 무덤 형태와 유사하고, 화분형토기와 鐵戟·灰陶 등 낙랑유물을 부장하였다. 가평 대성리유적의 수혈에서는 낙랑산으로 추정되는 화분형토기가, 인천 운북동유적에서는 낙랑토기와 함께 철경동촉, 오수전, 철기 등이 출토되었다. 그 외 북한강 유역의 일부유적에서도 鐵莖銅鏃이나 盆形土器 등이 출토되기도 한다. 이들 유적은 대체로 기원전 1세기부터 1세기에 해당하며, 낙랑의 주민이 이주하였거나 교류를 통해 문물이 이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부터 1세기까지의 낙랑계 문물이 출토되는 유적의 수는 적은 편이고, 2세기 이후가 되면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즉, 2세기 이후에는 낙랑계의 철기·청동기·토기·유리 등이 이입되기도 하지만, 그 기술적 영향을 받아 재지에서 만든 토기와 기와 등도 늘어난다. 특히 화성 기안리유적에서 확인된 제철유적과 제도술은 낙랑의 주민 이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강원도와 경기북부에서 확인되는 凸자형과 呂자형의 주거지로 이루어진 취락도 2세기 이후에 급격히 증대되는 양상을 보인다. 변한과 진한도 2세기 중엽 이후에는 대형목곽묘가 조성되고, 무덤에 대량의 토기와 철기를 부장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2세기 이후의 변화양상은 낙랑 유이민의 이주와 한과 예가 급격히 성장한 상황을 물질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김무중, 2002;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2012).
- 번역주 003)
- 번역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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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5)
〔原註〕 兩漢志(『한서』의 「지리지」와 『후한서』의 「군국지」)에 樂浪郡의 屯有縣이라고 전한다. 李兆洛이 말하기를, “지금의 조선 平壤城 남쪽이다.”고 하였다. 丁謙이 말하기를, “帶方郡의 治所가 어디에 있는가에 관해서 예전 사람들이 모두 언급하지 않았다.” 고 하였다. 漢書 地理志에 낙랑군 含資縣에 帶水가 있어 서쪽으로 흐르다가 대방(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전한다. 경기도 북쪽 지역을 살펴보면, 臨津江이 있어 江原道 伊川郡 북쪽에서 發源해 북으로 開城에 이르고, (거기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니 딱 樂浪의 남쪽이다. 다시 그 남쪽이 바로 百濟의 경역이다. 이런 형세로 헤아려볼 때 (임진강이) 바로 한나라 때의 帶水일 것이고 그러한즉 伊川郡이 한나라 때의 含資縣이라고 보인다. 辰韓의 渠帥가 먼저 함자(현)에 이르러 항복했으니, 가히 함자(현)가 실제로 辰韓에서 樂浪에 이르는 孔道(要路)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伊川郡이 평양의 동남쪽에 위치하니, 그 情形이 매우 잘 들어맞는다. 이로써 보면 임진강이 개성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므로 (개성이) 대방군 땅(대방군 치소인 대방현)이 있던 곳은 아니라, 지금 開城郡을 帶方으로 비정하니 어쩌면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은 듯하다.
- 번역주 006)
- 번역주 007)
- 번역주 008)
- 번역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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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주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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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16)
신분고한이 ~ 공격하였다: 이 부분은 판본에 따라 字句가 달라진다. 즉 ‘臣幘沽韓忿’에 대해 소흥본·소희본·백납본은 ‘臣幘沾韓忿’이라 하였고, 남감본·급고각본·무영전본은 ‘臣智激韓忿’이라 쓰고 있다. 전자의 자구를 따르는 논자는 臣幘沽韓을 곧 臣濆沽國으로 보아 기리영을 공격한 주체가 마한 소국의 하나로서 경기도 북부지방에 위치하였던 臣濆沽國으로 이해한다(윤선태, 2001). 반면, 후자의 자구를 취하는 경우에는 기리영을 공격한 신지(臣智)에 대하여 백제 고이왕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36; 1959; 천관우, 1976; 1989; 이기동, 1990; 이기백, 1996; 정재윤, 2001), 마한 목지국의 진왕(辰王)으로 보는 견해(노중국, 1987) 등이 있다. 특히 고이왕으로 보는 견해는 “(246년) 가을 8월에 魏나라의 幽州刺史 毋丘儉이 樂浪太守 劉茂, 朔方太守(帶方太守) 王遵(弓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왕이 이 틈을 타서 左將 眞忠을 보내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유무가 이를 듣고 분노하자, 왕이 침략을 받을까 염려하여 그 사람들을 돌려주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제2 고이왕 13년조)라는 기사를 근거로 하고 있다. 신지나 신분고국이 격분한 이유는 중국 군현과 마한(또는 백제), 신분고국 등이 진한 지역과의 교역을 둘러싸고 분쟁을 일으킨 것에서 찾고 있다(武田幸男, 1990; 윤용구, 1999; 임기환, 2000; 윤선태, 2001). 기리영은 옛 황해도 평산군 인산면 기린리로 추정하나(이병도, 1936)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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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17)
〔原註〕 丁謙이 말하기를, “百濟가 비록 馬韓을 멸하였으나 마한 중에는 여전히 12개의 작은 部가 있어 韓王의 칭호를 세습하였다.”고 하였다. 傳紀(『삼국지』, 「위서」, 「동이전」 기사)에서 桓帝, 靈帝 말기에 韓, 濊가 강성해졌고, 建安 연간 뒤에 倭, 韓이 帶方에 복속하였으며, 魏나라 明帝 때에 이르러 二郡이 마침내 韓을 멸하였다고 하였으나, 이는 모두 마한인이 自立한 작은 部를 가리키는 것이지 三韓의 전체 영역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三韓이 예전에는 모두 토착민들의 흩어진 여러 部가 세력이 나뉘고 힘이 미약하였으니, 이 때문에 樂浪(郡)이 이들을 기미정책으로 복속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百濟와 新羅가 發興함에 미쳐, 땅이 넓고 군대가 강하여 족히 고구려와 鼎立할 정도였고, 단언컨대 (중국의) 군현이 능히 제어할 수 있는 바가 결코 아니었다. 어찌 당시의 중국이 끝내 듣지도 묻지도 않고, 막연히 해두며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단 말인가? 百濟는 본래 馬韓 列國 중의 하나이고, 新羅는 弁辰 列國 중의 하나로서 비록 겸병하여 저절로 커졌으나 어찌 여전히 삼한으로 인식하여 특별히 구분하지 않았는가? 아, 疏漏함이 매우 극심하도다. 어찌 괴이하게도 晉書, 후한서가 모두 그 오류를 답습하며, 이를 깨닫지 못했는가?
