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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백제조신(百濟朝臣; 구다라노아오미)

백제조신(百濟朝臣; 구다라노아오미)
 백제국(百濟國) 도모왕(都慕王)의 30세손 혜왕(惠王)으로부터 나왔다.
 
【주석】
1. 백제조신(百濟朝臣)
백제조신의 성을 가진 최초의 인물은 백제조신족인(百濟朝臣足人)으로 『속일본기』 천평보자(天平寶字) 원년(757) 5월 정묘조에 종5위하 백제조신족인이 종5위상으로 승진한 기록이 나온다. 『속일본기』 천평승보(天平勝寶) 원년(749) 윤5월 갑진조에는 육오국(陸奧國)의 대연(大椽) 정6위상 여족인(餘足人)이 종5위하로 승진하고 있다. 백제조신족인과 여족인은 동일 인물이고, 여족인은 749년 윤5월 이후 757년 5월 이전의 어느 시기에 백제조신으로 개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속일본기』 천평보자(天平寶字) 2년(758) 6월 갑진조에 대재부의 음양사(陰陽師) 종6위하 여익인(余益人)과 조법화사판관(造法華寺判官) 종6위하 여동인(余東人) 등 4인이 백제조신(百濟朝臣)의 성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여족인의 형제일 것이다. 여익인은 『속일본기』 천평보자 8년(764) 동10월 경오조 등에 보인다. 『속일본후기』 승화(承和) 7년(840) 6월 병인조에는 비중개(備中介) 외종5위하 여하성(余河成), 우경대속(右京大屬) 정6위하 여복성(余福成) 등 3인에게 백제조신을 사성하였는데, 그들의 조상이 백제국 사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의 여씨 이외 일족에게 백제조신 성을 내린 것이다.
백제 왕족인 여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일본서기』 민달(敏達) 12년(583) 시세조에 보인다. 백제가 화(火) 지방의 위북국조(葦北國造) 아리사등(阿利斯登)의 아들 일라(日羅)를 왜국에 돌려보내면서 함께 파견한 인물로 여노(余怒, 余奴)가 있다. 이후 『일본서기』 황극(皇極) 2년(643) 시세조에 여풍(餘豐)이 나온다. 그는 『일본서기』 서명(舒明) 3년(631) 3월 경신삭조에서는 풍장(豐章)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백치(白雉) 원년(650) 2월 갑신조에는 백제군풍장(百濟君豐璋)으로, 제명(齊明) 6년(660) 동10월조, 천지천황(天智天皇) 칭제(稱制) 신유(661) 9월조, 천지 원년(662) 5월조와 12월 병술삭조, 천지 2년 6월조와 8월 기유조에서는 풍장(豐璋)으로 표기되고 있다. 풍장은 백제 의자왕의 아들로 641년에 왜국과 군사 동맹을 맺기 위한 특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663년 백강구전투에서 당과 신라의 연합군에 패배하여 백제 부흥 운동이 실패한 후에 고구려로 망명하였다가 당의 고구려 공격 시에 포로로 잡혀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일본서기』 제명(齊明) 원년(655) 시세조에 여의수(餘宜受)가 대사가 되어 100여 명의 사절단을 거느리고 왜국에 파견되었다. 그 후 제명 6년(660) 9월조에는 복신(福信)과 함께 백제 부흥 운동을 주도한 달솔 자진(自進)이 보인다. 그는 천지 2년(663) 9월 갑술조에는 여자신(余自信)으로 나온다. 백제 주류성이 함락할 당시 왜국으로 망명하였다. 그 후 669년에 근강국(近江國) 포생군(浦生郡)으로 이주하였고, 671년 정월에는 대금하(大錦下)의 관위를 받았다. 『신찬성씨록』 우경 제번(하)에 여자진의 후손이 고야조(高野造)로 개성한 기록이 보인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에는 백제조신을 받지 않은 여씨도 보인다. 양로(養老) 원년(717) 춘정월 을사조의 서위, 기사에서는 여진인(余眞人)이 정6위상에서 종5위하로 승진하고 있다. 여진인은 『등씨가전(藤氏家傳)』(하)에서 신귀(神龜) 연간(724~729)에 음양에 뛰어난 5명 중의 1명으로 나온다. 양로 5년(721) 춘정월 갑술조의 포상 기사에서는 정6위상 여진승(余秦勝)이 음양에 뛰어난 6명 중 1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조정에서는 산술에 뛰어난 3명, 음양에 뛰어난 6명, 의술에 뛰어난 4명, 토목 기술에 뛰어난 5명의 학자에게 각각 시(絁) 10필, 사(糸) 10구, 포(布) 20단, 초(鍬) 20구를 사여하였다. 음양은 천문, 역법, 점복 등을 가리키는데 여진인이나 여진승은 음양 관료였다. 양로 7년(723) 춘정월 병자조의 서위(敍位), 기사에서는 정6위상에서 종5위하로 승진하는 여인군(餘仁軍)이 보인다. 여인군은 『등씨가전』(하) 신귀 연간에 주금(呪禁)에 뛰어난 인물로 나온다. 천평(天平) 16년(744) 동10월 을미조에는 좌대신(左大臣) 귤제형(橘諸兄)의가령(家令)으로 정6위상 여의인(余義仁)을 외종5위하로 승진시킨 기록이 보인다.
『정창원문서』 에도 여씨의 인명이 보인다. 여족인(余足人, 天平 10년 4월 「上階官人歷名」, 『大日本古文書』 24-75), 여사매(余斯賣, 天平 5년 「右京計帳」,동 1-494), 여제도(余弟島, 天平 10년경 「官人歷名右京」, 동 24-85), 여을충(余乙虫, 天平 11년 4월 15일자 「寫經司啓」,동 2-164), 여광족(余廣足, 天平 11년1월 30일 「經師手實帳計」,동 7-360), 여마양(余馬養, 天平 15년 9월 2일 「余馬養手實」, 동 8-237, 1-494) 등이다. 이 밖의 사료에도 여의인(余義仁, 『속일본기』 天平 16년10월 을미조), 여비매대리(余比賣大利, 『政事要略』 24, 양로 5년9월11일 「官曺事類」), 여인군(余仁軍, 『속일본기』 養老 7년정월병자조), 여명군(余明軍, 『萬葉集』 3-394, 天平 3년 7월) 등이 있다.
2. 도모왕(都慕王)
도모왕에 대해서는 「화조신(和朝臣)」 조(779) 참조.
3. 혜왕(惠王)
백제 제28대 왕으로 성왕의 차남이자 위덕왕의 동생이다. 재위 기간은 598~599년까지이다. 『일본서기』 흠명기 16년(555) 2월조와 동 17년 정월조에는 청병사로서 왜국에 파견된 기록이 나온다. 그는 한강 유역이 신라에 점령당하고 성왕이 피살되는 위기의 상황 속에서 위덕왕의 명을 받고 왜국에 구원을 요청하여 축자의 용사 1천 명과 무기 등을 지원받아 귀국한 기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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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조신(百濟朝臣; 구다라노아오미) 자료번호 : ss.k_0002_0020_0020_0060