- 번역주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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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19)
초가지붕에 ~ 위에 있다: 이 부분은 움집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마한의 주거지는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강 유역에서는 주로 출입구가 있는 呂字形 또는 凸字形이 주류를 이루지만, 충청도와 전라도의 서해안 지역은 네 모서리에 기둥을 세운 방형이 많다. 그러나 전남 동부 지역은 원형이 대부분이다. 마을은 주로 낮은 구릉이나 평지상에 위치하는데, 대전 용계동유적의 경우처럼 350여 동의 집자리가 있는 대규모 마을도 있다. 집의 내부에는 한쪽 벽면에 부뚜막을 설치하거나 ‘ㄱ’자상의 난방시설을 갖춘 것도 있다. 또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서는 특징적인 穴居시설이 확인되었는데, 일부에서는 土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공주 장선리유적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주거지는 지하에 굴과 같은 형태로 방을 만들었는데, 1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것과 여러 개의 방이 통로로 연결된 형태가 있다. 일부에서는 불을 피웠거나 가구시설도 확인되어 실제 주거용도로 사용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주거지가 보편적인 주거지라고 보기는 힘들고, 일반적인 주거지는 방형의 四柱式 주거지였다고 보는 관점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문헌기록도 사주식의 수혈주거지에 벽면을 흙으로 만들고 지붕을 풀로 덮은 초가집을 표현한 내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이훈·강종원, 2001; 성정용, 2009).
〔原註〕 문(戶)이 위에 있는 것은 혹시 옛날의 움(窖)의 자취가 아닌가 한다. -
번역주 020)
그 장례에 관을 사용하고 곽은 사용하지 않았다: 마한의 무덤은 木棺墓와 周溝墓, 墳丘墓로 대별할 수 있다.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 전후 시기까지는 주로 목관묘가 사용되었다. 목관묘는 목관의 외부와 상부에 적석시설을 한 積石木棺墓와 흙으로 채운 土壙木棺墓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 시기의 주요 무덤으로는 완주 갈동, 덕동, 신풍리, 익산 신동리, 장수 남양리, 함평 초포리유적 등이 있다. 기원 전후 시기부터 3세기까지는 주구묘가 특징적이다. 주구묘는 구릉의 사면에 위치하면서 경사면의 위쪽에 눈썹모양 또는 ‘ㄷ’자상의 도랑을 돌린 것과 평탄한 구릉 위나 평지에 위치하면서 사방에 방형·원형·장방형의 도랑을 돌린 형태가 있다. 전자는 천안 청당동유적, 후자는 보령 관창리유적이 대표적이다. 매장주체부는 토광(목관묘, 목곽묘)이 기본이지만, 옹관묘가 배장되기도 한다. 주구묘는 경기에서 전남 서해안까지 매우 넓게 분포하지만, 지역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가 있기도 하다. 4세기 이후에는 분구묘가 나타나는데, 초기에는 부정형을 이루다가 점차 방대형 또는 방형이나 원형의 형태를 갖추어 간다. 분구묘의 매장주체부는 대형옹관묘가 주체를 이루는데, 하나의 분구 내에 다수의 옹관이 안치된다. 일부는 토광과 공존하기도 한다. 익산 율동리, 군산 산월리, 완주 상운리유적이 대표적이다. 마한의 주구묘도 매장주체부를 보면 진·변한과 마찬가지로 2세기 이전에는 목관묘가 주로 사용되다가 이후에는 목곽묘로 변화한다. 다만 棺槨을 갖추거나 異穴合葬이 이루어져 낙랑 지역의 묘제와 유사한 면이 있다. 진·변한 지역도 2세기 이전까지는 목관묘가 유행하다가 이후 목곽묘로 변화하는데, 마한 지역과 달리 주구가 없는 경우가 많다. 또 목곽묘에는 관이 없는 경우가 많고, 합장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 차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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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21)
소나 말을 ~ 써버렸다: 마한 영역에서는 거의 마구가 출토되지 않고 있다. 충주 금릉동과 아산 명암리 밖지므레 무덤에서 재갈이 출토되긴 하였으나 3세기 무렵으로 시기가 늦은 편이다. 김포 운양동에서도 철봉을 꼬아 사슬모양으로 만든 재갈로 추정되는 철기가 출토되었으나 당시 낙랑이나 중국, 진·변한 지역에서 출토되는 일반적인 재갈과는 형태적인 차이가 있다. 또 청주 봉명동과 청원 송대리, 오산 세교유적에서 청동제 말방울이 출토된 정도이다. 마형대구도 천안 청당동, 아산 갈매리, 연기 응암리, 청원 송대리, 청주 봉명동, 연기 응암리 가마골 유적 등 아산·천안·청주·충주·연기 일대를 중심으로 출토되기는 하지만, 역시 시기가 2~3세기 무렵으로 영남 지역에 비해 시기가 늦은 편이다(박장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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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22)
구슬을 재보로 여겨서: 초기철기시대에는 천하석제 곡옥과 함께 유리로 관옥과 고리, 작은 환옥 등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부여 합송리와 장수 남양리에서는 관옥이, 완주 갈동유적에서는 고리, 신풍유적에서는 고리와 관옥, 소형 환옥 등의 유리제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이들은 기원전 2세기 무렵으로 편년되는 것으로서 중국에서 수입된 납-바륨유리이다. 원삼국시대가 되면, 구슬의 재질과 모양이 다양해진다. 유리는 납 대신 포타쉬와 소다가 주성분인 유리로 변화하고, 한반도에서 직접 구슬로 제작했다. 유리구슬을 만든 주형(틀)은 해남 군곡리, 광주 선암동, 익산 송학동, 서울 풍납토성 유적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유리는 관옥과 환옥·곡옥·다면옥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었고, 색상도 남색·초록색·적갈색·흑색 등 다양하다. 유리 이외에도 수정·마노·호박 등의 광물질로 만든 구슬도 유행하였다. 그런데 마한 지역에서는 적갈색 계열의 구슬을 선호하였고, 진·변한 지역에서는 수정제 구슬이 유행한 특성도 있다. 원삼국시대 후기에는 금박유리옥이 출토되기도 하는데, 동남아시아에서 제작된 것이 낙랑이나 대방을 거쳐 수입된 것으로 추정된다(김미령·김승옥, 2013; 양아림,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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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23)
금은이나 비단과 수를 진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금제품은 김포시 운양동에서 출토된 3점의 이식이 전부이다. 금제 이식은 운양동 1-11지점 12호 주구묘에서 1점, 2-9지점 6구역 1호 주구묘에서 2점이 출토되었다. 이들은 1매의 금판을 오려 위쪽은 나선형으로 감고, 아래는 부채꼴모양으로 양끈을 구부려서 만들었다. 금의 순도는 18K 이상이다. 유사한 형태가 중국 길림성 유수 노하심유적과 운봉댐수몰지구 석호(石湖) 왕팔발자묘군(王八脖子墓群)에서 출토된 바 있어, 부여 또는 고구려 지역에서 제작된 완제품이 수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유구는 2~3세기에 해당한다. 그 외에 금박유리가 있는데, 완주 상운리, 아산 명암리 밖지므레, 용인 상갈동, 화성 화산동, 충주 문성리, 천안 청당동, 천안 두정동, 고창 남산리 등지에서 출토된 바 있다(이한상, 2013; 김미령·김승옥, 2013).
- 번역주 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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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25)
가죽으로 만든 교답(蹻蹋)을 신었다: 고대의 신발은 재질에 따라 짚신·가죽신·나막신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가죽신은 평양의 채협총과 석암리 201호, 205호에서 출토된 바 있는데, 가죽에 옻칠을 하여 만든 것이다. 이와 비슷한 형태가 창원 다호리 19호 무덤에서 출토된 바 있다. 김해 대성동의 가야고분에서는 단화모양의 토우장식이 붙은 기대편이 출토된 바 있어 삼한시기에 가죽신도 유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가장 일반적인 신발은 짚신이었을 것이다. 『후한서』에는 마한인들이 草履를 신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물자료가 군산 내흥동의 원삼국시대 수혈유구에서 출토된 바 있다. 삼국시대 이후의 자료로는 부여 궁남지, 관북리, 왕궁리, 경주 황남동 등지에서 발굴된 바 있고, 짚신모양의 토기도 부산 복천동 고분군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다. 또 나무로 만든 일본의 게다(下駄)모양의 신발도 경산 임당동 저습지, 부산 가동유적, 아산 갈매리 유적 등 삼국시대 유적에서 다수 출토되었다. 이 신발은 높은 굽을 가진 납작한 나무판에 구멍을 내고 끈으로 엮어 신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蹻蹋은 이러한 형태의 신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복천박물관, 2010).
- 번역주 026)
- 번역주 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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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28)
천군: 삼한의 각 소국에는 정치적 지배자인 국읍의 主帥와 더불어 전문적으로 하늘의 제사를 담당하는 司祭가 있었는데, 이를 天君이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초기 사회에서는 祭政一致가 보편적인 현상이었으나 사회가 분화되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지배자와 사제가 임무를 나누기 때문에 전문적인 사제가 천군이 되었던 것이다. 역사의 발전 단계에서 초기 사제가 지도자로 등장하는 사례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檀君王儉에서 檀君은 몽골어와 투르크어에서 하늘과 그 하늘이 신격화된 천신을 가리키는 용어를 가리키는 텡그리, 또는 조선시대에 무당을 가리키는 당골을 한문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王儉은 정치적인 군장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단군왕검’을 종교와 정치가 일치된, 즉 제정일치사회의 군장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편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왕호인 次次雄 혹은 慈充이 바로 巫, 사제였다고 전하고 있다. 마한에서 천군이 존재하였다는 것에서 이미 정치적으로 왕, 또는 臣智 같은 지도자가 등장하였기 때문에 제정이 분리된 사회였음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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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29)
소도: 각 소국에 別邑이 존재하였고, 여기서 天君이 하늘에 대하여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신성한 별읍을 蘇塗라고 불렀다. 소도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는 소도가 경계표시라든가, 또는 성황당과 관련된 것이라고 보기도 하나, 신전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마도 각 소국마다 소도가 존재하여 농경사회의 여러 제의를 수행한 것으로 이해된다(이병도, 1976; 문창로, 2013). 한편 소도는 청동기문화기의 소산으로 철기문화의 기반을 갖는 부족국가에 대항하던 성격을 가졌으며, 철기문화를 가진 이주민과 청동기문화의 토착민들 사이에서 예견되는 갈등과 대립을 조절 발산시켜주는 완충적 역할을 수행하였다(김철준, 1969; 1990)고 보기도 한다.
- 번역주 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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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31)
방울과 북을 매어 달고 귀신을 섬겼다: 소도에서는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겼다고 이해하여 오늘날 솟대의 기원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땅을 파고 큰 기둥을 세운 입대목(立大木) 유구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다. 진안 여의곡 1호 수혈, 김해 율하리 B-14수혈, 울산 덕신리 572-6유적의 경우 깊이 1m 내외의 구덩이를 2단으로 파고 기둥을 세운 후 돌과 흙을 채워 기둥을 지지토록 하였다. 이들은 청동기시대의 무덤유적 주변에서 발견하였으며, 입석과 함께 솟대도 청동기시대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다만, 청동방울은 대전 괴정동, 부여 합송리 등의 한국식동검문화기에 처음으로 나타나 유행하며, 주로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식동검문화기의 청동의기는 사용 흔적이 있는 경우도 있어 실제로 제사장이 사용하다가 무덤에 부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광주 신창동유적에서도 토제방울과 동탁형토제품, 방울의 설(舌), 토제북, 현악기, 찰음(擦音)악기, 조형목기 등과 함께 발굴되었다. 이러한 유물을 소도에서 이루어진 농경제사 의례의 흔적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이종철, 2014; 조현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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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39)
또한 주호가 있는데 ~ 사고팔았다: 제주도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석기나 토기 등의 내륙문물이 이입되었고,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에는 청동기와 철기, 토기 등의 내륙문물과 유리, 鐵莖銅鏃, 동전, 동경 등의 한식문물도 다수 이입되었다. 내륙계 문물 중의 동검이나 정문경(精文鏡) 등은 서남부 지역에서 이입된 것이지만, 철기는 영남 지역에서 입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제주도에 살았던 사람들은 육지 지역과의 빈번한 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화와 필요한 물자를 조달해 온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한 활동의 증거는 남해안 도서 지역에서도 단편적으로 발견된다. 즉, 사천 방지리, 늑도, 광주 신창동유적 등지에서는 토기의 태토에 현무암질 모래가 포함된 대형토기들이 발견되었다. 다른 유적의 토기들은 대체로 파편이어서 형태를 알 수 없지만, 사천 늑도출토품 중에는 완전한 형태로 복원된 것도 있다. 이 토기는 높이 120cm, 구경 120cm로서 태토에는 현무암질의 모래를 포함하고 있고, 삼양동식토기에 해당한다. 또 늑도유적에서는 현무암질 닻돌도 출토되어 제주인들이 변진의 철을 입수하기 위해 남해안을 항해하면서 남겼던 증거라고 할 수 있다(이재현, 2008).
〔原註〕 『후한서(范書)』에서는 “乘船往來 貨巿韓中”이라고 기술하였다. - 번역주 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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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주 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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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49)
각각 거수가 있는데 ~ 읍차가 있다: 이 부분은 마한의 경우는 큰 나라의 지배자를 신지, 작은 나라의 지배자를 읍차라고 불렀으나, 진·변한의 경우는 소국의 크기에 따라 신지·험측·번예·살해·읍차 등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불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마한에 비하여 진·변한의 소국 지배자들을 다섯 등급으로 구분하였던 사실은 그들 소국들 자체 내에서 상호간의 서열이 매우 발달하였음을 말해주며, 아울러 이를 통하여 진·변한 소국들 사이에 연맹체 조직의 질서가 정연하게 자리 잡았음을 시사한다. 한편 진·변한 소국의 통합 시기가 늦어서 소국 지배자들의 개별성이 강하게 작용하고, 그럼으로써 주수(主帥)를 뜻하는 고유의 명칭이 장기간 잔존되었던 사실을 반영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이현혜, 1984). 이 밖에 험측 등을 독립된 소국이나 읍락의 지배자로 보지 않고, 신지를 정점으로 하여 편성된 통치체계의 하위 서열자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김정배, 1997).〔原註〕 宋本에서는 邑借라고 표기하였다. 『范書(후한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章懷太子는 注에서 “(이것들은) 모두 官名이다.”라고 하였다.
- 번역주 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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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51)
불사국: 『삼국사기』 지리지 양주조에 火王郡은 본래 比自火郡 또는 比斯伐이었다고 전한다. 진흥왕순수비 창녕비에는 비자벌(比子伐), 『일본서기』에는 比自㶱로 전하기도 하는데, 현재 경남 창녕의 옛 이름이다. 여기서 自와 子, 斯는 모두 사이시옷의 의미를 지니고, 벌이나 화는 모두 들(평야)을 가리킨다. 따라서 비자벌(화), 비사벌은 ‘빗벌’로 독음할 수 있다. 한편 마한의 소국 이름 가운데 ‘卑離’를 칭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들(평야)을 가리키는 夫里를 가리킨다고 이해되고 있다. 이에 따른다면, 비리=부리=불로 연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상정해볼 수 있고, 결국 불사국과 비자벌은 음이 상통한다고 이해하여도 좋을 것이다(鮎貝房之進, 1937; 양주동, 1975; 이병도, 1976). 이와 달리 불사국은 경북 안동시에 위치한 소국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76;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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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52)
변진미리미동국: 본서에서 변한 소국에 속하는 경우는 변진을 소국명 앞에 표기하였다. 오늘날 경남 밀양시의 옛 이름이 推火郡이다. 추화는 ‘밑벌(밑불)’로 독음할 수 있는데, ‘彌離’와 ‘밑(밀)’의 음이 상통한다. 종래에 이에 주목하여 미리미동국을 경남 밀양시에 위치한 변한 소국으로 추정하였다(이병도, 1976; 김태식, 1993). 한편 현재 밀양시 삼량진읍의 옛 이름이 密津縣이었는데, 밀진의 ‘밀’과 ‘미리’를 연결시켜 미리미동국을 삼량진읍으로 추정한 견해도 제기되었다(鮎貝房之進, 1937). 이밖에 미리미동국을 현재 경북 의성군 단밀면의 옛 이름이 武冬彌知縣이었던 사실과 연결시켜 미리미동국을 경북 예천군 용궁면 또는 상주시 함창면으로 비정한 견해도 있다(천관우, 1976; 1991).
- 번역주 053)
- 번역주 054)
- 번역주 055)
- 번역주 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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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주 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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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69)
변진구야국: 경남 김해시에 위치한 변한 소국으로서 후에 금관가야라고도 불렀다. 금관가야는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국으로 군림하다가 400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가야연맹의 지도력을 상실하고 세력이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532년에 구해왕이 신라에 항복하였다. 김해 지역에는 신석기시대부터 다수의 주민이 거주해왔으며, 청동기시대에는 대규모의 고인돌을 조성한 집단들이 김해의 여러 지역에 형성되어 있었다. 특히 김해 중심부에는 구산동·내동·대성동·서상동·회현동 등지에서 대형 고인돌과 석관묘 등이 확인되었다. 그중에서 구산동 A2-1호 고인돌은 장방형의 묘역을 가진 고인돌로서 상석의 무게가 350톤에 이르는 최대형 고인돌로 추정되고 있다. 초기철기시대에도 봉황동과 구산동의 구릉지를 중심으로 취락이 형성되었으며, 청동기와 왜계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일찍부터 대외교역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42년에 9干의 추대를 받아 가락국(구야국)을 세웠다고 전해지며. 이 시기에는 봉황동유적지를 중심으로 취락을 형성하였고, 대성동과 양동리·내덕리 등지에 목관묘를 조성하였다. 특히 양동리와 내덕리에서는 중국제 후한경과 왜계 청동유물 등의 외래유물과 철기, 청동기 등이 출토되어 활발한 대외교역의 양상을 알려주고 있다. 2세기 이후에는 양동리와 대성동유적을 중심으로 대형 목곽묘를 조성하였고, 한경과 수정제 장신구, 다량의 철제무기와 철정 등을 부장하고 있어 당시의 문화와 사회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까지의 발굴자료로 보면 3세기 중엽까지는 대성동과 양동리 세력이 거의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3세기 후엽부터 대성동 세력이 우위를 확보하여 구야국의 정치적 중심세력이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李永植, 1994; 백승충, 1995; 신경철, 1995; 홍보식, 2000; 김태식, 2002; 이재현, 2005; 박대재, 2006).
- 번역주 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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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71)
변진안야국: 경남 함안군 가야읍에 있었던 변한 소국으로서 후에 阿羅加耶라고도 불렸다. 『삼국사기』에는 阿尸良國, 阿那加耶, 阿羅國 등으로, 『삼국유사』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 『일본서기』에는 安羅, 阿羅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고학적 자료로는 함안군 도항리와 말산리유적에서 1~2세기대의 목관묘가 발굴되기는 하였으나 부장품이 탁월한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3세기대의 자료는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한 상태이고, 4~5세기대 이후가 되어서야 도항리·말산리의 구릉부에 대형의 목곽묘와 봉토분이 형성되었고, 묘의 규모나 부장품의 내용이 탁월하여 아라가야의 중심지임을 짐작케 한다(권주현, 1993; 김형곤, 1995; 이형기, 1999; 남재우, 2000; 김태식, 2002; 南在祐, 2003; 조영제, 2004; 김세기, 2012).
- 번역주 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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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73)
변진독로국: 부산광역시 동래구 일대에 위치하였던 변한 소국이다. 민락동과 수안동 일대에 형성된 동래패총은 2~3세기를 중심시기로 하는 생활유적으로 패총과 삼한시기의 야철지가 확인되었다. 패총에서는 다량의 토기와 동물뼈, 골각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그중에는 마한이나 왜계토기 등도 포함되어 있어 활발한 대외교역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덤유적은 복천동 지역에 형성되었는데, 1~2세기대에는 주로 평지와 구릉의 하단에 무덤을 조성하다가, 4세기 이후에는 구릉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상위계층의 무덤이 조성되었다. 온천동과 구서동, 노포동 등지에서도 삼한시기의 생활유적과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출토유물 중에는 울산이나 경주 지역과 밀접한 관련을 보여주는 것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탈해이사금이 동래의 거칠산국(居柒山國)을 복속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고고학적 자료를 보면 4~5세기까지도 여전히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유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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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74)
사로국: 후에 신라로 발전하였다. 경주 일대에는 신석기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거주하였다. 청동기시대에는 여러 지역에 취락을 형성하면서, 고인돌이나 암각화 등을 남겼다. 기원전 2세기 말 또는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는 철기와 청동기를 제작하였고, 대외교역을 통해 성장하였는데, 그러한 양상은 당시의 묘제인 목관묘에서 잘 나타난다. 목관묘에는 토기와 철기·칠기·청동기와 중국의 한에서 수입한 여러 위세품을 부장하였다. 특히 입실리와 죽동리·조양동·구정동·교동·사라리의 목관묘에서는 당시의 최고 위세품이라 할 수 있는 청동 무기와 장신구, 철기, 중국산 거울이나 동전, 방울 등 다량의 기물을 부장하였다. 이러한 위세품을 부장한 무덤은 당시 최고위 계층의 무덤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1세기까지는 특정한 촌락이나 세력이 주도적인 위치를 독점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2세기 이후에는 대형의 목곽묘를 조성하고, 황성동 일대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제철업이 발전했는데, 아직까지 당시 최고위계층의 무덤이라 할 수 있는 대형 목곽묘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4세기 이후에 해당하는 대형목곽묘가 월성로를 포함하는 인왕동과 황남동 일대에서 부분적으로 확인되었고, 5세기 이후에는 대형의 적석목곽분을 포함한 대규모의 고분군이 황남동과 인왕동, 황오동 일대에 조성되어 신라의 발전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최병현, 1992; 이현혜, 2008; 이희준, 2007; 이희준, 2011; 주보돈, 2003; 최병현, 2015; 김용성, 2015).
〔原註〕 斯盧는 곧 新羅이다. 곧 譯音이 와전된 것이다. -
번역주 075)
우중국: 보통 유행본에는 優中國으로 전하나 『翰苑』 雍氏註, 南藍本 및 天啓重刻本에는 優由國으로 전한다. 종래에 신라 명주 울진군의 본래 이름인 于珍也縣과 연결시켜 우중국을 경북 울진에 위치한 진한 소국으로 추정하였다(천관우, 1976). 한편 『삼국사기』 지리지 양주조에 密城郡의 영현 烏丘山縣이 본래 烏也山縣 또는 烏禮山縣이라고 불렀던 사실을 주목하여 우유국을 경북 청도군 청도읍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이병도, 1976). 『삼국사기』 열전 석우로조에 왜군이 신라를 치니, 첨해왕이 于柚村으로 出居하였다고 전하고, 진흥왕순수비 창녕비에 于抽란 지명이 나온다. 경북 울진군 영해면의 옛 지명이 우시군(于尸郡)이며, 신라 경덕왕 대에 有鄰郡으로 개칭하였다. 于尸에서 ‘尸’는 ‘ㄹ’ 또는 ‘ㅈ(ㅅ)’ 받침을 의미하므로 ‘于尸’는 ‘울’ 또는 ‘웆’으로 독음할 수 있다. 于抽의 경우 ‘우추’뿐만 아니라 ‘웇’으로도 독음할 수 있으므로 ‘于尸’의 독음 ‘울’ 또는 ‘웆’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주목한다면, 于柚村은 于尸郡, 즉 영덕군 영해면으로 비정할 수 있고, 나아가 優由國은 바로 영해면에 위치한 진한 소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전덕재, 2013).
〔原註〕 馮本에서는 中을 由라고 하였다. - 번역주 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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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77)
진왕은 스스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종래에 여기에 언급된 진왕을 진한왕=사로국왕이라고 이해하였던 경우도 있었다(천관우, 1976; 박대재, 2002). 그러나 앞의 마한조에서 언급된 진왕과 이를 동일한 실체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이러하였을 때 진왕은 항상 마한인으로서 삼았으며, 대대로 [마한인끼리] 서로 계승하였다는 의미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진왕은 마한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진·변한 24국 중에서 12국까지 대표하는 존재로서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노중국, 2002; 김태식, 1993; 권오영, 1996). 또한 진왕에게 속하였다는 12국에 대해서는, 이를 진한 12국으로 보는 견해(천관우, 1976)와 변한 12국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김태식, 1993), 마한조에서 목지국 신지의 이른바 ‘優呼’에 변한계의 안야국과 구야국 지배자의 칭호가 보이므로, 변한 12국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한편 진왕이 스스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는 사실은 목지국의 왕이 진왕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소국들의 합의가 필요하였다는 사실과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노중국,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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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78)
오곡과 벼를 심기에 알맞았다: 오곡에는 벼를 포함하는 것이 보통이나 여기서는 벼를 포함하지 않은 다섯 가지의 주요 곡물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오곡에 포함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신석기시대부터 소규모의 잡곡 농사가 이루어졌고, 조·기장·수수·벼·보리 등이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 그중 조와 기장은 재배종이 확실하지만, 나머지는 식물의 종이나 연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서서는 잡곡농사와 벼농사가 본격화되었고, 여러 생활유적에서 탄화된 곡식도 다량으로 확인되고 있다. 또한 진주 대평유적에서는 대규모의 밭유적이 확인되었고, 논도 울산 옥현, 논산 마전리 등의 여러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확인된 곡식은 쌀과 콩·팥·보리·밀·조·수수·기장 등이 있다. 철기가 사용된 삼한 시기에는 경작지가 확대되고, 농경생활도 더욱 발전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벼는 김해 부원동유적, 김해 회현리유적, 사천 늑도유적, 고성 동외동패총, 합천 영창리 27호 가마, 양산 평산리 9호 주거지, 상주 병성동유적, 경주 황성동 나-12, 단양 수양개 4호·8호 주거지, 부여 논티, 군산 관원리 11호 주거지, 전주 송천동유적 8호·11호 주거지, 김제 심포리유적, 광주 신창동, 보성 금평패총, 영암 신연리 1호 주거지, 해남 군곡리패총 등에서 출토된 바 있다. 밀은 단양 수양개유적, 보리와 콩은 단양 수양개와 양양 가평리유적, 팥은 철원 와수리, 단양 수양개, 양산 평산리 9호, 콩은 양양 가평리, 단양 수양개, 녹두는 단양 수양개 등에서 출토되었다. 특히 완주 용흥리유적에서는 쌀·밀·팥·조가, 단양 수양개유적에서는 보리·녹두·팥·콩이, 사천 늑도유적에서는 밀·보리·쌀이 함께 확인되었다(허문회 외, 2001; 복천박물관, 2005; 국립중앙박물관, 2006).
〔原註〕 宋本에는 ‘移’字가 없다. -
번역주 079)
큰 새의 깃털을 ~ 해서였다: 고대인들이 새를 하늘의 전령이라고 믿었고, 또 새가 영혼을 하늘로 실어다 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큰 새의 깃털을 무덤에 집어넣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고대사회에서 새는 태양신의 別態 또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자, 영혼의 운반자로 인식되었다. 변한과 진한 지역의 무덤에는 새나 태양을 상징하는 문양을 장식한 기물이 많다. 기원전 1세기부터 1세기까지의 목관묘에서는 새의 깃털을 사용해 만든 부채로써 주검을 덮은 경우가 확인되고 있다. 또 새의 형상을 장식한 검파두식도 여러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2~3세기의 목곽묘에서는 새 모양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태양을 상징하는 문양을 거울이나 銅泡·漆器·토기·철기 등에 장식하여 무덤에 부장하였고, 대형의 목곽묘를 조성하여 다량의 기물을 부장하였다. 이와 같은 성대한 장례와 厚葬의 습속은 死者의 昇天과 來世의 안녕을 바라는 조상숭배의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장례의례를 통해 다른 사람과의 차별과 결속을 도모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며, 사자의 지위를 계승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다. 변한과 진한 지역에서 대형의 무덤을 만들고, 대량의 기물을 부장하는 새로운 喪葬制度를 통해 철기와 토기 등의 기물을 대량으로 소비하게 만들었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생산과 유통을 장악한 엘리트계층은 한층 권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으며, 사회적 차별과 계층분화가 더욱 진행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권오영, 1999; 이재현, 2012).
- 번역주 080)
- 번역주 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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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82)
그것을 [낙랑과 대방의] 두 군에 공급하였다: 변·진한에서 철을 공급하고 대신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하였으며, 이를 예나 왜 등에 다시 수출하였다. 초기에 금관가야는 중개무역을 통하여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진한과 변한 지역의 철기문화는 낙랑군 설치 이전에 이미 어느 정도 전래되었지만 낙랑군이 설치된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영남 지역에서 확인된 전국계통의 철기는 주조철부와 호미 등을 들 수 있다. 즉, 경산 임당 FⅡ-34호 목관묘에서 출토된 주조철부는 공부(銎斧)에 2조의 돌대를 돌린 것으로 세죽리-연화보 유형의 대표적인 철기이다. 같은 형태의 주조철부 공부 파편이 사천 늑도유적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그리고 대구 팔달동과 울산 중대유적 등에서 출토된 장방형 공부를 가진 주조철부도 중국의 전국~전한 초기에 걸쳐 한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 지역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형태이다. 사다리모양의 철판에 구멍을 뚫은 호미도 중국 동북 지역의 전국~서한 초기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것과 같은 형태이다. 창원 다호리 62호 목관묘 출토품은 주조품이고, 밀양 교동 3호 목관묘와 경주 황성동 강변로 1호 옹관묘에서 출토된 것은 단조품이다. 이러한 전국 계통의 철기들은 영남 지역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해당하며, 기원전 2세기~1세기에 해당한다.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영남 지역에서는 철기가 본격적으로 생산되었다. 철기는 주로 무덤의 부장품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지만, 울산 달천유적에서는 採鑛遺構, 경주 황성동유적에서는 鍛冶遺構와 溶解·精鍊遺構가, 사천 늑도유적에서는 정련 또는 용해유구가 확인되었다. 기원전 1세기부터 1세기까지는 주로 단검과 창·화살촉·환두도 등의 무기류와 도끼·끌·조각칼·괭이·낫·따비 등의 농공구류, 재갈 등의 마구류가 주류를 이룬다. 전국시대 燕이나 漢의 철기문화를 고조선이나 낙랑을 통해 직접적으로 수용한 것도 있지만, 지역실정에 맞게 변형한 독창적인 것도 있다. 2세기 이후에는 장검과 환두대도, 철제보습 등의 새로운 철기도 등장하며, 무덤에 부장되는 철기의 양도 증대하였다. 특히 무덤에 부장되는 철기 중에는 검이나 재갈·鐵鉾·有刺利器·낫·도자 등에 고사리 모양의 문양을 장식하거나 철모 중에는 지나치게 크기를 강조하여 실용성이 없는 철기도 유행하는데, 이들은 부장용 또는 장송의례를 위해 제작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목곽묘가 일반화되면서 무덤의 부장품으로 소모되는 철기가 급증하였고, 진한과 변한에서 생산된 철이 낙랑과 대방, 마한과 예, 왜 등지에 수출되면서 대량적인 철 생산을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철 자원이 풍부한 김해와 경주의 구야국과 사로국이 성장하고, 그 내부에서도 기술, 유통 및 분배를 장악한 집단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권력을 더욱 확대하는 기반이 되었다(이남규, 1993; 이성주, 1997; 이남규, 2002; 손명조, 2012; 한국문화재조사연구기관협회, 2012). -
번역주 083)
큰 고: 초기 가야금으로 추정되며, 그 모양은 광주시 신창동이나 경북 경산시 임당동 유적에서 출토된 악기와 비슷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비파 모양의 현악기는 광주 신창동유적에서 반파된 채 출토되었다. 머리 부분에 현을 거는 작은 구멍이 있고, 삼각형의 꼬리 부분에는 두 개의 촉구멍을 뚫어 현의 고정부를 결합하도록 만들었다. 남아 있는 구멍은 6개지만, 원래는 10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벚나무로 만들었고, 내부는 전체적으로 오목하게 파내었으나 중앙부가 솟아 있다. 이는 받침의 이동을 통해 음을 조절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닥은 전체를 고르게 깎아 평탄하게 만들었다. 복원된 크기는 길이 77.2cm, 너비 28.2cm이다. 비슷한 형태의 흑칠판 현악기가 경산 임당 A-Ⅰ-121호 목관묘에서 출토되었고, 창원 다호리 11호, 15호, 17호 목관묘 출토의 장방형 흑칠판도 같은 형태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건무, 2012; 조현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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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84)
어린아이가 ~ 하였다: 편두의 풍습이 유행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주로 특수한 신분의 여성들이 편두를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의 독특한 미의식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原註〕 범엽의 『후한서』에 이르기를, “아이가 태어나면 그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려고 모두 돌로 누른다.”고 하였다. 『滿洲源流考』 권2에서 “(무릇) 돌로 머리를 누르는 것은 壯夫도 감당하지 못할 일이니, 갓 태어난 어린 아이에게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실로 人情上 있을 수 없는 일이다. 滿洲의 옛 풍속에서는 아이가 태어나 수 일이 지나면 臥具에 두어 아이가 위를 바라보게 하여 눕히니, 오래 지나면 腦骨이 저절로 평평해져 머리 형태가 납작한 것처럼 된다. 이는 익숙해져 저절로 그리된 것이라 족히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니며, 진한 또한 이와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漢人들은 아이를 낳으면 늘 옆으로 눕히니, 오래 지나면 좌우가 모지고 평평해져 머리 형태가 좁은 것처럼 된다. 몽골인들은 아이를 낳으면 가죽 띠로 나무판에다 묶어 땅에 세워두니, 장성하면 미세하게 股形의 키 모양이 된다. 만약 범위종(범엽)의 말대로라면, 漢人과 몽골 또한 모두 돌로 눌러서 그 머리를 좁게 만들거나 股形의 키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것인가? 대략 三韓의 命名에 관해서는 史書에서 차례로 馬韓, 辰韓, 弁韓(弁辰이라고도 한다)을 열거하였으나 韓이라 칭한 뜻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陳壽의 魏志에서는 직접 韓地, 韓王이라 하였고 魚豢의 『魏略』에서는 더욱이 조선왕 準이 거짓으로 韓氏 姓을 칭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附會함이 매우 심하였다. 대개 만주어와 몽골어에서는 모두 君長을 汗이라고 일컫는다. 韓은 汗과 더불어 그 음이 서로 뒤섞였으니, 史書에 실린 三韓의 각 수십 국은 당시에 필시 三汗(세 명의 汗)이 있어 이를 나누어 다스렸을 것이다. (그러나) 史家들은 汗이 君을 뜻하는 것임을 모른데다가 용렬하고 비루하기까지 하고, 심지어 韓을 族姓이라고 잘못하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장님이) 쟁반을 두드리고 피리를 어루만져보고는 해(日)에 대하여 깨우침이 있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있겠는가? 또한 中外의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억지로 詮解(해석)할 수 없는 것이 형세로다. 지금 무릇 위에서 하늘이 밝게 비추고 사람들은 모두 이를 우러르는데, 그러나 漢語에서는 이를 天이라 하고 만주어에서는 이를 阿上喀이라고 하고, 몽골어에서는 이를 騰格哩라고 하고, 西番語에서는 이를 那木喀이라고 하고, 回語에서는 이를 阿思滿이라고 한다. 저 언어로써 이 언어를 말하면, 서로 알아들을 수 없으나 사람이 공경하는 바와 하늘이 주는 감흥이 서로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만약 필히 일일이 漢字로 끌어 붙여 억측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불가능하겠는가? 무릇 韓과 汗은 음이 유사하나 뜻이 다른데도 잘못하여 왜곡하였음을 오히려 알 수 있다. 돌로 머리를 눌렀다는 오류의 경우에도 실로 이치에 어긋나므로 가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번역주 085)
납작 머리: 4세기 이전의 삼한 시기에 해당하는 편두인골은 아직까지 발견된 예가 없다. 다만 김해 예안리 고분의 4세기 목곽묘에서 편두인골 10례가 발굴되었다. 김해 예안리 유적은 고김해만에 연한 사주 위에 형성된 유적으로 신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패총과 무덤 등이 섞여 있어 인골이 양호하게 남아 있었다. 편두인골은 85호, 99호, 100호, 106호, 131호, 132호, 137호, 138호, 141호, 150호 목곽묘에서 확인되었는데, 모두 4세기에 해당한다. 그중 131호와 150호는 장년의 남자이고, 141호는 성별미상인 소아인골이었고, 그 외의 나머지 7례는 대체로 성인의 여성인골이었다. 이 편두습속이 진한인의 특징적인 습속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예안리 유적은 변한의 영역에 해당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진한 지역에서는 편두인골이 확인된 바 없어 당시 진한인과 변진이 섞여 산다고 기록한 내용을 반영한 것이거나 진한인과의 혼인관계를 나타내는 실증자료일 것으로 판단된다. 편두인골은 연해주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도 확인된 바 있고, 보르네오나 하와이의 원주민에서는 근세까지 시행되었다 한다(小片丘彦 외, 1988; 김정학, 1990; 부산대학교박물관,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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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86)
병장기는 마한과 같았다: 변한과 진한의 병장기는 劍·刀·鉾·鏃·戈 등이 있다. 기원전 1세기부터 철검이 출현하여 청동제 단검과 함께 사용되는데, 청동제 단검과 크기가 같고, 칼집과 자루 등의 부속구도 청동단검과 같다. 원삼국시대 후기(2세기 중엽 이후)에는 장검으로 대체된다. 도(刀)는 자루 끝을 둥근 고리형태로 만든 環頭刀와 나무 또는 뼈로 자루를 만든 것으로 구분된다. 청동제도 일부 있지만 수입품일 가능성이 크고, 철제가 보편적이다. 크기에 따라 刀子와 小刀, 大刀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환두소도는 삼각형점토대토기와 동반하여 출토되어 출현시기가 이르다. 환두소도는 削刀로 사용되었다는 연구결과도 있지만, 삭도나 공구로 보기에는 길이가 다소 긴 것도 있다. 경주 사라리 130호 출토 철도는 나무자루의 바깥에 청동금구로 씌워 고정과 장식을 겸하였다. 원삼국시대 후기에는 環頭大刀가 출현하여 유행한다. 鉾는 청동제와 철제로 구분된다. 변한과 진한 지역의 청동제 모는 장대화하면서 투겁에 고리와 돌대가 있다. 여러 조의 혈구가 형성되거나 장식문양이 가미되기도 한다. 철제 모는 短身과 長身으로 구분할 수 있다. 원삼국 후기에는 身部가 매우 긴 대신에 銎部는 지나치게 짧거나 약하게 만들어서 실용성이 없는 것도 있고, 關部를 오리거나 철판을 끼워 고사리 모양을 장식한 것도 있다. 이러한 철모는 부장용 또는 의기용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戈는 銅戈가 많고, 鐵戈는 소수에 불과하다. 동과는 血溝에 다양한 장식문양이 가미되며, 일부는 광대한 형태를 띠기도 한다. 철과는 경주·영천·성주·밀양·창원 지역 등의 주요 목관묘 유적에서 제한적으로 확인되었다. 대부분 원삼국시대 전기에 확인되며, 이후에는 소멸한다. 鏃은 철촉이 대부분이다. 원삼국시대 전기에는 대부분이 無莖式이지만, 후기가 되면 무경촉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有莖鏃이 등장하며, 수량도 많아진다. 이상의 병장기는 과(戈)를 제외하면 주로 步戰에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이다. 청동과는 의기적 성격이 강하고 철제과는 거의 사용되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삼한시기에는 기마나 車戰用 무기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영남 지역과 같은 형태의 철기가 제주도나 마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어 변진의 철이 마한에 공급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김새봄, 2011; 우병철, 2012). - 번역주 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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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주 089)
- 번역주 090)
- 번역주 0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